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31화
임경업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깨달음은 원정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원정군이 주둔한 지 꽤 되어 쌓인 섬 자루가 많았고, 흙과 모래는 그보다 더 많았으므로 장벽은 쾌속처럼 축조됐다.
여문 바깥을 서성이며 비사성 일대로 숨어들고자 한 방랑자들에겐 이보다 더한 비보가 없었다.
-다시 와 보니까 그새 장벽이 세워졌다!
-전날 밤에는 없던 장벽이 한순간에 생겨났다더라!
-조선군이 하루아침에 벽을 세웠다는데!
-반나절 만에 성벽을 세웠다고?!
소문은 갈수록 와전되어 여문에는 산해관 같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반나절 만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호사가들이 여문의 장벽에 장벽을 세운 당사자들조차 모르는 별명까지 붙였으니, 바로 반야관半夜關이었다.
이름 그대로 밤夜 절반半만에 세운 관문關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반야관 아닌 반야관의 주인들은 소문을 접하기도 전에 비사성 내부로 향해야 했다.
이전부터 내부의 산과 숲에 의지해 해안가 어촌들을 약탈하던 도적 떼를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이곳 주민들은 대정산大?山이라고 부릅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저곳에 도적들의 소굴이 있다고 합니다.”
부관의 말에 원정군 원수 이완은 녹음 가득한 산을 보다가 흘낏 지도를 살폈다.
“산지 초입이로군.”
대정산은 그 방대한 산지의 한 자락에 불과했다. 최초의 소탕 시도가 좌절한다면 도적들은 더 안쪽으로 숨어들어 두고두고 화근이 되리라.
부관이 말했다.
“그래서 다른 산과 격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산세로 이어지는 일면一面의 골짜기에 먼저 군사들을 신속히 투입해 퇴로를 차단하고, 노출된 나머지 삼면三面에도 군사를 포진하여 전방위에서 압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관은 설명과 함께 양손으로 지도 위의 대정산을 감쌌다.
“그렇게 하지.”
“우리가 움직였다는 게 현지인들을 통해서 이미 노출되었을 수 있습니다. 유능한 사람을 시켜 퇴로부터 빠르게 차단하시지요.”
이완은 고개를 끄덕이곤 앞을 향해 외쳤다.
“중군!”
원수의 호출에 중군장 임경업이 단숨에 뛰어왔다.
“예, 영감!”
“군사들을 이끌고 퇴로를 차단하게.”
“알겠습니다!”
임경업은 곧장 뛰쳐나가며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이완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걱정했다.
임경업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원정군의 경험과 성격을 우려할 따름이었다.
원정군의 최초 고참들은 실전으로 다져진 북방군과 수방사의 자원병들이다.
이들 주도의 혹독한 조련이 무의미하진 않았으나 북방군도 수방사도 막상 산지에서의 교전 경험은 부족하다.
원정군이 출정 이래 무수한 적습을 격퇴하였으나, 도적의 완전 퇴치를 꾀하는 건 이번이 처음.
‘잘 해낼 수 있을까.’
이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게 아니라, 잘 해내야 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이지.”
“예.”
* * *
깊숙한 대정산 숲속.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파고든 임경업은 동생이자 만호 임사원에게 후미를 맡긴 채 선두로 나섰다.
만약 도적들이 도망치고자 한다면 선두와 부딪힐 가능성이 컸으니까.
과연 그랬다.
“적이다!”
선두가 관목을 헤치며 나아가던 중 누군가 외쳤다.
임경업은 곧장 몸을 돌렸고, 비탈에서는 파스스 낙엽 바스라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곧장 쫓지 말고 사선으로 움직여라! 놈들이 우회할 거다!”
임경업은 모범을 보이겠다는 듯 대각선으로 산을 타며 앞을 향해 외쳤다.
“첨병들은 계속 직진해라! 적을 발견하더라도 쫓지 말고 퇴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해!”
일군一軍과 떼거리 하나가 가까워지면서 산 전체가 파스락파스락 울렸다.
그리고 두 선두가 마주했다.
원정군을 피해 우회하던 도적들은 끝내 탈출하지 못하자 저항을 선택했다.
“?我!”
“?他!”
“快快!快快!”
알아듣지 못할 언어들이 시끄럽게 교차하며 눈먼 화살이 쉭쉭 날았다.
반대로 원정군은 드러난 인영의 끄트머리를 찾아 정확하게 화살을 날렸고, 짐승 울음소리 같은 비명이 비탈을 울렸다.
“??! 救我!”
“我不聽??!”
“這是機器?譯!”
“什??!”
소란 속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굶주리고 성난 도적들은 야수와 같았다. 비탈 위에서 반쯤 헐벗은 채 달려드는 모습이 과연 그러했다.
무구는 낡고 녹슬어, 날은 붉고 창은 휘었어도 기세만은 날카롭다.
피가 튀기는 와중 먼저 붉게 문든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내지르는 창끝이 거칠게 중군 임경업의 갑주를 찢어발겼다.
뿌드드드득!
원색의 갑주가 찢어지며 변색한 내부의 철편들이 드러났다.
임경업은 칼날을 피해 도적의 손목을 감쌌고, 단호한 완력으로 끌어당겼다.
피부와 살점이 갈라졌고 격동하는 심장이 칼끝을 맞이했다.
환도가 빠져나가자 가슴께 근육이 즉시 오그라들었으나, 심장에서 폭발한 혈액은 상흔을 비집고 세상으로 분출했다.
임경업은 물총이 된 시체를 밀쳐내고서 다른 도적에게 달려들었다.
눈먼 화살이 스쳐 지나가고, 녹슨 창끝이 파고들었다.
임경업은 비껴간 창대를 단숨에 낚아챘다. 그리고 연속 동작처럼 환도의 손잡이 아래로 찍어 삭은 창대를 부러뜨린 뒤 목을 베고 날카로운 창대 끝을 가슴에 처박았다.
어느 쪽도 치명상.
상처를 짚으려던 도적의 손이 일순 갈 곳을 잃고 방황했고, 임경업은 그런 도적을 뻥 걷어찼다.
그렇게 몇 명을 더 베어나가니 비탈에는 처박힌 도적 시체가 즐비했다.
임경업은 격전이 그친 것을 파악하고 시체의 옷에 환도를 닦아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부상자는!”
“……여기 있습니다!”
곧 병사 하나가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임경업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쪽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약지와 소지가 반쯤 잘린 채 절단면에서 핏물이 새고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군.”
“……예.”
“하지만 처치는 신속해야 한다. 너!”
임경업은 가까이서 쉬고 있던 병사를 가리켰다.
“네가 책임지고 군영으로 데려가라!”
부상 수준은 경미하나 혹 단독으로 적과 조우한다면 대응하기 쉽지 않을 터.
지목된 병사는 군례를 올린 뒤 다친 전우의 어깨를 감싼 채 비탈을 내려갔다.
“나머지는 계속 이동한다!”
짧은 격전에도 병사들이 지치기엔 충분했으나 휴식을 줄 시간은 없었다. 이 순간 또 어떤 도적 무리가 산을 빠져나갈지 몰랐다.
* * *
부상자를 맞은 수방사 고참은 효과 좋은 부상 처치법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훈련하다가 다친 적이 있는데, 그때 세자 저하께서 직접 처치해 주셨거든.”
잊을 리 없다.
“그러니 걱정 말고, 긴장은 해라.”
손을 움켜쥔 부상병의 얼굴이 의문이 서렸다.
“엄청 쓰릴 거다.”
고참은 어디선가 떠온 쇠 잔의 물을 환부에 부었다.
상처에는 그냥 물이 들어가도 쓰린 법인데, 이건 그보다도 쓰렸다. 부상자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신음을 토해냈다.
“끄으으으!”
고참은 마른 백색 천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낸 뒤, 두툼한 종이 포장을 뜯어 붕대를 꺼냈다.
이 역시 붕대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세자의 발상.
고참은 부상병의 약지와 소지를 감싼 뒤 금속 집게로 고정했다.
“자. 이제 됐다.”
“……끝입니까?”
“전부 끝은 아니고. 소독은 매일 해야 하니까 딴 곳으로 새지 말고 남아있어라. 물 닿지 않게 조심하고.”
“예…….”
부상병은 손등으로 식은땀을 훔쳐내고서 물었다.
“그런데 잔에 담긴 물은 뭡니까?”
물에 뭘 탔길래 그토록 쓰리단 말인가.
고참은 대답 대신 잔을 건넸다.
“마셔봐.”
“……마셔보라고요?”
“몸에 나쁜 거 아니니까.”
부상병은 잔 속의 맑은 물을 흔들어보다가, 이미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갔는데 별일이 더 있겠나 싶어 잔을 기울였다.
“……짠데요?”
“소금물이다.”
“…….”
“효과 있어.”
식염수는 미래에서도 환부 소독에 이용한다.
정확히는 멸균생리식염수를 의료용으로 사용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만든 것이다.
이는 세자가 모 외상 전문의에게 비책으로 배운 식염수에다 막 끓인 것을 쓴다는 원칙을 더해 보급한 것.
물이 미지근한 건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 매일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단 말입니까?”
“다음에는 딱지가 앉아서 덜 아플 거다. 많이 놀랐을 텐데 가서 쉬어.”
“예…….”
진땀 뺀 부상병이 터덜터덜 물러나는 동안.
군영의 반대편에서는 원수 이완이 휘하 부장들에게 명했다.
“벌써 최초의 교전이 발생했으니 도적들이 빠르게 움직일 거다. 각자 지정된 위치로 가서 물 샐 틈도 없는 포위망을 구축한다. 질문 있나?”
“…….”
“없으면 움직여!”
“예!”
제장은 제각기 내려놓은 투구를 덮어쓰고 사방으로 해산했다.
곧 소란과 분주함 속에서 병사들이 잰걸음으로 줄줄이 군영을 빠져나갔다.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막 처치 받은 손을 감싼 부상병은, 출전하는 전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펑!
폭음과 함께 나무가 퍽 튀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임경업은 곧장 빠져나와 시위를 놓았다. 쉬익! 공기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빛살처럼 나갔다.
적중이었다.
도적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퇴로를 차단당한 채 포위망이 좁혀들자 도적들은 꼭대기로 피신하며 저항했다.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으며, 바위를 굴리거나 때로는 지금처럼 총포를 갈겼다.
펑! 조금 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도적 하나가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아아악!”
과연 도적들이 총포와 화약의 보관법을 제대로 알까.
어떻게든 입수는 한 모양이나, 부실한 관리 덕에 총포가 격발과 동시에 폭발해버린 듯했다.
면상이 구워진 것인지 파편이 파고든 것인지 비명을 내지르던 도적의 안면에 화살이 처박혔다. 인도적인 선사였다.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시체와 돌, 바위와 무구가 선물처럼 흘러내렸다.
적들의 저항이 꽤 격렬했으므로 조선군 중에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대부분은 최근 충원된 신병들이었다.
“다쳤으면 물러나! 최 대장隊長!”
대장은 열한 명으로 이루어진 대隊의 지휘관.
임경업의 호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엄폐하고 있던 고참이 답했다.
“예!”
“왼쪽 경사면으로 우회해라! 나머지! 엄호한다!”
최 대장이 부하들과 뛰쳐나가는 순간.
임경업과 다른 병사들은 제각기 화살을 한 움쿰 쥐고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조준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화살은 초 단위로 속사할 수 있다.
화살이 소나기처럼 날아들자 도적들은 몸을 숨겼고, 그동안 비탈을 거쳐 우회한 최 대정의 부대가 적지로 난입했다.
“쳐라!”
언덕 너머에서 들리는 최 대정의 명령에 임경업 역시 병사들을 채근했다.
“올라라!”
최 대정과 그의 부하들이 위험을 감수하여 벌어준 귀중한 기회다.
임경업과 부하들은 제각기 무장을 하고서 비탈을 올랐다.
그리고 난전에 난입하여 우군을 몰아붙이는 도적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많은 적을 베었으나, 거의 동수의 도적이 안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대치 상황이 재개됐다.
‘이런 제기랄.’
임경업은 서산으로 넘어간 해를 의식하며 입술을 씹었다.
소탕 작전이 아침 일찍 시작했으나 대정산은 작지 않았으며, 이곳에 터를 잡은 도적들 역시 적지 않았다.
이대로 싸움이 연장되어 야간이 된다면 소탕 작전은 더욱 어려워지리라.
그러나,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몰아칠 수밖에.
변화는 그때 일어났다.
“火!”
노을을 앞두고 그림자가 진해졌던 숲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온기가 산 위에서부터 범람하여 몰아쳤고, 도적들은 저항마저 포기하고서 사방으로 내달렸다.
산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