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37화 (237/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7화

역법曆法이 무어냐.

절기의 변화를 규명 및 규정하고자 천문학과 수학을 응축시킨 문명의 결정체다.

이러한 역법이 중요한 이유는 농경에 있어 절기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법이 정확하다면 이에 맞추어 농경을 최적화할 수 있으나, 반대로 부정확하면 최적의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농경을 기반한 문명들은 일관적으로 역법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조선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상과 천문을 관장하는 관상감觀象監은 명예직으로나마 영의정이 직접 장관을 맡았다.

명예직을 제하더라도 관상감의 실질적인 장관은 무려 정삼품인 판사判事 2원員.

정이품 판서가 장관을 맡는 육조 이하에서 이보다 더 높은 상설 아문은 사헌부司憲府와 금군禁軍 친위대뿐이다.

사헌부의 존재감과 금군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바로 그 다음가는 관상감의 지위는 상당히 독보적인 셈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천명하는 조선이다. 그것을 실현해주는 역법을 담당하는 관상감의 지위가 낮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관상감의 이러한 독보적인 지위도 나라가 결딴 나버리자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으로 왕이 기거하는 법궁法宮, 경복궁과 함께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진 관상감과 관상대는 17세기 끝자락이 되어서 겨우 중건되니까.

‘그만큼 그때까지도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아니다.

원래 역사에서 임란의 후유증을 다 극복하지 못한 채 빌빌대었던 조선을 마저 벼랑 너머로 밀어버린 두 차례의 호란은 성공적으로 차단됐다.

나아가 조선은 강 너머 비사성에 깃발을 꽂기까지 했다.

고작 관상대의 재건을 가지고 벌벌 떨 정도로 나라가 못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관상대觀象臺에서 관상觀象하는 것이 일인 사람들인데, 활개를 치고 다닐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의정 이상의는 혹 관상감원들이 경복궁 터를 쏘다니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좀 쏘다니면 어떤가?

온종일 하늘 쳐다보는 것도 일일 텐데.

“아니면, 경복궁 터 외에 달리 적합한 장소가 있겠습니까?”

한양 내부는 이미 빽빽하게 들어차서,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면 민가를 밀어야 한다.

아니면 산비탈에 세운다던가.

어느 쪽이라도 쓸데없이 수고로운 일이다.

그나마 남아도는 게 경복궁 터고, 그게 원래 관상대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관상관원들이 오가는 데는 조금 불편하려나.’

원래 관상감은 관상대 외에도 본청까지 경복궁 내에 있었지만, 궁궐이 화재로 소실한 뒤에는 광화방廣化坊으로 이사했다.

미래에는 종로구 원서동에 해당하는 곳.

창덕궁 바로 옆인데, 여기서 경복궁까지 가려면 좀 걸어야 한다.

“아니면, 창덕궁 터에 세울까요?”

어차피 창덕궁도 인정전 외에는 다 소실되어서 터만 남았다.

관상관원들 덜 고생시키려면 거기에 관상대를 재건해도 좋겠지.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나섰다.

“궁궐 터 위에 다른 구조물을 세운다면, 혹 훗날 두 궁궐을 재건할 때 번거로워질 수 있으니 기존의 터를 이용하는 게 좋겠사옵니다.”

“관상감의 일이니, 영관상감사의 말씀을 들어야겠지요.”

이원익이 짧게 고개 숙였다.

기왕 관상대를 재건하는 김에 본청도 다시 경복궁으로 이사시키는 방법이 있겠지.

그냥 관상대만 재건한다면, 뭐. 관상감원들이 두 궁궐을 오가면서 더 건강해지는 수밖에 없겠지만.

이원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상의를 바라보면서였다.

“관상감원들의 기강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상감의 천문관측 규정은 매우 엄격하니, 관원이 사사롭게 자리를 지워 경복궁 터에서 활개 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의정이 영관상감사로서 호언장담하는데 누가 의심할까.

이상의는 그저 꾸벅, 허리만 숙였다.

“영관상감사.”

“예.”

“혼천의渾天儀와 혼상渾象은 복원할 수 있겠습니까?”

혼천의가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라면, 혼상渾象은 구 형태 뼈대에 표면을 씌우고 별자리를 그려놓은 기구다.

표면을 회전시켜 시기에 따라 밤하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 대조하며 별자리를 학습할 용도로 제격인 셈.

이원익이 영관상감사로서 답했다.

“두 기구 모두 사료가 있고, 각처에 복제본이 있어 복원에는 일절 문제가 없사옵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진짜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쟁으로 소실된 기록과 값진 유물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나라의 역사서로 수 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각처에 옮겨 보관하였던 ‘조선왕조실록’조차 임진왜란 때 전주의 복제본을 제하고는 전부 소실하고 말았다.

자칫 두 세기 반의 장대한 역사가 완전히 잊힐 수도 있었던 셈.

‘그래서 임란 이후에는 실록을 단지 여러 곳이 아닌, 비처에 숨겨놓게 되지…….’

그리고 그렇게 숨겨놨는데도 한 염치 없는 망국의 왕 덕에 모든 실록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원본 실록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아무튼.

“흠경각欽敬閣과 옥루玉漏는요?”

흠경각은 관상대와 마찬가지로 관상감의 부속시설로, 천문시계인 옥루玉漏가 설치되었던 장소다.

후대에는 옥루의 정확한 명칭과 흠경각의 존재는 알지 못해도 옥루의 개념만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옥루가 세종조 천재 발명가로 알려진 장영실蔣英實이 개발한 자동 물시계이기 때문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원익이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흠경각의 재건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나, 옥루는 이미 선묘조宣廟朝부터 고장난 것을 수리하지 못한 채 방치해 온지라 복원은 불가능하옵니다.”

“옥루가 흠경각의 존재의의인데 흠경각만 달랑 재건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상의는 제 잘못이라도 된다는 양 송구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혹 전국에 기술자를 수배하여도 옥루를 복원하는 건 어렵겠습니까.”

“……참고할 사료로는 흠경각기欽敬閣記가 있사온데, 옥루의 교묘한 기능은 설명해 두었으나 원리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사옵니다. 또한, 임란 때 흠경각과 함께 고장 난 옥루마저 완전히 소실한지라…….”

전국에 날고 긴다는 기술자들을 다 불러모아도 답이 없다는 뜻.

참고할 부분이 그저 기능밖에 없으므로, 복원을 시도하여도 옛 옥루의 재현보다는 엉성한 모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옥루가 괜히 21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복원된 게 아닌 셈.

‘……이건 답이 없군.’

“관상대와 일단 복원할 수 있는 것부터 복원해 보도록 합시다.”

“그것이 최선이옵니다.”

“그리고 회의가 파한 다음에, 영관상감사는 남아서 나와 이 건에 대해서 더 말을 나누어옵시다.”

“예에.”

관상대의 건이 일단락한 다음에는, 한양의 관리 대부분을 미치게 만드는 마법의 주제가 거론됐다.

-전라도의 어떤 고을들에 선혜법을 먼저 확대해야 하는가?

올해에는 시설이 부족해 당장 적용할 수도 없는 문제였지만, 동인과 서인 당여들은 핏발을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관상감과 관상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이들.

논제에 완전히 몰입한 재상들은 고성과 삿대질을 교차했고, 이귀는 또 사모를 던졌다.

* * *

회의는 미미한 진전과 함께 파했고, 어전은 폭풍이 지나간 직후답게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이래서 내가 일찍이 제신에게 선혜법의 확대를 논의케 하였습니다. 막상 때가 닥쳤을 때 논의하게 한다면, 소란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요.”

한 해 앞서서 미리 논의하는데도 전쟁을 방불케 할 지경이다.

“신이 늙고 미력하여 뭇 신하들의 기강을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면목이 없사옵니다.”

“말려도 싸울 텐데, 기왕이면 보이는 데서 싸우는 게 낫습니다. 개의치 마세요.”

일부러 싸우라고 던진 주제이기도 하고.

그걸 신하들도 알고 있으니까, 다른 주제와는 다르게 용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노골적으로 싸우는 거다.

평소에는 언쟁 중 타협하지 못하고 감정만 격화할 때 판단을 내게 맡겼던 자들 아닌가.

오히려 말 잘 듣고 있다고 치하해도 될 일이다.

“내가 영상을 남게 한 것은, 자칫 논제의 사족蛇足이지 않을까 우려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상감 부속시설의 제한적인 복원과 뭇 신하들의 무관심, 실전되어버린 기술과 세기 단위로 정체한 진전은 관상대 재건과는 별개인 상념을 일으켰다.

“단순한 발상입니다. ……하지만 말로써 전달하기는 어렵군요. 함께 편전으로 갑시다.”

“예에.”

정전의 뒷문을 나서 잠깐 걸으니 곧장 편전에 도착했다. 경운궁은 경복궁이나 서궐과 다르게 임시로 사용되었던 행궁行宮이다.

좋게 말하면 집약적이고, 노골적으로 평가하면 궁궐이 참 소박하다.

집무실에 이르러 맞은편 방석 자리를 이원익에게 권한 뒤 서안에 문방사우를 펼쳤다.

“영상께서는 지금 쓰는 역법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영묘英廟께서 정흠지鄭欽之,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에게 명하여 《수시력授時曆》, 《태음태양통궤太陰太陽通軌》, 《회회력법回回曆法》을 연구해 칠정산七政算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을 만드셨지요. 세월로만 따지면 근 이백 년은 될 것입니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감탄해서 물어보니, 이원익은 겸양하면서도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영관상감원이 아니옵니까.”

“여기에 좌상과 우상이 있었으면 아주 볼만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갈 길이 멀었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요.”

“하하…… 두 사람도 유능합니다.”

자신 못지않다고는 하지 않는 이원익이었다.

“그래요. 지금 아조가 쓰는 칠정산은 근 이백 년은 된 역법이지요. 원형인 수시력授時曆까지 따지면 배는 될 것입니다.”

관상대와 함께 복원이 논의된 간의簡儀가 이때 개발된 기구다.

전쟁 때 소실되어버린 천문관측기구를 복원하려는데 이게 실은 400년 된 고물인 셈.

시대가 요구하는 수준의 정확한 관측이 가능하리라곤 기대하기 힘들다.

이는 혼천설渾天?로도 증명된다.

간의의 원형인 혼천의가 도입되면서 동양의 우주관은 혼천설로 발전했는데, 이는 하늘이 지상을 중심으로 두고 회전한다는 천동설의 일종이다.

이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며 지동설을 깨우치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니까, 소실한 유물을 복원하는 것 자체는 좋은데 실제 관측까지 400년 된 유물에 의존해야 하냐는 거지.’

아무리 동양의 철학적 사회적 지향점이 수천 년 전 요순시대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안일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강국이 되어야 할 조선의 기술 수준이 400년 전 원시 고대 유물에 의존해야 한단 말인가?

“기왕 관상대를 재건하고 기구들도 복원하는 김에, 오래된 기구들을 대체할 새로운 기구도 개발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기구를 갑자기 주문하셔도…….”

신기술이 뚝딱 나올 리 없다.

그건 별별 것을 다 기억하는 초유의 지성으로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

이원익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먹을 갈았다.

“그래서 여기로 부른 게 아닙니까?”

이원익에게는 신기술이겠지만, 내게는 아닌 것이 있다.

천문관측이라면 군사기술과는 별개로 유출에 대한 우려도 그리 크지 않다.

세상에 퍼져봐야, 뭐, 천문학 발전 수준이 조금 앞당겨지고 말겠지.

제법 과감하게 가져와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이것을 제임스웹에서 딴, 조선스웹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