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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32화 (23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2화

“모두 하산해라!”

흩어지는 도적 따위를 사냥할 때가 아니었다.

임경업의 명령에 병사들은 잰걸음으로 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반대편에서는 잘 피신하고 있을까?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노을을 더 붉게 만드는 화마를 못 보지는 않았을 테지.

……그리고 원정군이 대정산에서 하산하여 군영으로 피신했을 즈음.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병사들은 중구난방으로 하산하여 부대는 마구잡이로 뒤섞였고, 인원의 점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보이지 않는 병사를 찾아 호명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얼마나 많은 병사가 실종됐지?”

안쪽에서는 원정군 원수 이완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부대 지휘관들은 각자 부대를 수습하는 데만도 벅찼으므로, 이완의 앞에는 공석이 많았다.

가까스로 자리를 채우고 있던 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대강이라도.”

“최소 수백입니다.”

이완이 눈살을 찌푸리며 미간을 꼬집었다.

“신병들의 피해가 특히 큽니다. 교전 경험이 전무한데 생소한 이역만리에서 혼란한 와중 흩어지기까지 한 탓이겠지요.”

“모두 죽지는 않았겠지.”

“예. 실종자 전원이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하는 녀석이 대부분이겠지요.”

노을이 물러나면서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하나둘 합류하는 병사들이 이를 증명했다.

이역만리라지만 이정표 하나만은 확실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대정산 꼭대기는 산 자체가 봉화가 된 것처럼 더 밝고 요란하게 타올랐으니까.

“황망한 마음에 방향 감각을 잃고 그저 대정산에서 멀어지고만 있는 병사들도 많을 것이다. 기병들을 풀어 일대를 수색해라.”

“알겠습니다.”

이완은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산불이 번진 이유는 무엇인가?

포위를 조이던 중 들리기 시작한 폭음과 깊은 연관이 있을 터였다.

화약을 적절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폭발할 위험이 있다. 조총 역시 그러하다. 조총이나 화약에 문제가 없더라도 불붙은 화승이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도적들이 원정군과 함께 폭사하고자 벌인 일은 아닐 테지. 놈들 딴에도 사고인 셈.

꼭대기부터 불이 번졌으니 원정군보다 더 많은 수가 화마에 휘말렸을 거다.

적일지라도 애석한 죽음이다.

작열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죽음 중에서도 최악의 것이니.

“내일 아침까지 휴식을 겸하여 실종자를 기다린 뒤 철군한다. 병사들이 많이 지쳤을 테니 저녁 보급은 충분히 하도록.”

“예.”

* * *

족히 수백 명으로 추산된 실종자는 다음 날 아침 두 자리로 줄어들었다.

알아서 찾아온 이들도 가상했지만, 밤잠까지 마다하고 곳곳을 쏘다닌 기병들의 공로가 컸다.

“아직도 귀환하지 못한 이들 전부가 전사자는 아니겠지만, 그들을 위해 모든 병력을 야지에서 대기시킬 수는 없다.”

제장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안정한 본거지 밖에서는 병사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충분히 휴식시키지 못한다.

미복귀자들의 안위를 무시하는 건 아니나 전군의 편의도 중대한 사안.

“……일대 어촌에서는 우리가 진주하여 도적을 소탕한 것을 봤으니, 군사를 보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이완은 그렇게 자신과 제장을 위로하고는 일어났다.

그렇게 터덜터덜 여문으로 귀환한 원정군을 맞이하는 건 내수사 범선들이었다.

“한 척이 또 늘었습니다.”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군.”

범선의 드높은 돛대는 멀리서도 잘 보였다.

이완은 부관들과 곧장 부두로 향했다.

차곡차곡 쌓인 화물로 군량은 물론, 척박한 현지에서 접하기 힘든 술과 고기, 그리고 다종다양한 군수품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먼저 배에 내렸는지 신병들이 긴장한 얼굴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는 양하 작업을 거들던 고참들이 은근슬쩍 화물을 뒤지면서 감탄했다.

“이거, 술 맞지?”

“이야. 여기서 술을 다 보네.”

“안주도 있다!”

“미친!”

“와, 완전 새 피복도 있는데?!”

“때깔 돌았네.”

막 염색되어 채도 높은 원색의 의복들이 볕 아래에서 환하게 빛났다.

안 그래도 여름.

옷은 몇 벌이 있어도 부족한데 마침 빵빵하게 지급되니 고참들은 술과 고기보다 새 피복이 더 좋았다.

“거기 내려놔! 시체로 만들어서 새 수의 입혀주기 전에!”

멀리서 양하 작업을 감독하는 종사관이 빽 소리쳤다.

은근슬쩍 옷을 챙기려던 고참들이 볕 맞은 쥐처럼 흩어졌고, 종사관은 으르렁거리며 다가와 어질러진 옷을 다시 담았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 화물을 들쑤시는 고참들을 향해 외쳤다.

“야!”

부두 한쪽에서 개판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이완과 제장이 희희낙락했다.

심신이 모두 지친 와중 위안거리를 찾는 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도적 소탕은 끝을 앞둔 와중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깔끔히 마무리되지 못했고 손실은 작지 않았다.

원수나 장수들로나 찝찝한 상황.

이때 본국이 보낸 물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졌다.

“수고한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눠주면 딱이군.”

“예……!”

화물을 모두 내린 다음에는 귀국을 희망하는 부상자와 병사들이 배에 올랐다.

“간다고?”

“식겁해서.”

“별일이야 또 있으려고……. 그냥 있지.”

“그냥 간다, 인마.”

군중에서 면식을 싸운 병사들이 귀국자들과 마지막 대담을 나눴다.

배만 온다면 귀국은 자유로웠으나 선실은 다 채워지지 않았다.

원정군 종군의 대가는 비사성의 방대한 미개간지였다.

직급과 직군, 공적에 따라 가중치가 달라졌으나 근속기간만 채워도 상당한 면적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미개간지라도 본토에서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으므로, 귀국이 자유로워도 희망하는 사람은 적은 이유였다.

“원수 영감.”

그 와중 선단을 맡은 페르바스트, 배裵 제독이 이완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홍모이 출신을 과시하는 것일까.

배 제독은 의복마저 제 터럭처럼 진한 심홍색深紅色으로 염색해놓았는데 덕분에 눈에는 잘 띄었다.

“배裵 공公.”

“전하께서 영감께 전해드리고픈 말이 있으셨소이다.”

이완은 왕의 전언이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사배를 올리려 했으나, 배 제독이 곧장 일으켜 세웠다.

“개인적으로 전해달라던 말씀이셨소. 명령 같은 게 아니라.”

“그래도 예의는 표해야지.”

배 제독은 원수 주변의 부관들을 둘러보곤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어서.”

형식을 취하면 권위가 실리게 된다.

“이 역시 전하께서 내게 당부하셨던 바요. 억지로 예법을 표하게 하지 말고. 그저 잡담처럼 건네는 제안으로 여기기를 바란다고 하셨소.”

“…….”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아오.”

동방에서는 왕의 말에 실리는 힘이 서방보다 훨씬 무거웠다.

오죽하면 페르바스트조차 서양의 신분제와 작위는 동방에 비하면 훨씬 수평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이제는 그도 익숙해진 부분이었다.

“…….”

이완이 일단 들어보자는 듯 침묵하자 배 제독이 곧장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바다 건너 이역만리에서 고생이 많은 장병에게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셨소.”

이완의 눈썹이 올라갔다.

장병이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지 되새길 기회를 준다면 군중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오히려 이완이 부탁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왕이 도리어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상 시간을 내려면 번거로워지긴 하겠군.’

전 장병에게 소식을 전하고, 희망하는 자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편지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고, 분실하지 않도록 유의해서 전달해야 한다.

군영이 바쁜 와중이라면 자칫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

왕이 우려한 건 그 점이었고, 자신의 제안이 강요로 전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실로 과분한 배려였다.

‘그런 세심한 어심이 조선을 이곳까지 끌어온 비결이겠지.’

이완은 미소를 머금으며 기껍게 답했다.

“우리는 마침 전투를 마치고 귀환했고, 심신이 지친 장병을 달랠 방법이라면 다다익선이오. 신하가 먼저 간청드릴 일을 전하께서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니 망극하다고 전해주시오.”

배 제독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물러났다.

곧 이완의 전언이 있었다.

병사들은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소식에 앞다투어 나섰다.

본디 편지를 보내는 건 세족世族만의 특권.

값비싼 종이 및 문방사우를 구비하는 건 둘째 치고, 편지를 보낸다는 건 노복의 존재를 전제한다.

하물며 군에 몸담은 와중이라면 집에서만 아니라 임지에서도 자신을 수발들어줄 노복까지 필요하다.

먼 미래에서는 감상적이라고도 치부하지 못하게 된 편지가 이 시대에서는 극도의 사치인 셈.

마다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너 글 쓸 줄 안다면서?”

“아는데, 왜.”

“편지 보내려고. 글 좀 대신 써주라.”

“빨래 한 번 대신 해주면?”

“……하. 그래.”

편지를 쓰는 데 문방사우가 다 필요한 건 아니었다.

숯을 부러뜨려 파편의 날카로운 끝으로 사각사각 써 내리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종이는 군대에서 수시로 소모되는 물자였으므로, 더 가져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몇몇 사람은 문의하여 작은 짐을 곁들이기도 했다.

도적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쇄은碎銀이나 주둔지에서 소일거리 삼아 깎은 장식품 등.

가계에 보태고 이국에서 자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서면 이상의 증거들이 간간이 봉투에 담겼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들이 한 수레를 꽉 채웠다.

이를 마주하게 된 이완은 심경이 묘했다.

이전이라고 그리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나, 제각기 감정이 담겼을 무수한 편지들을 보니 병사들 하나하나가 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누군가라는 게 와닿았다.

“이 많은 편지를 어떻게 다 고향으로 보낸단 말인가?”

“내수사는 조선 땅 전역을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지요. 도 단위로, 고을 단위로 분류하여 각지로 송달한다면 양이 얼마나 되건 못 보낼 건 없습니다.”

“그렇군.”

내심 안심한 이완이 덧붙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테지만, 잘 부탁하네.”

* * *

배 제독과 범선들이 떠나가고 저녁이 찾아왔다.

편지를 통해 그간 쌓인 시름을 한 꺼풀 떨쳐낸 병사들은, 들뜬 마음으로 저녁의 연회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실종자 몇 명이 군영으로 귀환했다.

“이게 누구야!”

“더러운 배신자들아, 날 버려두고 도망쳐?”

“도망친 게 아니라 철군이지. 어차피, 알아서 잘 돌아왔네.”

“이 자식이 술에 고기 냄새까지 난다고 귀신같이 찾아온 거지. 개 코야, 아주.”

“낄낄.”

병사들은 죽다 살아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일일이 의식하고 비통해하기엔 다른 죽음들이 가볍지 않았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것만으로 고마운 행운이었다.

“이것들이 나 없이 몰래 잔치하려고.”

“걸렸네.”

“술이랑 고기는 다 어디서 난 거야?”

“빨간 옷 입은 오랑캐가 보따리에 한 아름 채워와서 선물해주고 갔다. 네가 착하게 지낸 보답이라고.”

“미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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