인조, 명군이 되다 228화
경기도 광주부廣州府.
그 이름처럼 대토지가 펼쳐진 광주부에는, 대대로 금싸라기 땅을 틀어쥐고 떵떵거리며 살아온 유지들이 많았다.
백씨 집안의 만석도 그중 하나였다.
올해 들어서 지천명에 다다른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바람을 쐬었다.
그간 반평생을 집안과 부친의 여망에 따라 열심히 수학하였으나, 얻어낸 건 왜란으로 나라가 빈궁하던 시절 수령에게 사들인 진사 자리뿐이었다.
그러니 못난 아비를 대신하여 별채에서 경서를 외우는 데 여념이 없는 외동아들은 만석의 자랑거리였다.
소과에서 아들이 따온 백패白牌가 한 해도 안 되어 손때가 누렇게 탈 정도로.
‘자랑을 안 할 수는 없잖은가?’
유지들이 모일 때마다 그가 듣는 진사 소리는 존칭이 아닌 놀림거리에 불과했다.
돈으로 산 진사 자리라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왕년에 공부 좀 했답시며 거들먹거리던 노인네들은 자식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오직 그만이, 땅 농사는 몰라도 자식 농사는 조진 늙은이들 앞에서 배알 꿇리는 소리를 당당하게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놈은 자랑을 얼마나 하고 다녔는지 백패에 누렇게 때가 다 탔네!
-차라리 이게 더 보기 좋다. 네 집 아들내미는 술 처먹기 바빠서 십 년 된 경전이 아직도 빳빳하잖어?
-이 육시럴놈이?
-종이는 마땅히 때가 타야 보기 더 좋은 법이여!
이따금 들어오는 반격이라곤 나이 잘못 먹는 노친네들답게 쉰내 나는 소리뿐.
-진사를 돈 주고 산 돌대가리 밑에서 어떻게 그런 애가 나왔지? 다른 사람 씨 아니야?
-관 짤 때쯤엔 애가 노름으로 땅 날려서 묻힐 데도 없을 놈들이. 나에게 종자라도 빌려달라지 그랬더냐?
“크으.”
만석은 감탄을 토해냈다.
진사 한 번 돈 주고 샀다고 장대한 세월 구박받다가, 이젠 자식 자랑 하나만으로 방어에 반격까지 되고 있었다.
이래서 온 세상 아비들이 죄 자식 교육에 열성인 게 아니겠는가.
‘고놈들은 조져서 불쌍하네.’
……아니. 별로 불쌍하진 않았다.
고작 작년까지도 진사 어르신, 진사 어르신하고 놀려댔던 놈들이다.
쿵, 쿵!
문득 대문이 올렸다.
‘지금 남의 집 귀한 자식이 공부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온다는 통기 한 장 보내지 않고 대문을 두드리고 자빠졌는가?
마당을 지키는 노복이 슬쩍 돌아보았고, 만석은 가보라며 턱짓했다.
곧 대문에 도착한 노복은 불청객과 잡담을 나누었다.
‘……늙은이?’
문간을 슬쩍 흘긴 만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에서는 본 적 없는 인상이었고, 집안의 친척이라면 몰라볼 리 없었다.
‘차려입은 걸 보니 구걸이나 하러 온 인상은 아닌 듯한데…….’
불청객과 잡담을 나눈 노복은, 상전의 허락조차 없이 늙은이를 이끌고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뭐지?’
일자무식인 노복이라도 상하의 구분은 알았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불청객을 안으로 들였다면, 마땅히 만석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
팔걸이에 기대 뚱하니 바깥을 쳐다보던 만석은 일단 자세를 고쳤다.
“여기 백가의 주인 되시는 분이시구려?”
“……그렇습니다마는, 노야老爺께서는 존칭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여기 늙은이는 한양에서 나온 황 영감이라고 하네.”
“……!”
영감은 정삼품 당상과 종이품에게 붙이는 존칭이었다.
일개 진사 자리를 돈 주고 산 만석에서는 하늘과 같은 존재.
그래서 영감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무엇이 있나,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이구, 소인이 결례가 많았습니다.”
“괜찮네. 편하게 앉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들어오시지요.”
만석은 문간에서 물러나며 황 영감에게 상석을 양보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무릎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영감께서는 새로 부임하시는 부윤 되십니까?”
“그렇게 봐주니 고맙네만, 나는 원래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었네.”
만석의 머리가 곧장 팽팽 돌아갔다.
‘그럼 내시란 말인가? 어쩐지 수염이 없었구나. 그렇다면 종이품 상선이나 종삼품 상온이렷다.’
내시라도 품계는 문무관과 공유한다.
이례적인 경우를 제한다면 보통 내시가 상선을 능가하는 종이품 이상의 품계가 수여되는 일은 없으나, 일단 받은 품계라면 그에 따르는 존중을 받았다.
“이런 벽지에서 내시부의 어른을 뵙게 될 줄은 몰라 참으로 놀랍고 또 황송할 따름입니다만, 영감께서는 어인 일로…….”
더더욱 미지수였다.
‘전하께서 내게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아. 다름이 아니고.”
황 영감은 돈 들인 태가 물씬 풍기는 호패를 내려놓았다.
신분에 따른 호패의 제약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전례를 따랐다.
황 영감의 호패는 상아에 홈을 새기고 인을 발라 채운 것이었다.
“이건 계속 달고 다니기 무거워서.”
“아, 예…….”
“자.”
황 영감이 뒤따라 책자를 밀어냈다.
표지는 없었다.
만석은 눈치보며 책자를 펼쳤다가, 백지보다 먹물이 더 많은 것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안구가 삭막하게 메마르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조합원 가입서라고.”
“조합이요? 아, 아니! 이상한 데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상한 데 이름을 올렸다간, 그대로 이상한 일에 엮여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수가 있었다.
“거 참.”
황 영감은 자신의 앞으로 밀어진 가입서를 보곤 혀를 찼다.
“이번에 전하께서 내수사를 통해 새로운 기관을 세운다는 소식, 들어는 보았나?”
“……예. 은행. 아닙니까?”
“그 기관에 출자금을 보태, 향후 은행에서 발생하는 수익에서 지분만큼 이익을 되돌려받을 수 있네.”
만석은 시큰둥했다.
그로서는 은행이 어떤 기관이고, 향후 어떠한 영향력을 가질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간 듣도 보도 못하고 근본 없는 조직에 불과할 뿐.
마땅한 조심성이었으나, 황 영감이 한눈에 파악한 만석은 못 배운 유지였고 당근을 덜 흔들어서 아직 꾀지 못하였을 따름이었다.
“자네. 경기도에서 이앙법 시행을 가지고 설문한 건 알고 있겠지?”
“그야, 당연히 알고 있지요.”
“이앙법의 도입에 성공하면 소출이 어떻게 되나.”
“배는 늘어나지요.”
“사람 입은 한 해 만에 불어나지 않는데, 그 입에 들어갈 쌀은 배는 늘어난다……. 그럼 쌀이 잔뜩 남아돌겠군. 향후 쌀값이 어떻게 되리라 생각하나?”
빽빽한 글자 앞에서 난독증을 호소하는 만석도 이 정도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쌀값이 떨어지겠지요.”
“은행에서는 자네가 기탁하는 양곡의 가치를, 그대로가 아닌 귀금속의 가치로 산정하여 기록해둘 걸세.”
“음…….”
“향후 양곡 가치가 크게 폭락했을 때, 자네는 앉아서 돈을 벌게 된다는 걸세.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말이야. 양곡이 해묵어 삭고 쥐가 파먹어서 가치 떨어지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고.”
“흐으음…….”
세상에 돈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앉아서 버는 돈 싫어할 사람은 또 어디 있겠는가.
만석이 거의 넘어와서 확답하지 못하고 고뇌를 이어가자 황 영감은 미소와 함께 쐐기를 박았다.
“이미 중앙의 재상들께선 각기 수천 섬의 양곡을 맡겼네.”
“……!”
“내 생각엔, 대감 소리 듣는 사람들이 멍청해서 은행에 거금을 투자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우리, 백가의 주인께서는 멍청한 편인가, 멍청하지 않은 편인가?”
얼얼한 도발에 만석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쌀 오천 섬! 제가 쌓아놓은 거 전부 드리면, 되겠습니까?!”
“되고말고.”
“…….”
“하지만 말만으로 약조하면 자네의 기탁을 물증으로 남겨놓을 수 없겠지? 다시 조합원 가입서로 돌아가서…….”
* * *
“방금 적어둔 임의의 숫자와 문자는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되네. 다른 누군가에게도 보여주면 안 되고.”
“어째서입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은행을 찾아와 자네인 척하고 기탁금을 인출해버릴 수 있으니까.”
“……!”
기겁한 만석이 허둥지둥 다시 붓을 들었다.
그 광경에 황 영감은 스으읍, 잇소리를 내곤 말했다.
“그리 길지도 않은데 외우지 그러나? 누가 그 종이를 들고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 일단 외우고 난 다음에 없애겠습니다.”
“조심하게.”
“예…….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천 섬이나 맡긴다고 무턱대고 질러버려서일까. 극도로 조심스러워진 만석이 소극적으로 물었다.
“은행에 기탁금을 맡기면, 그으, 관리로 임명되는 데 가점은 있습니까?”
“……그건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크게 보태드렸으니 그 공훈을 조금이나마……, 예에…….”
“그 오천 섬. 전하께 바친 건가, 아니면 재산을 보전하고 늘리려고 맡긴 건가?”
“…….”
“뭔 놈의 가점인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혹 이 일로 자식의 출세에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을까, 싶었던 만석은 금세 침울해졌다.
그 광경에 황 영감이 눈살을 찌푸리고서 일렀다.
“설령 만금을 준대도 관직을 살 수는 없네. 나라 다 망해가던 소싯적도 아니고……. 요즘 같은 세상에 돈으로 관직 샀다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가?”
고작 진사 하나 샀다고 수십 년 치욕을 당했던 만석이다.
그런데, 혼자서도 충분히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아들에게 그런 치욕을 당하게 해야 할까?
답은 뻔했다.
“아닙니다.”
“거, 나는 볼일 다 봤으니까 이만 가보겠네. 궁금한 게 있으면 은행에 문의하고.”
“아. 예.”
“혹여 다른 내시부나 내명부 늙은이들이 와서 비슷한 소리 늘어놓으려고 하면 황 영감이 다녀갔다고 하게.”
“……예? 내시부랑…… 내명부라니요?”
내시부야 내수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니 그렇다 쳐도 궁녀 조직인 내명부에서는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런 게 있어.”
실적 경쟁이라고.
내명부 할머니들에게는 선전포고까지 당한 마당이다.
-뭔 놈의 여인네들이 건방지게 돈을 만지겠다고 유난인지.
-거기 영감쟁이들은 고자라서 우리랑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나?
최초의 은행 임원진은 음기 가득한 남성과 음기 가득한 여성으로 반분하여 이미 파벌 싸움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힘을 가지려면 실적이 중요했다.
“크흠, 전달만 해! 그러면 더 귀찮게 하지 않고 돌아갈 테니.”
“……예에. 알겠습니다.”
* * *
“벌써 이만큼의 양곡이 모일 줄이야.”
“은행의 구성원들이 직접 발로 뛰어 이뤄낸 성과이옵니다.”
그리고 발 덕분만은 아니었다.
-이 여편네들이 무슨 재주로 이렇게 많이 모아왔어?!
-여자들에게는 베갯머리 송사라는 무기가 있다. 아, 영감쟁이들은 고자라서 그게 뭔지 모르겠구나!
“……크흠!”
이미 은퇴까지 했던 내시부와 내명부의 원로들답지 않은 천박한 싸움 역시, 실적 달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차마 왕에게 말씀드릴 내용이 아니었을 뿐.
“기탁금의 출저는 다 갖춰져 있지요? 먹고 째는 건 없습니다. 은행이 처음 세워질 때는 전부지만, 영업에 들어가면 신뢰가 전부입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기탁금은 없사옵니다.”
애초에 실적을 쌓으려면 출처부터가 분명해야 했던지라.
“좋습니다. 그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양곡은 2할가량만 남겨놓고 조정에 팝니다.”
충당된 양곡은 일부 비사성의 원정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고, 식량난이 심화하는 동안 필요한 곳에 구휼미로 사용될 거다.
좋은 데 쓸 건데 굳이 파는 이유?
“……새로 찍어낼 화폐로.”
조정에 화폐로 빚을 지워놔야, 그것을 찍어내는 의미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