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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33화 (233/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3화

조선이 상평통보를 도입한 뒤, 가치의 기본 단위는 상평통보 한 닢이 된 것처럼 후대는 오해한다.

마치 미래의 원화가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평통보가 도입된 뒤에도 거래 대부분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도입 첫해에는 금납화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다음 해가 되어서야, 현물인 포布로 내는 포세布稅만을 국한하여 상평통보로 대납할 수 있게 했을 뿐.

여기에 쌀로 내는 미세米稅는 해당하지 않았다.

이후, 경제가 비대해지고 동전 수요와 함께 금납金納의 편의성이 증대하자 금납으로 대납할 수 있는 세금의 종류가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더 후기가 되어서는 상평통보의 절대적인 수량 부족으로 전황錢荒이 발생해, 오히려 백성들의 금납 부담이 가중됐다.

귀금속을 함유한 금속화폐의 한계다.

공장이 없는 시대. 대량 주조도 불가능한데 핵심 원료인 구리는 조선에서 귀했다.

후기 조선은 만성적인 전황으로 말기까지 전체 납세에서 금납의 비율은 2, 3할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상평통보가 없던 옛 시절과 마찬가지로 쌀과 베로 낸 것이다.

‘화폐가 그저 도입만 한다고 전부는 아니라는 방증이겠지.’

세심하고 적절하지 못한 취급은 정책의 효용성을 극단적으로 저해한다.

조선이 화폐를 도입하고자 애쓴 무수한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세상에 안 그런 정책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손안에서 금빛 납작한 동전이 이리저리 굴렸다.

형상은 원 역사에서도 이 즈음 도입되어 후기까지 이용된 상평통보常平通寶 그대로다.

딱히 다른 이름이나 형상을 취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이 동전을 다른 사람 손에도 들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정에 화폐의 사용을 강요하는 건 쉬웠다.

은행을 설립하며 쓸어모은 막대한 양곡을 조정에 빚지우되, 채무는 상평통보로 변제하는 조건을 달고 이자를 붙여 상환을 유도했기 때문.

몇몇 똘똘한 신하들이 이러한 조건을 우려하긴 했다.

왕이 상평통보의 공급을 제한하면 조정은 꼼짝없이 목줄을 차게 되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똘똘한 신하들은 이를 우려하지 않았다.

내가 조정을 착취하려고 그러한 조건을 건 게 아님을 알았으니까.

‘머리가 돌아가니까 걱정도 하는 거지.’

……그리고 불미스럽게도, 백성 모두가 그러한 지성을 갖춘 건 아니었다.

‘양곡 부족한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테고.’

상평통보로 상환하라는 조건을 덧붙인다면, 민간이 상평통보를 끌어들일 최소한의 구실은 갖춰지는 셈이다.

수요 없는 공급은 무의미한 법이므로 수요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마침 은행도 세워졌으니 딱이로군.’

그런 판단을 내리는 동안, 인평대군이 아비의 손가락에서 상평통보를 빼갔다.

“먹는 게 아니다.”

인평대군이 한참 어렸을 때는 손에 닿는 건 뭐든지 다 입으로 가져갔다.

유해한 건 방에 두지 않아 망정이지.

그렇다 치더라도 방심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나 중궁 중에 한 사람은 인평대군을 계속 주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좀 굵어졌다는 걸까.

엎어진 채 아비에게서 빼앗아간 상평통보를 살피던 인평대군은, 이쪽을 쳐다보며 조소를 지었다. 마치 자기를 바보로 아느냐는 투다.

얼마 전까진 바보 맞았는데.

‘너무할 정도로 빨리 자라는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기도 하고 말이다.

* * *

“신용, 이력…… 호패.”

창구를 두고 장정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세심한 손길로 호패를 확인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으나 세상에는 부정한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모름지기 재물을 빌려주는 쪽에서는 최대한 엄하고 철저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아쉬운 건 그들이 아니었다.

호패는 진품으로 판명됐다.

대출 신청자의 신분과 자산, 나이와 이력을 봤을 때 호패의 재질과 변형은 통상적인 수준이었으니까.

검증을 마친 여인은 창구 너머로 호패를 밀어냈다.

“갚으실 때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천이백 개를 가져오셔야 합니다.”

“……상평통보요?”

여인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납작한 동전을 밀어냈다.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상평통보라고 부르지요.”

중앙에 난 구멍을 중심으로 네 방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글자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본 적이 없는 물건인데……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곧 육의전六矣廛과 시전市廛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정 구하지 못한다면 내수사에서 양곡과 포布로 교환 가능합니다.”

대신 내수사는 최후의 보루다.

화폐를 보급하여도 시장에서 쓰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바, 내수사에서 교환해주는 비율은 의도적으로 시세보다 낮게 책정됐다.

“채무 변제 조건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겠습니다.”

“이곳에 지장을 찍으시지요. 이걸 엄지에 묻힌 다음, 적당한 힘으로 누르면 됩니다.”

장정은 여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엄지에 인주를 묻혀 정해진 자리에 찍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기름기와 함께 복잡한 손끝의 무늬가 남았다.

“……이제, 됐습니까?”

“예. 승인하겠습니다.”

여인은 장정의 지문이 남은 종이를 챙긴 뒤, 일꾼을 시켜 쌀을 나르게 했다.

빵빵한 쌀섬 두 자루가 차례대로 놓였다.

일꾼은 진땀을 빼며 장정에게 꼬챙이를 건넸다.

“……?”

“쌀의 품질을 확인하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신용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해야지 않겠소?”

꼬챙이는 끝이 벼린 죽창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속이 비어 있었다.

섬 자루를 찔러 안쪽의 낱알을 파내기 위함.

장정은 그 의도대로 꼬챙이를 쌀섬에 푹 찔렀다가 빼냈다. 아직 도정되지 않은 볍씨가 꼬챙이 끄트머리에서 주르르 흘러내렸다.

부스러기나 쭉정이, 모래가 섞이지 않고 튼실한 볍씨였다.

손끝으로 낱알을 눌러보며 상태를 확인한 장정이 큼, 헛기침하며 말했다.

“괜찮구려.”

장정은 지게에 쌀섬 두 자루를 차곡차곡 얹은 뒤 은행을 빠져나갔다.

그 광경이 양곡을 꾸러 온 다른 이들에게도 대단한 신뢰감을 주었다.

먹을 것과 신용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던가?

나라와 상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감이었다.

언젠가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이랍시며 나눠준 양곡에 쭉정이와 모래만 가득하였다는 건 괴담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상인들이 양곡을 살 때와 팔 때 크기가 다른 되를 쓴다는 것 역시, 풍문보다는 상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양곡으로 장난치지 않고 자루가 빵빵해질 정도로 그득그득 채워서 주다니.

그게 동리洞里 유지들에게 애걸복걸하여 해마다 반 배의 이자를 약조하고 빌린 세 섬 쌀보다 양이 더 많을 터였다.

줄에 선 이들이 저마다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 * *

은행에서 대출을 시작한 지 고작 며칠이 지났다.

“이럴 줄은 알았는데, 정말로 이럴 줄이야.”

한 무더기의 미처결 권자들이 집무실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전부 한양과 경기도의 선비들이 보낸 것이다. 작성자는 제각기 달라도 내용은 다 같다. 왕이 백성들에게 장리長利를 놓아서야 되겠냐는 거다.

“은행에 기탁금을 맡긴 놈도 있을 테지.”

은행이라는 기관이 생소하니, 이익을 어떻게 창출하는지는 차치해두고 시세차익이나 누릴 생각이었다가 깜짝 놀란 것이리라.

직접 장리(대출)를 놓으면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반 배를 더 쳐서 받는다.

이율이 반년에 반 배인 셈.

단순하게 연 단위로 늘리면 200%나 되는 초고금리 대출이다.

이에 반해 은행은 년에 30% 이하.

최초 1년은 이자가 붙지도 않는다. 단지 변제를 상평통보로 해야 할 따름이다. 이 역시 수작 없이 정해진 시세대로다.

‘그래서 지랄인 거지.’

은행이 계속 운영되면 저들은 연이자 200%라는, 미래의 불법 대부업자들도 기함할 장리를 더 놓을 수가 없으니까.

만약, 내가 침해한 게 단순히 이권뿐이라면 이들의 반발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왕과 일개 유지란 공정한 경쟁부터가 불가능하다.

일국의 주인이 막대한 재력에 내수사라는 조직까지 동원하여 몰아붙인다면, 이는 경쟁이라기보단 경쟁 말살로 봐야겠지.

나라의 주인으로서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장리는 그 근본부터가 악독함으로 가득하다.

보통 장리를 타는 이들은 반년에 반 배라는 이율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대안이 없는 신세들이다.

그만큼 취약한 신세들은, 기껏 장리를 타 한 해를 벌더라도 빌린 양곡을 가을에 반 배 더 쳐서 갚고 나면 다음 해는 더 가난해져서 나게 된다.

봄이 되면 다시 장리를 타게 되거나, 혹은 갈수록 더 많은 빚을 지게 된다는 뜻.

유지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불운하고 취약한 농민들을 착취했으며, 파산을 유도하고 노비로 삼았다.

‘그래놓고 이 짓 관두기 싫으니 왕보고 장사 접으라고?’

미친놈들이다.

지금 누구를 상대하는 건지 알고나 있을까?

* * *

경기도의 모처.

정자관을 쓴 중늙은이 양반이 삐딱하게 앉은 채로 방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딱히 구경거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상념에 빠진 채였다.

‘안 그래도 벌이가 썩 시원찮은데…….’

몇 년 장리를 놓아 십수 개 가정을 사노비로 전락시킨 다음에는, 악명으로 정평이 나 누구도 그에게서 장리를 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농사의 흉풍이 어디 사람의 의향대로 되는 법인가?

아쉬운 지경이 되면, 저나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장리를 타는 놈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가 기다렸던 건 그런 호시절이었다.

당장은 배부른 비렁뱅이들이 자신 앞에 무릎꿇고 풀칠만 하게 해달라 애걸하는 순간을…….

‘그런데 이건 너무하잖아!’

은행이라니!

뭇 사대부의 수호자이어야 할 왕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기관을 세워서는 비렁뱅이들에게 양곡을 꾸어주고 있다.

차라리, 업계의 표준을 준수했다면 마지 못해서나마 수긍했을 거다.

왕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막으랴?

하지만 헐하게 장리를 놓는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이래서야 장리 놓는 다른 사람들은 장사가 망할 판국이지 않은가!

일국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근시안적으로 사업을 벌이다니.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상도 종내에는 광해군처럼 몇 년 멀쩡하다가 맛탱이가 가서 이러는 건지…….

‘돌아버릴 거면 빨리 돌아버리는 편이 나은데.’

장리는 세상이 혹독해질수록 더 활발해진다. 그 점에서 임란 이후는 장리의 전성기였다. 딱 그 정도만 되어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쿵, 쿵!

누군가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자 상념에 빠져있던 중늙은이의 시선이 올라갔다.

이에 마당을 지키던 노복이 슬쩍 고개를 돌렸고, 중늙은이는 밖으로 턱짓했다.

노복이 빗자루를 벽에 기대놓고 문간으로 향했다.

‘설마 장리 타려고 온 놈인가?’

중늙은이는 내심 기대했다.

내수사가 아무리 화수분 같은 재력을 자랑한들 바닥은 있기 마련.

그런데 장리를 헐하게 놓았으니, 전국 팔도의 갚을 기약조차 없는 갖은 떨거지들이 우르르 몰려와 모조리 털어갔을 터.

그러면 발이 빠르지 못한 놈들은 신뢰와 믿음의 동리洞里 유지들을 찾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훗.”

중늙은이는 조소와 함께 한쪽 무릎을 짚었다.

자신에게 빚지려는 떨거지의 고개가 위로 젖히면 젖혀질수록 우월감도 크다.

그러니 절은 서서 받아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중늙은이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노복이 대문을 여는 순간 장정 십수 명이 우르르 밀어닥쳤다.

“……?!”

도저히 빚을 지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선두의 사내는 대놓고 관복 차림이었고, 나머지는 철릭을 걸친 채 육모방망이를 꼬나쥐고 있었다.

가운데의 사내가 말했다.

“백성을 무단으로 구속, 폭행, 고문하고 자매自賣를 강요하여 노비로 삼은 자가 그대인가?”

“뭐…… 뭣?!”

“죄인이 불법적으로 만든 노비를 모두 풀어주고 불법 노비들을 착취해 창출된 모든 이익을 환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누구 명령으로!”

관리는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담긴 의미와, 최근 자신이 올린 상소의 연관성을 깨달은 중늙은이 선비가 외쳤다.

“사대부 탄압이다! 이런 일을 벌이고도 세상 선비들이 조용할 줄 아느냐?!”

“조용하게 될 거다. 얼마 전에 노비들을 비싼 값에 팔았지?”

“……그걸 어떻게?”

“네놈이 불법적으로 만든 노비를 풀어주고자 다시 사들이는 데 삼만 섬이 들었다. 보아하니 그 빚을 갚을 여력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중늙은이가 기함했다.

분명, 얼마 전 생면부지의 선비가 찾아와 노비들을 비싸게 사가긴 했다.

하지만 도합해 백 섬 남짓 받았을 뿐인데 어찌 다시 사들이는 데 삼만 섬이나 들었단 말인가.

곧, 중늙은이는 그때부터 자신이 이미 찍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조정에서 외부인을 시켜 일부러 웃돈을 주고 사들은 뒤, 이를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말도 안 되는 값에 사들인 것.

그리고 그 비용을 자신에게 전가함으로써 모든 재산을 긁어가려는 수작이었다.

“아, 안돼!”

사랑방을 버선발로 뛰쳐나온 중늙은이가 관리에게 달려들었으나, 그가 가진 부의 힘은 곧 그것을 빼앗을 자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참히 내던져진 중늙은이 앞에서 관리가 일렀다.

“그러게, 자리는 보고 다리를 뻗지 그랬나?”

중늙은이의 엄포와 달리 세간을 조용할 터였다.

불만을 입에 담을 자들은 모두 공노비가 되어 오지로 끌려갈 테고, 빈자리는 해방에 더불어 보상까지 받은 자들의 찬양만이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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