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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36화 (23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6화

“현재 영의정이 상임감사를 겸하는 중입니다.”

이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치 알기는 하냐는 느낌.

“그건 임시에 가깝지요. 언제까지고 겸할 수 없다는 건 영의정 본인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은행 내부는 역대 최대로 살벌한 노인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영의정은 은행을 감시하는 것 외에도 이미 겸하는 자리가 많은 사람이다.

영경연사領經筵事,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영홍문관사領弘文館事,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 승문원承文院과 제언사堤堰司의 도제조.

영의정이 전통적으로 겸하는 자리다.

이들 관직은 명예직에 가깝긴 하나, 장관은 장관인지라 해당 관청의 내부 사정을 아예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도맡은 관청인 선혜청의 도제조까지.

여기서 더 시키는 게 없어도 이미 세종대왕 시절 수준의 K-노인학대다.

그런데 은행은 아예 기관의 범주조차 다르다.

‘이대로라면 둘 중의 하나이지 않겠어?’

이원익 같은 고급 노익장 인재가 K-착취 끝에 수명이 단축되거나, 은행의 상임감사 자리가 유명무실해지거나.

이원익이 상임감사를 맡은 것부터가, 그가 자원해서가 아니라 관리들의 부족한 이해도로 나서서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였다.

-은행의 상임감사라니, 무언가 중요한 위치인 듯은 하군.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위치라던가?

-몰…… 루?

학교에서 달리 손드는 사람이 없으면 반장이나 그날이 번호인 사람이 나서게 되듯, 자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영의정이 찍먹을 맡았을 뿐.

영의정이 전담하는 자리도 아니고, 이원익에게 오래 맡길 자리도 아니었다.

나는 쐐기 삼을 요량으로 이귀를 도발했다.

“설마 경은 은행의 힘을 은퇴한 내시와 궁녀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보통의 사대부들은 내시와 궁녀들을 괄시했다.

사대부 중에서도 특히 꼬장꼬장하고 성격 모난 이귀라면 더더욱이 그들을 못마땅해할 터.

과연, 그러했다.

“절대 아니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임감사를 맡아준다면 은행이 조직의 힘을 남용하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겠지요.”

“애초에 환관과 궁녀 따위에게 그러한 힘을 맡겨서는 안 됐사옵니다!”

“그랬다면, 나는 감시자의 역할을 환관이나 궁녀에게 맡겼겠지요. 그편이 더 편하시겠습니까?”

“…….”

그래도 환관과 궁녀들에게 감시당할 바에야 감시하는 게 낫다 싶었는지, 이귀는 꾹 입을 닫았다.

조정에서 벌인 소란이 딴에는 나를 돕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달아서일까.

애써 침묵하는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였다.

아니면, 요즘 내가 돌아버렸든가.

“맡아주시겠습니까?”

화룡점정으로 부탁하듯 말을 건네니, 이귀는 헛기침과 함께 허리를 세우고서 답했다.

“전하께서 강권하시니, 신하된 자로서 어찌 거듭 사양하겠습니까.”

그리고는 꾸벅 허리 숙였다.

“……경은, 분명 대체 불가능한 인재예요.”

이귀는 약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품계로는 재상에 미치지 못함이 불만스러우실 수 있지만, 오히려 지금의 경은 수장의 감투를 쓰지 않는 게 더 유리해요.”

장관이 되어 그다운 호전성을 보인다면, 도리어 일을 망치기 쉽다.

병조판서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상대로 싸움을 벌여댄다면, 군대는 누가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반대로, 병조판서가 그러한 점을 의식하여 불만을 시원하게 거론하기 어려울 때 원래 미친놈이라는 낙인이 찍힌 자가 대신 나서준다면 어떻겠는가.

이귀의 유난한 호전성은, 그것이 해가 되는 자리와 이득이 되는 자리를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경은 내가 원하는 조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크흠.”

“은행의 상임이사 역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 * *

최 상선을 통해서 은행의 앓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귀는 상임이사 역할에 꽤 열성인 듯했다.

바람을 잘 집어넣은 덕도 있겠지만, 이귀에게 은행 이사들이란 과분하고 위험한 힘을 가진 환관과 궁녀들.

배우고 익히지 못한 그들이 은행을 경영한다는 건 세 살배기가 환도를 휘둘러대는 꼴과 마찬가지로 보이겠지.

“그간 영의정이 바빴기에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지금은 그가 열정적으로 일하게 내버려 두세요.”

“하오나…….”

“그 편이 상임이사의 한계와 역할을 더욱 분명하게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은행의 조직도를 미래에서 따오긴 했지만, 원래 은행 이사였던 사람은 아니었기에 각자가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업무를 맡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특히 상임이사라는 존재는 미래의 나와도 거리가 멀었다.

기껏해봐야 전관예우로 들어와서는 은행의 부정을 눈감고 방관해주는 토템 역할이나 했다는 소식을 간간이 접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이 역사에서 은행에 기대하는 상임감사의 역할이란 그런 것과는 다르다.

그것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상임감사가 마구잡이로 들쑤셔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어디까지가 한계고 선인지 분명하게 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도 모른 채로 어떻게 선의 위치를 규정할 수 있겠는가.

“……알겠사옵니다.”

대답이 영 시큰둥한 걸 보니 은행도 불만이 작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상선이 은행장을 맡았을 때 지금 같은 꼴은 보기 싫을 거 아닙니까.”

“…….”

“그렇다면 지금 이사들이 미리 고생하도록 잘 다독여 주세요.”

“예에.”

* * *

“어찌하여 빤히 바라보십니까?”

중궁이 문득 물어보기에, 다가가서 손끝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저 난처하기만 했던 이였다. 워낙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이었던지라, 아직도 그때가 눈앞에 생경했다.

그래서 세월의 무상함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주름은 손끝으로 지울 수 없었으니까.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리 말씀하십니까?”

“늘 고생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색은 자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말해 보았습니다.”

중전이 피식 실소했다.

“고생한다는 건 알고 계시니 되었습니다.”

나는 캥거루 새끼처럼 중전의 품에서 빈둥대던 인평대군을 끌어다 안았다.

“우리 막내, 고생하는 어머니 더 고생시키지 말고 이 아비나 괴롭히자꾸나.”

“히히.”

인평대군은 끌어오는 대로 끌려와서는 품에서 늘어졌다.

인평대군의 나이는 미래로 치면 아이가 가장 악마가 되는 초등학교 중학년.

그 기준이라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지만, 조선 시대에서는 인생이 빠르게 돌아간다.

왕족이라면 더 그렇다.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부터 가정을 이루기도 하니까. 머리가 다 굵어지기도 전에 삶을 설계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막내가 다 클 때까지 바쁜 왕과 중전이 계속 돌볼 수도 없는 법.

자립할 때까지 궁궐 한구석을 내어주자니 경운궁은 골방이라 여유가 없고, 그 밖의 다른 궁궐로 보내는 건 출궁이나 마찬가지였다.

‘빨리 독립시켜야지.’

그래야 중전도 덜 고생하지 않겠는가.

“우리 막내는, 장차 무엇을 하면서 살고자 하느냐?”

미리 적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지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느 종친들처럼 지루한 삶을 살 성격은 아니나, 기왕이면 맞춰서 지원해 주고 싶었다.

인평대군은 품에서 곯아떨어진 고양이처럼 늘어진 채로 답했다.

“소자는…… 밤하늘을 보면서 살고자 하옵니다.”

“밤하늘?”

“예. 한양을 나서지 않아도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 소자는 밤하늘을 보는 게 좋사옵니다.”

인평대군이 눈을 감은 채 실실 웃으며 답하자 중전이 곁에서 다그쳤다.

“아버지가 하문하였는데 그런 태도로 답해서야 되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앉으려는 인평대군을 만류하고, 중전의 손을 붙잡았다.

“……?”

인평대군이 밤하늘을 좋아하는 건 비단 천성이 태평하고 호기심이 많아서만은 아닐 터였다.

본래 왕자의 삶이란 무척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봉림대군이 한양을 나선 건 신하들의 용인을 받아 가까스로 실현된 매우 예외적인 사례에 속했다.

그것을 인평대군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한양을 나서지 않고도, 하고 이유를 댔겠지.’

형의 예를 들어 자신도 억지를 부릴 수 있음에도 한양에서 넓은 세상을 추구할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가상한 일이냐…….’

보기와 달리 무척이나 성숙한 마음씨다.

늘어진 채로 답했다며 마냥 다그칠 게 아닌 셈.

“그래, 우리 막내. 밤하늘을 보는데도 도가 있고 학문이 있다니 야천夜天을 주유해 보아라. 원한다면 관상감의 천문학교수도 왕자사부로 붙여주마.”

그러자 인평대군이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옵니까?”

눈을 반짝이며 묻는 것이, 내가 밀어주리라곤 예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기실 조선 시대의 천문학은 미래와 달리 전문적이지 못해 지구상의 기상氣象과 우주상의 천체天體를 한꺼번에 다루었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고 택일擇日하는 점성학적 측면도 강했다.

그리고 사대부들은 유학만을 정학正學이라 떠받들고 나머지는 잡스럽게 치부해 사대부에 미치지 못하는 중인들만의 영역으로 치부하였으니, 이러한 잡학雜學의 범주에는 천문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친이 이러한 학문에 투신해도 된다, 허락받으리라고는 쉬이 기대하기 힘든 셈.

하지만 오히려 나야말로, 자식들이 왕이 되지 못한 보험이랍시고 시서화詩書畵만으로 여생을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밀어줘야지.

인평대군의 반응을 보아, 한양에 국한한 삶으로 마지못해 밤하늘로 타협한 건 아닌 듯해 도리어 안심이었다.

“그래. 천문학교수를 붙여주마. 궁금한 건 다 물어보고,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워 보아라.”

아비로서 바라는 바를 일러주었을 따름인데, 인평대군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품에 안겨 왔다.

* * *

“관상대觀象臺의 터는 일부 남아있어 재건이 어렵지는 않겠으나, 경복궁의 빈자리에 관상대만을 재건하여 관상감원들만의 출입을 허락하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는지…….”

우의정 이상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왜 관상대 재건이 거론되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이는 어전의 몇몇 신하도 그러하였으나, 막상 대부분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관상대觀象臺는 그 이름처럼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장소다.

그 일부로 간의대簡儀臺가 있는데, 이름 그대로 간의簡儀가 설치되는 장소이며 간의란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간략화簡한 장치다.

본래 관상대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전소하면서 함께 사라져버렸다.

내가 거론한 건 그 관상대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이유야, 당연히 막내 인평대군을 위해서.

‘꼭 그 때문만은 아니기도 하고.’

인평대군만을 위하여 관상대를 재건하고자 했다면 중신들의 동의를 구하여 나랏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내가 가난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나랏일로 삼은 건, 이참에 나라의 역법曆法을 진전시켜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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