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9화
이건 간단한 상식이다.
모 국가에 경제적 가치가 100만큼 있고, 이에 할당된 화폐의 총액이 100만큼 있다고 치자.
여기서 정부가 100만큼의 돈을 추가로 발행하면 어떻게 될까.
경제적 가치는 그대로 100만큼 있는데, 돈만 200으로 늘어났다.
그날로 물가는 두 배가 되고, 공돈이 생긴 정부만 부자가 된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차라리 낫지.’
상응하는 경제성장이 동반하지 않은 화폐의 발행은 물가 상승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의 주도하에 벌어졌다면, 이는 전 국민에게 가해지는 간접적인 징수와 마찬가지다.
가계가 100만큼의 화폐를 지니고 있을 때, 정부가 100만큼의 화폐를 갑자기 발행했다고 치자.
물가는 두 배가 되었고, 화폐의 가치는 절반이 되었다.
기존에 가계가 가진 화폐 100이 100만큼의 경제적 가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면, 정부의 화폐 발행 이후로는 50만큼의 경제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
반대로 정부는 직접 발행한 100만큼의 화폐로 50만큼의 경제적 가치를 가져왔다.
창출해낸 게 아니다.
가계에서 빼앗아 온 거다.
이것이 정부 주도의 인플레이션은 간접적인 징수인 이유다.
‘이상적인 조건이 전제되었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도 크게 다르지 않아.’
구한말, 이 땅에는 흥선대원군이라는 희대의 경제 천재가 등장했다.
그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당일전을 당백전으로 바꿈으로써 주조차익을 백 배 이상으로 확대할 수 있으며, 이로써 조정은 무한히 부강해지고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했더니…….
경복궁은 어떻게 지어놨는데,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났다.
신용 잃은 신용화폐가 다 그렇듯이, 상평통보는 그저 ‘특이하게 생긴 쇳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상평통보를 경제적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벼락거지가 되었다.
나라가 백성들의 부를 강탈하여 경복궁을 짓는 데 사용한 것이다.
상평통보가 화폐조무사가 되어버림으로써 비어버린 통화의 자리에는 중국산 청전淸錢이 과반 가까이 잠식했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은 그 청전을 더 수입한다는 분탕까지 저질렀고, 덕분에 조선은 내부에서 도는 통화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자기가 발행하는 화폐도 아닌데 어떻게 통제한단 말인가?
청나라가 돈으로 장난치면 그대로 당해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후 당백전은 고작 2년 만에 퇴출되었지만, 나라가 망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흥선대원군을 축출해낸 고종은 뒤늦게 청전까지 금지하였으나, 이미 조선의 경제란 주작이나 현무와 마찬가지로 가상의 존재가 되어버린 뒤였다.
백성들이 다 거지가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세금을 거둘 수 있을까.
이는 고종 무렵 조선의 극도로 피폐해진 재정상태와 외부세력의 노골적인 침략에도 무방비해진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조정에서 주조권을 빼앗아 독점하려는 이유다.
흥선대원군 같은 경제 천재天災가 또 혜성처럼 등장하여 단숨에 나라를 폭파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로도 그랬듯이, 그냥 나라가 망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에는 나라의 여러 기관이 자체적으로 주조권을 남발해 왔다.
민간의 부를 기관들이 마구잡이로 강탈하여 전용한 셈.
이러한 사례를 지구 반대편의 경제학자들에게 알려준다면 미래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경제학자들이 이 끔찍한 현실을 부정하고자 자기 눈을 지져버리거나 총구를 삼킨 채 방아쇠를 갈겨버렸을 테니까.
‘일반인인 나조차도 뇌수가 저릴 지경인데.’
물론, 왕이 혼자서 주조권을 독점한다고 폐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이의 흥선대원군이 대통大統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은행과 마찬가지로 견제와 감시가 필요했다.
그런데 무식한 위정자들이 뭘 알겠는가? 돈을 찍어내는 것의 책임은 보이지 않고, 혜택만 보이니 게걸스럽게 탐하기나 하겠지.
엄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 * *
신하들을 불러모아 주조권을 독점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뭐, 꼬우면 자체적으로 화폐 발행해 보세요.”
“…….”
“그런데 법으로 억지로 쓰게 강요하면서도 세금으로는 받지 않겠다. 이딴 같잖은 짓거릴 할 거라면 내가 허락 못 합니다. 어차피 실패할 사업을 왜 귀한 예산 들여서 합니까? 내가 꼽다고?”
그건 단적으로 말해 이런 뜻이다.
주조차익은 신나게 빨아먹고 싶지만, 거기에 필요한 신용은 책임지지 않겠다.
조선이 화폐 유통에 거듭 실패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자! 이게 새로 나온 화폐라는 건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우리가 마음대로 정했다!
-네놈들은 그 기준에 맞춰서 화폐를 이용해야 하지만, 우리는 세금 거둘 때 화폐는 안 받아줄 거다!
-조정이 뒤에서는 화폐에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공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조정의 태도가 딱 이런 꼴인데 어느 바보 멍청이가 화폐를 신용하겠는가.
신용 없는 신용화폐는 그냥 휴지고 쇳덩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앞에서는 기를 쓰고 아니라면서 백성들에게 화폐를 강요한 조정이 도적놈들이지.
“반대로, 나는 그간 수십만 냥의 금과 은을 모아두었습니다. 발행한 화폐와 지정한 비율로 언제든지 교환하게 해줄 거고, 은행을 통해서라면 세금도 낼 수 있게 해줄 겁니다.”
화폐의 가치만큼 양곡으로 교환해 대납하면 되니까.
“그런데도 기어코 어디 나랑 한 번 해보겠다는 놈 있습니까?”
“…….”
“대놓고 말은 못 하겠어도 내심 꼽다 싶으면 집에 가서 종이에 찍찍 이건 1냥, 저건 10냥 하고 적어다가 백성들에게 강요해 보십시오. 미친놈 취급을 당할 텐데, 그게 정신 차리는 데 도움 될 겁니다.”
“…….”
침묵 속에서 바짝 긴장한 중신들이 고개 숙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엄하게 나온 적이 흔치 않아서 그렇다.
보통은 신하들이 왈가왈부 떠들게 두고 필요할 때만 중재자나 결정권자로서 나섰으니까.
주조권은 그렇게 해줄 수 없다.
“이견 있으신 분?”
이에 연신 눈치를 보아왔던 영의정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나섰다.
“……전하.”
“영상.”
“은행을 이미 내수사가 주도적으로 설립했는데, 주조권까지 전하께서 맡으신다면 내수사가 나라의 전반을 틀어쥐게 되지 않겠사옵니까?”
이원익이 우려와 함께 덧붙였다.
“이미 이 땅 위의 억조창생이 모두의 전하의 것이옵니다만, 화폐를 발행하는 주조권은 민생과 직결된 권한이온데…….”
“내가 남발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신이 감히 어찌 전하를 의심하겠사옵니까. 다만…….”
이원익이 말끝을 흐렸다. 과연 신하가 할 말은 아니었다.
“혹 후왕後王이 주조권을 남용할지도 모른다, 우려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에. 만에 하나이겠으나 부작용을 생각해본다면 마땅히 우려할 일이라 사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조정에서는, 화폐 발행권에 대항력을 가진다.”
“…….”
이원익은 금방이라도 앓는 소리를 낼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오무렸다.
은행이 거론될 때처럼,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주조권을 가져간 건가 싶겠지.
그런데 이번 건은 은행과 조금 다르다.
화폐 발행은 은행의 운영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니까.
은행이 타락하고 신용을 잃는다면, 그저 고객이 이용하지 않으면 될 따름이다.
그런데 주조권은 남용되면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
강제로.
조정이 찬반의 권한이 아닌, 반대력만 가지게 하려는 이유다.
‘흥선대원군 같은 근시안적인 경제 착취는 제하더라도, 후대의 위정자들이 경제의 성장이나 회복을 가장하고자 화폐를 발행할 수도 있으니까.’
경제성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과도한 화폐 발행은 경제에 해롭다.
단기적으로는 늘어난 유동량이 투자처를 찾아가면서 긍정적인 현상이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화폐 보유자들에게 간접적인 징수가 되는 건 물론이고, 경제 대비 통화가 늘어나면서 희소성과 신뢰도가 훼손되어 가치가 이중으로 하락한다.
국제적인 환경이라면 응당 국제적으로도 화폐의 신용이 하락한다.
‘여차하면 더 찍어내면 그만’ 따위인 화폐를 누가 믿겠는가?
그렇게 화폐 가치가 과도하게 하락하면 수입과 수출이 모두 어려워진다. 나라 안팎으로 물가상승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나라가 미국 같은 패권국이라면 타국에 불황을 전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먼 미래, 7, 80년대의 미국은 금본위제의 포기에 오일쇼크까지 겹치자 극심한 경제 혼란에 놓였다.
스태그플레이션.
경제 침체에 더불어 물가까지 상승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당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대응으로서 호전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렸다.
이는 미국 밖으로 유출되었던 달러와 함께, 달러 채무국들의 경제까지 미국으로 흡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달러의 가치와 금리가 함께 상승하면서 달러 채무국들은 파산 또는 파산 위기에 처한 데 반해, 미국의 경제는 안정되었기 때문.
조선의 미래가 그런 패권국이 아니라면.
그래서 다른 나라에 불황을 전가하지 못한다면?
‘돈 가지고 장난쳤다가 손모가지 날아가겠지.’
사실, 패권국이 아니라면 돈 가지고 장난을 안 쳐도 손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다.
달러의 가치와 미국의 경제가 안정된 이후.
미국은 달러의 강화로 수출이 악화하고 수입은 늘어나 경제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각국과 플라자 합의를 맺어 의도적인 달러 약화를 일으켰다.
이는 일본에 대미국 수출 호황으로 부흥한 제조업의 몰락을 일으켰고, 반대로 수입이 축소한 미국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내수시장이 살아났다.
미국의 오락가락하는 돈 장난에 이번에는 애먼 일본의 손모가지가 날아간 셈.
이는 19세기 청나라가 겪은 일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나라 모두, 깡패 상대로 무역흑자를 본 죄로 벌 받은 것이다.
국제란 이렇게나 살벌하다.
‘그리고 이때 일본이 맞은 뽕이 통화공급이었지.’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시장에 막대한 현금을 살포한 것이다.
그 결과, 플라자 합의를 맞고 시름시름 앓던 일본은 단숨에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이는 경제의 건실한 성장을 수반한 호황이 아니었고 시장에 살포된 현금 대부분은 부동산으로 흘러가 막대한 거품과 가계 채무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많은 일본인이 돈도 빚도 많은 세입자가 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돈도 빚도 많은 세입자’들이 ‘돈은 없는데 빚은 있는 노숙자’들로 전락하기 전에 부동산과 가계 채무를 정상화하고자 다시 대출을 제한했고…….
일본은 격통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30년 동안 보복성 디플레이션을 후유증으로 앓았다.
허술한 통화팽창이라는 게 이렇다.
처음에는 침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 방 맞고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둘 중 하나다.
끝까지 현실을 외면하고자 뽕을 계속 맞다가 아예 죽어버리거나.
죽기 전에 심각한 부작용을 앓으면서 현실로 돌아오거나.
위정자가 경제나 돈을 가지고 장난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두 결과 모두, 죽어 나가는 건 위정자들이 아니라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부터이기 때문에.
“내수사가 화폐를 더 발행하려는데 조정에서 반대한다면 대항력을 사용하고, 양측의 의견이 끝까지 좁혀지지 않으면 은행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중재합니다.”
시장이 커질수록 경제 현상의 변수는 무한에 가까워지고, 내가 조명한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니, 그때그때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최선의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다.
“…….”
신하들은 다소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모든 조심성이.
은행이나 주조권은 막강한 통제 수단이다.
이런 수단을 독점할 수 있으면서도 알아서 다른 권력의 감시와 견제를 자처한다는 건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이 당연한 원칙을 외면한 권력자들의 국가는 예외 없이 파멸하고 몰락했다.
나는 조선이 부강하기를 바라니,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