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30화
조선이 공든 탑을 세심하게 올리는 동안.
요동의 정세는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었다.
1. 분탕 종자도 처리했네요! 이대로만 갑시다, 여러분들!
2. 몇 개월 후
3. 퀭……
홍태주는 옛 수도 성경을 함락하며 제국을 토막 낸 분탕 종자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황폐화한 요동이 한순간에 달라지진 않았다.
요동의 주민과 관군들은 그게 불만이었다.
참칭자의 목은 베었으나 각처에는 여전히 부랑자와 걸인이 즐비했고, 해가 떨어지면 그들은 야음을 틈타 화적과 마적으로 변모했다.
변방을 점거한 외부세력과 독립 세력은 대조적인 번영과 질서를 과시했다.
특히, 후금이 약소했던 시절 저들만의 쟁취한 군소 독립 부족들.
체급은 작고 독립성이 강하며 비슷한 부족들과 유대감을 공유한다는 점은 혼란한 시기에 장점이 되어주었다.
전쟁과 연루되지 않고 내부를 철저히 단속하며, 외부에서 스며들 듯 엄습해 오는 약탈자들은 힘을 합쳐 격퇴했기 때문.
그 단단한 껍질 안에서 독립 부족들은 서로와 강 너머 조선과의 무역으로 부흥했다.
이러한 모습을 껍질 너머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요동민들로선 배 아픈 광경이었다.
이들은 내일 아침의 해를 보는 것부터가 사치인 신세였으므로.
어떤 이들은 비사성으로 눈길을 돌렸다.
최근 조선의 땅이 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요동민들에게는 서방정토西方淨土와 같은 극락으로 비쳤다.
그러나 조선의 원정군은 호락호락 엄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사성 일대로 이어지는 좁은 관문, 여문을 틀어막고서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으니까.
원정군으로서도 피곤한 일이었다.
“신속하게 장벽을 완성하라는 조정의 지침이 떨어졌다.”
원정군 원수, 이완이 장수들 앞에서 마편馬鞭을 쥔 채 일렀다.
“장벽 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장수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이미 하고 있거늘, 여염의 모친도 아니고 무얼 또 하라며 잔소리인가.
“속도를 내라는 의미다. 그래야 경계에 인력을 아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이완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마편의 끄트머리를 빼내, 장수들 앞에 펼쳐두었던 지도를 가리켰다.
여문 안쪽 땅.
“비사성을 외부와 격리한 다음에는, 내부 산간에 의지하여 해안가를 약탈하는 도적들을 소탕한다.”
예전에는 원정군을 거듭 시험하였으나, 대부분 수급이 되어 말뚝에 꽂힌 뒤로는 대신 무방비한 어촌을 노려댔다.
온전히 조선 땅이 된 비사성에서 도적이라니 가당찮은 일.
이에 장수 하나가 손을 들었다.
“말하라.”
“해안선 측량 결과에 따르면 내부 면적이 한양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여섯 배에 달한다고 들었습니다.”
성저십리란 한양을 중심으로 10리十里, 그러니까 4km 반경 이내를 의미한다.
수도권에 해당하는 셈.
극도로 비대해진 미래의 서울특별시와 비교하면 1/3가량에 불과하나 조선 시대에는 지하철도 차량도 없다.
걸어서 4km라면 짧지 않은 거리.
반경이니까 폭은 8km다.
비사성 일대의 면적은 그만한 폭을 가진 영역의 여섯 배인 셈이다.
“현재 원정군 규모로는 벅차지 않겠습니까? 영원토록 술래잡기만 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조정에서는 지원도 약속했다. 군사 오천에, 십만 섬 규모의 군비를 단계적으로 지급하겠다는군.”
“……!”
놀란 얼굴들 사이로 또 다른 장수가 물었다.
“시, 십만 섬이요?”
“그래.”
“조정에 그만한 여유가 있답니까? 아직 가을도 아닌데…….”
“있으니 준다고 하겠지. 어디, 전하께서 빈말로 약조하실 분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매번 쪼들려온 조선군이다.
전성기의 후금군을 연달아 격파한 기염을 토해내긴 했으나, 그게 어디 인력과 예산을 충분히 갖추어서 이뤄낸 성과던가.
승리 기여도에서 십중팔구는 유리한 지형과 최적화된 전술 및 지휘관의 역량 덕이다.
가벼운 요소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배제된다면 조선군에 남는 건 각기 1만 여에 불과한 북방군과 수방사 병력뿐.
지형의 이점조차 없이 드넓은 전장에서 후금군을 맞았더라면 역으로 몰살을 면치 못했을 전력이다.
조선군은 인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부족했다.
“조정에서 은행이란 것과 화폐를 도입했다는군. 군량과 예산은 그렇게 마련했겠지.”
이완이 덧붙이자 장수들의 안색이 굳었다.
칼잡이라도 기본적인 소양은 익혔다.
그간 시도한 화폐도입의 결과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전하께서는 선혜법과 호패법도 도입하신 분이다. 우리가 지원과 기대에 부응하는 방법은 전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다드리는 것이지, 과분한 염려 따위가 아니야.”
“…….”
“내 말이 틀렸나?”
이완이 엄하게 물었다.
장수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역만리에서 백날 걱정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게 최선이자 전부였다.
“제장은 조정의 주문에 좋은 대답을 돌려줄 수 있도록 분발하라. 회의는 이만 해산한다.”
* * *
여문 일대에서, 최초의 장벽은 자연석과 목책으로 축조됐다.
주변에서 바위와 큰 돌을 찾아 켜켜이 쌓고, 곧고 두꺼운 나무를 베어다 땅 깊숙이 박은 것이다.
그러나, 찾지 않을 땐 천지사방에 널린 게 돌이고 나무지만 막상 구하면 금세 떨어지는 법.
장벽이 완성되기 전 재료는 떨어졌고 작업은 지체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벽을 완성하라니…….’
임경업林慶業은 난처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는 정삼품이라는 낮지 않은 품계로 군제의 어깨인 중군中軍 자리에 더불어, 장벽건설의 책임을 맡았다.
태생이 천성 무골이라서일까.
바닥난 자재를 충당할 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업嗣業아.”
“예, 형님.”
원정에 동행한 임경업의 동행, 임사업은 종사품 만호를 맡아 거점을 책임지고 있었다.
“너는, 뭐. 좋은 생각 없냐?”
“……글쎄요.”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
임사업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은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 개진했으리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래!”
임사업은 형의 반짝이는 눈빛을 슬쩍 외면하고서 덧붙였다.
“널린 건 흙밖에 없습니다.”
“…….”
“……모래나 나뭇가지라던가.”
“……너는 그걸로 벽을 세울 수 있겠냐?”
“아니요…….”
언덕 비슷한 건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그런 거론 침입자를 막아낼 수 없었다.
임경업은 끓는 한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원수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자니 자신의 군직이 중군으로 끝날 것 같다.
차라리 달라질 게 있다면 모를까.
자재가 떨어졌으며 그래서 작업이 정체된 건 원수도 아는 바.
상책이 있었다면 진즉 하달했을 터였다.
“……그래. 가 봐라.”
“예. 좋은 생각이 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알았다.”
임경업은 별 기대감 담기지 않은 어조로 동생을 송별하고는, 집무실에 홀로 남아 포갠 손 위에 머리를 얹고 끙끙댔다.
그러나 상책이 떠오르지 않기는 마찬가지.
이대로는 속에서부터 자연발화하겠다 싶었던 임경업은 바람이라도 맞고자 밖으로 향했다.
진영은 노을 아래에서 밥 짓는 연기로 가득했다.
중군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병사들은 곳곳에서 드러눕거나 앉은 채 삼삼오오 잡담을 나눴다.
얼핏얼핏 들리는 건 시답잖은 농담과 진부한 불평들.
임경업은 때로 실소를 머금고, 또 때로는 공감하며 그 역시 나무둥치를 찾아 기댔다.
임경업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골치아픈 문제는 외면하고 머리를 비우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영감?”
알아보는 목소리에 임경업이 눈을 반쯤 떴다.
“종사관從事官.”
군영에서 실무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그래서 때로는 문관이 임명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머리 좋은 사람만 맡을 수 있다는 뜻.
“그대는 좋은 생각이 없나?”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십니다.”
“장벽 말이야.”
“…….”
더 물어오지 않는 걸 보아, 역시 머리는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비책을 떠올릴 정도는 아닌 걸까.
종사관은 앓는 소리만 낼 뿐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대도 별수 없는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마저 가보게. 나는 다시 고뇌해야 하니까.”
“해지면 춥습니다, 영감.”
“……자는 게 아니라니까?”
종사관이 침묵했다.
“가봐.”
“예.”
부하를 채근하여 쫓아낸 임경업은 못마땅한 얼굴로 멀어지는 등을 주시했다.
종사관은 지나가는 수레를 향해 무어라 외치며 손짓했다.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던 임경업은, 눈을 감고 다시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때 종사관이 빈 섬 자루를 주워들고서 흔들었다.
수레 끄트머리에서 흘러내린 걸까. 종사관은 이것도 다 귀한 물자라며 불쌍한 병사들을 갈구는 모양새였다.
“…….”
임경업의 눈에 다시금 무겁게 출렁거리는 빈 섬 자루가 들어왔다.
“……!”
잠이 싹 달아난 임경업은 나무둥치를 박차고 종사관에게 다가갔다.
잔소리를 들으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던 병사들이 먼저 중군을 발견했고, 뒤따라 종사관이 고개를 돌렸다.
“아. 이 녀석들이 자루를 흘려서 말입니다. 이것도 다 귀한 물자인데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어어. 잠시만 줘 보게.”
“……예.”
종사관은 중군이 갑자기 왜 이러나 아해하면서도 섬 자루를 건넸다.
본래는 곡식을 담는 자루다.
안을 꽉 채운다면 장정 한 사람이 한 해를 날 분량이 담긴다. 그만큼 큰 편.
“여기에 흙을 채울 수도 있나?”
“못 채울 것도 없지요. ……아!”
종사관은 임경업의 발상을 깨닫고서 감탄했다.
“안에 모래와 흙을 채워서 켜켜이 쌓는다면 장벽처럼 만들 수 있겠습니다!”
“종사관은 뒷북을 치는 데 소질이 있군. 자루는 충분한가?”
“충분하지요. 아니, 많습니다.”
섬 자루는 짚으로 만들어 무언가를 담는 것 외에도 용도가 많았다.
바닥에 깔거나, 지붕에 덮거나.
추울 때는 이불로 삼아도 그만이다.
이러한 용도는 섬 자루 자체를 소모하지는 않는데, 군대는 하루 먹는 양만 엄청나니 자연스럽게 빈 자루가 계속 쌓인다.
이때 좋은 소모처가 군마였다.
푹 삶아 먹인다면 풀을 대신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원정군은 군마를 많이 데려오지 않았다. 풀을 제외해도 하루에 콩만 1L씩 먹는다. 보급 부담으로 사람부터 적게 데려왔는데 군마는 얼마나 데려오겠는가.
즉, 원정군은 빈 섬 자루가 남아돌았다.
“내일 아침 작업을 재개하자고. 원수 영감을 불러올 테니, 차질 없이 준비해.”
어려운 일에 성과를 세웠다면 과시해 주는 게 인지상정.
그리고 그 과시에 한 팔 거드는 건 원수에게 좋은 인상 남기기 좋은 건수였다.
종사관이 활기차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이른 낮이었다.
원정군 원수 이완은 타개책을 찾았으니 검토해달라는 중군의 요청을 받았고, 부푼 마음으로 그의 주둔지를 방문했다.
주둔지는 이미 새벽부터 작업에 착수했는지 매우 분주했다.
기습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저 멀리까지 밀어버린 숲의 경계에서 일부 병력이 감시하는 동안, 벌판에서는 웃통을 벗은 병사들이 지게와 어깨에 섬을 이고 돌아다녔다.
‘섬?’
이완은 의아한 풍경에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하고는 미소지었다.
“원수 영감.”
“영감.”
중군 임경업과 그의 동생 만호 임사업이었다.
두 사람이 인사 올리자 이완이 미소 머금은 그대로 물었다.
“누구 발상인가?”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댄 결과입니다.”
“자루에 흙을 채워넣는다는 발상은 고뇌 끝의 결과보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이완의 통찰에 임경업이 멋쩍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역시, 원수 영감은 못 이기겠습니다.”
“혹시나 싶어 짚어봤는데 맞았군. 그래서, 누구 발상인가?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댔고 함께 고생했다는 건 알겠는데, 통찰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지.”
그래야 요긴하게 써먹을 것 아닌가.
겸손도 겸양도 좋지만, 이 건은 이완도 골치깨나 썩였던 문제였다.
심지어는 조정에 자재를 운송해 달라고 할까 고민까지 했다.
“중군입니다.”
만호 임사영이 말했다.
“으흠…….”
이완은 멋쩍어하는 임경업을 바라보았다.
“무재는 뛰어나도 머리는 대단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운이 좋았습니다.”
“겸양은 그쯤하고, 쌓아놓은 장벽의 상태를 보세.”
“안내하겠습니다.”
이미 주변에서는 작업 중이었으므로 완성된 장벽까지는 지척이었다.
역시나 장벽은 자루에 흙과 모래를 채워 켜켜이 쌓아올린 것이었다.
자루의 편의 덕에 작업은 신속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완은 힘을 담아 장벽을 눌러보았으나 변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손에 흙 조금 묻고 말았을 뿐.
하지만 비사성으로 숨어들려는 외부인들이 고작 이 정도로 물러날 리는 없었다.
“중군.”
“예.”
“장벽에 자신 있나?”
“있습니다.”
“그럼 와서 걷어차 보게.”
“예.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잠시……. 물러나시지요.”
이완이 물러나자 임경업은 곧장 전속력으로 뛰어 날아올랐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장벽을 걷어찼다.
퍽!
소리는 요란했으나 장벽은 끄떡하지 않았다.
날아 찬 임경업이 비록 등판에 흙을 잔뜩 묻히긴 했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검증이었다.
“대단하군. 아주 튼튼해.”
“원석으로 쌓았던 장벽을 해체해서 안팎으로 둘러주면 더 튼튼해질 겁니다!”
“으흠.”
이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렀다.
“다른 장수들에게도 전하지. ……아니, 여기로 보내서 자네 성과를 보여주는 게 나을 거 같아.”
“제대로 알려주겠습니다!”
“그래. 매번 날아 차지는 말고. 그러다가 발목 나가겠네.”
“알겠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상적이었네. 또 보자고.”
“예!”
이완은 씨익 웃어주고는 동행한 부관들과 발을 돌렸다.
임경업은 차마 원수를 바깥까지 안내하지 못했다.
시선이 거두어지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발목을 절었으니까.
“아오오…….”
임경업이 휘청거리자 곧장 동생 임사업이 부축하며 다그쳤다.
“그러게 왜 육갑을 떠셨습니까…….”
“원수 영감 말씀 못 들었어? 인상적이시라잖냐!”
육갑 떨 가치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