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35화
전라도에서의 선혜법 확대 논의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종결했다.
방향성은 잡힌지라 무언가가 진척되긴 했다.
고을을 선발한다면 충청도와 인접한 북부를 위주로 할 것이냐, 바다와 인접한 해안을 위주로 할 것이냐.
‘과거였다면 육로만이 답이었겠지만.’
해안가가 조명되었다는 건, 해로를 통한 수운 역시 진지하게 고려대상이 되었다는 증거다.
이미 전라도와 경상도의 선혜법 확대를 전제하고서 범선을 개발해두었고, 최근에는 바다 건너 비사성까지 조선령으로 편입했다.
조정은 이에 발맞추어 범선의 추가 건조에 들어간 참.
‘그러고도 범선의 수를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부족하지만.’
어찌 한 숟갈에 배가 부르겠는가.
배가 부족하다면 내수사가 가용 중인 범선을 빌려주겠다고는 천명해 두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건조해둔 범선들이기도 하고.
화물 운송 능력은 상인을 태워주고 물자도 비사성까지 날라줌으로써 객관적으로 증명해 두었다.
‘서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
북인들은 어찌 왕에게 일일이 의지하겠느냐며 마음에도 없이 거듭 사양했고 말이다.
동시에, 양당은 최초로 선혜법을 확대할 고을의 수를 두고도 다퉜다.
서인은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느낌으로 다수의 고을을 지목했고, 북인은 선혜법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소극적인 제안을 거듭했다.
두 당파 모두 복심은 훤히 보였으나, 각자 주장하는 바는 겉뿐일지라도 옳았다.
이권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북인일지라도 말이다.
‘조정이 언제까지고 왕과 내수사에 도움받으면서 지내야겠어?’
행정부의 객관적 자립은 훗날 인조나 선조 같은 왕이 재위했을 때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그래야 임란 초반, 선조가 나라를 버리고 튀겠다는 덜떨어진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였을 때 신하들이 그러고도 네가 왕이냐며 한소리 했던 것처럼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 조정에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선혜법의 점진적인 확대도 충분히 존중받을 논리고.’
덜떨어진 인조가 무턱대고 삼도대동법을 저질렀다가 곧바로 좌절하는 바람에 선혜법은 전국으로 확대할 때까지 근 백여 년이 걸렸다.
현실성도 없이 권력자 절대다수에게 반감까지 샀으니 어떠한 개혁이건 당연히 실패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의도적으로 망친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
그리고 개혁이란 한 번 좌절하면 추진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무턱대고 저질렀냐는 항의가 나오는 순간 반절은 실패한 개혁이야.’
물론, 북인이 소극안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저 선혜법 확대로 인할 인적, 금전적 기반 약화를 지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소극성이 개혁을 향한 확고한 의지와 결부된다면 반대로 확실하게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셈.
‘그렇다고 다 죽자는 식으로 판을 엎어버리는 대신에 점진적 개혁이라는 타협을 시도한다는 게 얼마나 가상하냐.’
달리 대안이 없다는 점이 타협을 선택하는 데 주효했을 거다.
개혁을 향한 나의 의지는 분명하고, 북인은 서인을 압도할 수 없으니까.
결국에는 완성될 개혁이다.
타협이 최선이라는 뜻.
그러나, 이러한 판단도 이성이 존재해야 가능한 법.
머리 좋은 사람들이니 당연히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겠느냐마는 과거의 서인 강경파들은 북인을 마저 숙청할 요량으로 벽서와 무고라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이외에도 위정자들이 좋은 머리로 분탕만 쳐댄 사례야 셀 수 없이 많지…….’
북인들을 가상하게 여기는 이유다.
이 정도면 진짜로 양반이라니까?
어전에서 추하게 쌈박질이나 해대는 것도 반란이나 무고를 같이 두고 보면 선녀다.
오리지널 인조와 그의 머저리 똘마니들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고자 반란도 저지르고 무고도 남발했으니까.
‘이렇게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늙은이들을 어떻게 미워하겠냐.’
이귀가 보여준 날 선 태도가 도리어 신경 쓰였다.
위정자들이 그 정도로 솔직한 건 오히려 애교나 마찬가지인데, 기를 쓰고 싸움을 걸었으니까.
‘사모도 던지고…… 쌍욕도 박고…….’
몇 번 망신당하고 고생도 꽤 하고 나서는 성격이 죽은지라 최근의 위기는 미친개보다는 미친놈 정도로 얌전해졌다.
사리판단이 불가능한 짐승에서 그나마 사고가 가능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뜻.
후금으로 보내지기도 했는데, 더 강한 치료를 받지 않으려면 눈치껏 달라져야지. 안 달라지면 다음에는 어디로 갈 줄 알고?
아무튼, 그 뒤로 치료됐다고 생각했는데 오래간만에 지랄한 것이다.
‘긴장감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요즘 존재감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건지.’
이귀라면 아무래도 그런 걸 위기로 여길 법하다.
똥개가 똥 끊기 어렵듯 관종은 관심 끊기가 어려운 법.
원래도 왕을 앞에 두고도 재상에게 모가지를 베어버리겠다며 지랄을 떨었던 사람이다.
한동안 얌전하게 지냈더니 좀도 쑤시고, 관심도 영 덜 받으니까 오래간만에 저질러 버린 것일 수도 있는 셈.
‘이런 늙은이는 사랑스럽지 않은데…….’
조금 더 유리한 타협을 위한 싸움이야 오히려 좋다면, 과도하게 감정적인 싸움으로 변질해버린다면 결과도 감정적으로 변하기 쉽다.
그런 건 영 좋지 않지.
간만에 미친개 정신감정을 해볼까.
* * *
미래의 말뿐인 입추立秋와 달리, 소빙하기의 문간에 선 이 시대의 입추는 정말로 가을 초입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볕은 여전히 밝고 따스했으나 바람에 실리는 은은한 한기가 딱 그랬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데도 추석이 가까워진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까.
편전에서 정문을 열어놓고 업무를 보고 있으니, 이귀가 찾아왔다.
간만에 왕과 독대하는데도 긴장감은 없이 영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앉으시지요.”
맞은편 자리를 권한 뒤, 서안에 펼쳐놓은 권자를 말아 옆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곁의 소반에 놓인 과자 상자를 가져와 내밀었다.
“드시지요.”
권유와 함께 이귀가 일단 입을 채웠고, 나 역시 업무로 떨어진 당을 충전했다.
그리고 마른 입 안을 적신 뒤에.
“어전에서 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당당하군.
음.
평소의 이귀야.
“아직도 북인이라면 다 죽이고 싶습니까?”
“아니옵니다.”
이귀는 단호하게 답했다.
대북이 폭군과 결탁해 활개를 치던 시절은 과거가 되었고, 그 흔적이 명을 붙인 채 시건방진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서인천하는 부정할 수 없다.
기실 북인이라 칭해지며 서인의 대척점으로 여겨지는 집단도, 과거의 북인과는 달랐다.
단지 한때 그러한 이름으로 함께 몸담았던 대북 잔당과 소북, 남인이 강대한 서인에 맞서 느슨하게 연합한 것일 뿐.
이런 무리에게 다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증오를 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마귀가 발아래에서 앞다리를 치켜드는 게 건방지다고, 이것들을 다 잡아 죽여야겠다는 증오심을 불태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날을 세우셨습니다.”
“북인 소인배들을 끌어다 옳은 방향으로 논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확실히, 전라도 대신 평안도에 선혜법을 확대해야 한다는 건 들어줄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이귀의 말은 북인이 그런 개소리를 더 하지 않도록, 내가 원하는 영역으로 데려왔다는 뜻이다.
‘감정적으로 자극해서 말이지?’
그런 의도였다면 효과는 확실했다.
북인들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타협에 응했으니.
“참판이 그런 깊은 뜻으로 나를 배려해준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하게 감상을 말해주니 이귀의 미간이 잠시 조여들었다가, 금세 뻔뻔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여전히 문제가 있사옵니까?”
자신의 숭고한 뜻을 이제라도 알았냐는 듯한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예.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참판께서 과격한 언행을 삼가지 않으시니, 양 당의 정쟁이 감정적으로 격화하지는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정쟁에 감정이 깃드는 건 당연한 일이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지요.”
임란 이전, 머저리 선조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의도적으로 당쟁을 격화했다.
그리고 그 끝에 벌어진 기축옥사는 동인 선비 천여 명이 죽거나 유배된 최악의 대학살이었다.
임진왜란을 고작 삼 년 앞두었을 때의 일이다.
그 뒤로 동인과 서인은 당연히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보복의 순간 서인의 처우를 두고 분열한 동인의 일파, 북인이 서인과 사사건건 날을 세우는 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고작 한 세대 반 전에 아비와 친척, 스승과 사형이 폭군과 결탁한 서인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어떻게 감정이 없을까?
당시 고작 참봉이나 지냈던 이귀가 당시에 서인이랍시고 대학살에 얼마나 기여했겠느냐만, 그의 강경하고 호전적인 태도에 북인이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왕이 선조 같은 머저리라 칼자루를 들려주기로 작정한다면 능히 이 시대의 정철이 되고도 남을 자이니까.
“경의 깊은 충성심을 내 이제라도 알았으니, 자리를 하나 권해드리고자 합니다.”
“참판보다는 더 높겠지요?”
“관점에 따라서는요.”
“…….”
이귀가 썩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거론하면서 경을 더 낮은 품계로 몰아내기라도 하겠습니까.”
나는 괜히 너털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이귀의 긴장을 풀었다.
“누가 뭐래도 경은 반정의 일등공신입니다.”
“그런데도 신은 고작 참판을 지내고 있사옵니다.”
“경에게 참판 자리가 비좁다는 건 북인들조차도 수긍할 부분이지요.”
“…….”
“그런데도 경이 참판으로 머무는 건, 지금과 같은 날카로운 태도가 과할 때 감당하기 어려워서입니다.”
판서가 다른 재상들에게 사모도 던지고, 쌍욕도 박으면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라.
장관이 다른 장관 상대로 그런 일을 저지르면 기관들의 연계는 어떻게 되겠나.
하지만 그런 이귀의 예리함과 호전성은 엄중한 단속이 필요한 병조에 훌륭히 들어맞았다.
군대는 막대한 예산을 소모하면서도, 각지와 오지에 흩어져 감시와 감독이 매우 어려운 조직.
이러한 조직을 다루기 위해서는 미친놈도 하나쯤은 있어야 했고, 이귀는 맡은 소임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로서는 할 줄 아는 대로 할 뿐이니 그다지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었겠지.
그리고 그러한 예리함이 필요한 곳이 또 있었다.
“은행의 상임감사를 맡아주세요.”
“…….”
“사대부에게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자리는 아니라는 걸 압니다.”
딱히 품계도 없고. 관직도 아니고.
“하지만 은행은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에요. 그건 경도 직접 봐서 알 겁니다.”
수천 명의 백성에게 대출을 내어주고, 또 수천 명의 백성을 장리에서 구출해 냈다.
동시에 은행은 화폐도입의 선봉이 되었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원금과 함께 미래의 이자까지 감면할 수 있는 중도상환을 허락하여 화폐 수요를 더 창출해 냈다.
그렇게 호기심 반, 빚 갚는 데 필요하다니 틈틈이 모아둘 생각 반으로 알음알음 번져가던 상평통보가 단숨에 시전에서 빨려나갔다.
이것이 증명하는 건 은행에는 국가 정책의 성패마저 좌지우지할 힘이 있으며, 은행의 이사들은 그러한 힘을 휘두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한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휘두르게 된다면, 분명 수많은 백성이 곤란해질 테지요.”
나는 은행 이사진 내부에서부터 경쟁이 치열해지리라 점쳤다.
그리고 통제 없이 가열되는 경쟁은 부정과 폭주를 가져오기 쉽다.
은행 이사들 내시부와 내명부라는 조직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수장급까지 올라갔으며, 은퇴 후에도 여생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던 자들이다.
이 정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최근 창설한 은행의 힘을 벌써 검성처럼 휘두르는 거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경쟁이랍시고 고작 사이좋게 가위바위보나 하겠나.
‘오히려 가위로 찌르고 바위로 때리고 보자기로 목을 조르겠지.’
살 만큼 살았고 여생도 얼마 안 남아 두려울 것도 없겠다, 지켜보는 눈이 없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늙은이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 끝에 권력을 쟁취해내면 반드시 본전 이상을 뽑아내려고 들 터.
철저한 감시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