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34화
은행에 따른 반발은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진압됐다.
반대한다는 이유가 고작 다른 사람에게 사채를 씌워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라면, 하등 존중해줄 가치가 없었으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실리적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성 절반이 이러한 노비라는 점부터 문제인데, 얼마 없는 납세자들마저 사사로이 노비로 전락시킨다?
마땅히 엄금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전현직 관리 중에도 장리를 놓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은행이 가진 잠재력을 의식해 의결권을 나눠 받는 것으로 은행의 설립을 묵인했으나 장리를 놓는 개인 단위에서는 얼마든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다수의 위정자가 부업 삼아 장리를 놓으니 강력한 정치 집단이 발현하기도 쉬웠다.
‘선혜법의 확대를 앞두었을 때도 방납업자들과 결탁한 불특정 수령, 아전들이 중앙에도 간섭했지.’
심지어 왕족에게 접촉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한양 한복판에서 유사 집단이 출현한다? 얼마나 곤란해질까. 게다가 경관京官들은 외관들보다 지위도 높고 영향력도 강하다.
이런 상황이니 밑바닥 삼류 사채꾼들이 나불대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들의 개소리를 여론으로 포장해 은행을 저지하려는 시도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지.’
각자 동네에서는 진시황이 따로 없었을 유지들이다.
이런 놈들을 한순간에 공노비로 만들어 바다 너머로 보내버렸다.
자기 구역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며 거들먹거렸던 유지라도 인연 하나 없는 비사성에선 그냥 매 덜 맞은 노비일 뿐.
그 광경을 보여준 덕에, 한양의 사모紗帽 쓴 사채꾼들은 일언반구도 없다.
‘은행에 기탁금을 빵빵하게 넣어둬서 손실을 어느 정도는 충당했다는 점도 이유가 될 테고.’
대과도 급제한 좋은 머리로 손익을 계산해보니, 공노비가 될 각오까지는 들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가장 큰 목소리를 내줄 집단이 침묵해 버리니 삼류 사채꾼들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는 판국에, 굳이 입을 열어본들 선배들처럼 비사성 편도 여행이나 갈 테니까.
그 결과…….
은행 예금이 3배 가까이 뛰었다.
출저야, 유지들이 축재해둔 미곡들이다.
은행 이사들의 발로 뛰는 홍보에도 불신 가득했던 사람들이, 은행에 맞선 삼류 사채꾼들의 살벌한 몰락과 조정에서의 침묵을 읽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미래로 치자면 투자자들이 ‘호재니?’ 하고 들어온 셈.
그리고 여유가 생겼으면, 마땅히 굴려야 하는 법이다.
특히나…….
“미곡은 감가상각이 크고 손실률이 높습니다.”
식품의 한계다. 보존기술의 한계이기도 하고, 창고 크기의 물리적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보고서를 가져온 최 상선에게 마저 덧붙였다.
“계속 대출과 투자를 진행해주세요. 끊임없이 순환시켜야 합니다.”
“예에, 전하.”
“화폐를 유통하는 일은요?”
“육주비전六注比廛을 중심으로 시전에 십만 푼文가량을 유포하였사옵니다.”
육의전六矣廛이라고도 칭해지는 육주비전은, 시전에서 가장 강대한 여섯 상점을 일컫는 말.
이들 여섯 상점은 부와 조직력을 기반으로 조정의 물품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특권을 보장받고 시전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유지했다.
그런 것 치고도 원래는 그저 그런 상점들에 불과했으나.
선혜법이 나날이 확대되자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각 지방의 특산품이 세곡으로 대체되자 그만큼 비게 된 상품의 공급을 충당해주면서 존재감이 뚜렸해졌기 때문.
땜빵에서 거래처가 되었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육주비전은 대동법(=선혜법)의 확대와 함께 조명받기 시작한다.
‘그만큼 특권도 강해지면서 점차 시전 상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기득권 무리가 되어버리지만…….’
지금 조선은 상업이 미진하니, 이를 부흥시키기 위해선 조정이 어느 정도 간섭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상계가 영향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손을 언제 떼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니고.
“시중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옵게도 전하께서 기대하시는 용도보다는 상품처럼 취급되고 있사옵니다.”
“……아직은 화폐의 개념이 낯선가 봅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차차, 대금으로서의 효용이 증명되면 달라질 것이옵니다.”
그럴 테지.
당장은 은행 빚 갚는 것 외에는 용도가 없지만, 조정은 막대한 상평통보 채무를 졌다.
주조권은 나만 가지고 있고.
조정에서는 일부라도 금납金納을 시도해야 할 유인이 있는 셈.
금납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자 붙은 빚을 갚기 위해선 상평통보를 사서라도 갚아야 하니 큰 차이는 없다.
그러한 조정의 수요가 곧 또 하나의 신용이 되겠지.
그러다가 점차…….
-나라에서 제값 주고 사들이는데 쌀이나 면포 대신 써도 되지 않나?
이러한 인식이 세간에 퍼지면, 화폐도입은 9할이 성공하는 셈이다.
“……좋아요, 상선. 그대는 금빛 은퇴를 원할 터이니 내가 더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해주겠지요?”
최 상선은 미소를 머금었다.
1대 은행장도 자기가 신용하는 사람을 꽂아두었고, 이사들도 절반은 자신이 수장인 내시부의 은퇴자들.
최 상선이 은행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확고한 지지자들이 되어줄 거다.
여기에 나의 의결권이 4할이고, 내시부와 내명부로 반분한 은행 이사진의 의결권이 3할이다.
내 마음에 들기만 해도 최 상선은 5.5할의 지지를 받고 차기 은행장으로서의 선출이 보장되는 셈.
“나가보세요.”
“예에.”
최 상선은 꾸벅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그러고 난 뒤 문득 드는 생각.
‘내명부 출신 이사들은 조정과 결탁하려나?’
역시 그럴 공산이 높다.
늙은 여자들이라고 무시하기엔 조정도 은행에 아쉬운 구석이 있을 테고, 내명부도 품계라는 게 있는 조직이다.
궁녀들의 수장인 상궁은 정오품.
육조의 실무진인 전랑銓郞급이고, 이사로 선발됐다면 은퇴자 중에서도 실력자라는 뜻이다. 절대 무시 못 하지.
‘내명부랑 조정이 결탁하면 싸움이 제법 지저분해지겠는데…….’
고작 1할 차이로 은행을 좌지우지할 사람이 달라지고, 이 정도 격차라면 은행 이사진 내부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왕과 조정을 등에 업은 늙은이들의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정치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 싸움이란 원래 지저분한 게 맞으니 이상할 건 없다.
그러라고 삼분해놓은 권력이다.
오히려 시끄럽게 싸워주는 게 더 안심된다.
시끄러운 게 당연한데, 안 시끄럽다면 그거야말로 진짜로 문제가 있다는 증거니까.
* * *
삼류 사채꾼들의 처우를 잊기로 한 한양에서는 새로운 쟁점이 떠올랐다.
마침 황해도의 기반시설도 거의 확충되었겠다.
올해 황해도 전체의 선혜법 도입을 피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조정 전체에서 공유되자, 전장은 전라도로 향했다.
영남과 호남의 유지들을 인적, 물질적 기반으로 둔 북인들은 당연히 전라도 선혜법의 ‘일부 시행’을 노렸고…….
서인들은 ‘전체 시행’을 주장했다.
각자 현실성이 있거나 없거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상대방을 공격할 때나 쓰였고, 본인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는 억지만으로도 족했다.
정전正殿.
용상 좌우로 중신들이 시립한 가운데.
“황해도 전체에 선혜법을 시행하는 건 사실상 확정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마땅히 전라도일 것입니다.”
“전라도는 땅이 멀고 운송량이 많아 후순위에 두는 게 옳소이다.”
“허, 그럼 어디가 다음 차례란 말이오? 경상도?”
“평안도가 어떻겠습니까. 황해도와 인접하였고,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니…….”
“멀쩡한 전라도는 두고, 세금이 나오기보단 들어가는 평안도에 선혜법을 도입하자니? 수재 납셨구려!”
“어허! 모욕적인 발언은 삼가시오!”
“욕을 먹기 싫으면 처음부터 억지를 부리지 말았어야지!”
격양된 양측은 상대에게 원색적인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댔고, 당쟁은 금방이라도 물리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듯 치열해졌다.
“자, 자! 다음 차례가 전라도라는 건 모두들 내심 인정하고 있지 않나?”
우의정 이상의가 과열한 논쟁을 종식하고자 나서니…….
“배신입니까!”
한 북인 당여가 외쳤다. 그 즉시 어딘가에서 사모가 날아들었다. 범인은 병조참판 이귀였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삿대질했다.
“핏덩이 같은 새끼가 의정에게 싸가지 없이……!”
“넌 뭐야!”
“니 애비다!”
진짜로 육탄전이 벌어지기 직전.
양측의 주변 관리들이 달라붙어 애써 충돌을 저지했다.
나라의 명운이 논해지는 대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만적이고 한심한 광경.
‘이게 맞나?’
권력 싸움이 지저분한 게 맞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지저분할 필요가 있을까?
“어전일세!”
영의정 이원익이 일갈했고, 두 사람을 붙든 채 끙끙대던 신하들은 눈치껏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두 사람은 용상과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이참에 끝장 볼 때까지 싸우시지요.”
“…….”
대놓고 멍석을 깔아주니, 막상 두 사람은 싸우지 못하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제공의 예상대로, 올해 세금을 거두기 전에 황해도 전역에 선혜법을 확대할 겁니다. 다음 차례는 당연히 전라도고요.”
이에 서인들이 보라는 양 콧대를 들었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선혜법을 도입하는 과정은 세심하면서도 철저해야 합니다. 임란 때 아조가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잘 수호해냈기 때문이에요. 전라도가 곧 조선의 명줄입니다.”
양곡의 산출량이 높은 만큼, 부를 기반으로 한 유지들의 세력이 강성하다는 점 또한 주의해야 할 이유였다.
원래 역사에서 추진되었던 삼도대동법이 어그러진 이유 역시, 현실적인 한계 외에도 유지들의 대대적인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오죽하며 선혜법을 도입하고 이를 삼도에 확대할 것을 주장한 이원익부터가 백기를 들었을까.
“한 해만에 전역에 선혜법을 확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북인들이 안도했다.
“주의를 너무 들인 나머지 개혁이 지지부진해질 정도로 지체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서인들이 긍정했다.
“경들은 부디, 어떤 고을들에 최초로 선혜법을 확대하는 게 가장 이로울지 논의해주었으면 합니다.”
기왕 싸울 거라면 의미가 있는 방향으로 싸우라는 뜻.
곧장 이귀가 긍정하고 나섰다.
“전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무엇이 국익이 되는지 알면서도 공론을 애써 그른 방향으로 몰아가는 건, 적신賊臣이라는 증명일 뿐이지요!”
“적신이라니요? 참판께서는 말씀을 가리시지요!”
“내가 틀린 말 했나?!”
“이보세요!”
“뭐, 이보세요……? 이것들이 제때 안 뒤져서 버릇이 없지!”
언쟁이 가열하자 삼의정이 나서서 겨우 만류하였으나, 언쟁의 치열함은 방향성만 달라질 뿐 사그라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고을‘들’을 논의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복수의 고을을 선정하라는 말씀이오!”
“그건 복수가 될 수 있으니 하신 표현이지, 꼭 복수의 고을을 선정하라는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어딜 건방지게 어심을 유추하려 드는가!”
“아니, 그대들은……!”
발언한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의도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싸운다고?
……그래, 이런 거로 안 싸우면 뭐로 싸우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