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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39화 (239/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9화

경기도 여주목.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며, 오곡에 백과가 여무는 시기를 맞아 농민들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빠졌다.

마을 안팎에서 활달하게 오가는 농군의 젖은 등과, 평소라면 어린 나이에 딱히 손 보탤 일이 없었던 어린 사내들도 논밭마다 부산히 돌아다니는 게 그 증명이리라.

비교적 팔자가 태평한 이들, 유지와 식자들은 쌀쌀한 늦가을에 흠뻑 돌아다니는 장정들을 보며 춥겠다, 하고 소소한 상념과 함께 후일을 의식했다.

-여주목은 신민 모두가 힘을 합쳐 봄 이전까지 관개시설을 정비 및 확충하여 이앙법 실시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중앙에서 내려온 전교傳敎였다.

“일단 이앙법에는 찬성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기대 반이고 걱정 반입니다.”

농촌 풍경을 배경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선비가 소회를 드러내자, 곧바로 다른 이들이 찬동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당장은 농군들을 부릴 수 없으니, 주어진 시간은 올 겨울이 전부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빠듯합니다. 빠듯해요.”

낙후하고 퇴락한 관개시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물며 이앙법을 시행하려면 더 많은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논을 항상 물에 잠겨두어야 하는 탓.

관개시설을 정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드는 수준이 될 공산이 컸다.

“게다가, 목사는 도움은커녕 우리들에게 일을 떠넘겨버렸으니!”

-고을 이하 각 동리에서는 유지들이 연합하여 관개시설의 정비 및 확충 계획을 수립하고, 감독하라.

여주목사가 아전에게 시켜 동리마다 전달한 지시였다.

“평소에는 우리를 꽉 쥐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자 아니었습니까?”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같이 고생 좀 하자 이거지요.”

“흥! 그래놓고 잘 풀리면 저 혼자 한양으로 떠날 거 아닙니까?”

“흐흐. 안 봐도 뻔합니다!”

뒤에서 목사 호박씨를 까며 유대감을 즐기던 유지들은, 이내 술잔을 기울이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크흐……! 왜 우리만 고생하냐, 하고 배 째지는 못하겠지요?”

“어후, 큰일 날 소릴 하십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전교에요, 전교!”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지시다.

단순히 왕명이기 때문에 신하된 자로서 수행해야 한다, 하는 고지식한 소리가 아니었다.

현재의 왕은 열성을 회고하여도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건한 치세를 과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장리의 큰손들이 은행을 공공연히 비난하다가 하루아침에 배가 찢어졌을 정도다.

“찢어보라고 했다가는 정말로 찢어지는 수가 있어요. 양주목 황가가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양주목 황가는 주변 고을까지 분점을 내며 장리를 놓던 거물이었다.

아래로는 악착같이 긁고, 위로는 뇌물을 바쳐서 악독하기론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떵떵거리며 잘 살았는데 그조차도 하루아침에 공노비가 되어버렸다.

그리곤 일면식도 없는 비사성으로 보내졌고, 남은 가족은 알거지가 되어 한때 부려먹던 자들에게서 도리어 빚을 지고 말았다.

더욱 끔찍한 건, 마찬가지로 장리의 큰손들인 조정의 당상들이 이러한 처분에 침묵했다는 점이다.

지금 철퇴를 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뻔했다.

“상上께 밉보였다가는 황가네 2호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어이구, 그만하시오. 재수 없는 소리를…….”

“눈치는 봐야 한단 게지요.”

“허, 누가 눈치 안 본답니까? 다 떠넘겨놓고 나몰라라 하는 목사가 괘씸해서 그런 거 아니요?!”

목사를 힐난하는 소리가 나오자, 좌장座長 격으로 동리에서 가장 오래 군림했던 정자관程子冠의 늙은이가 헛기침했다.

“크흠!”

“……어르신.”

잡설이 일순 그치고 이목이 집중했고, 늙은이가 길게 길러놓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 있으십니까?”

곁의 선비가 판을 깔아주자, 늙은이는 몇 번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자네들 이렇게 태평하게 목사 욕이나 할 때인가?”

“그럼…….”

뭐, 칭찬이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일까.

여러 사람이 재촉 담긴 시선을 보냈다.

“다른 동리와의 지경에 위치한 저수지와 물길이 몇 곳 있는데, 과연 이것들의 책임소재를 누가 결정하겠는가?”

당연히 목사다.

“그렇다고 목사에게 잘 보여 다 떠넘기는 게 능사는 아닐세. 공을 들인 쪽이 사용에 우선권을 가지는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다 차지하려 들었다간…….”

봄이 오기 전에 사업을 완수하지 못할 테고, 목사와 왕 모두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길 터였다.

그것이 어떤 보복으로 돌아올지는 모르는 상황.

“그러면 계산을 해 봐야 한다, 이 말이야. 어떤 게 상태가 좋고 나쁜지. 고쳐놨을 때 쓸모가 있고 없는지. 공을 들인 것에 비해서 효용이 높을지 낮을지.”

늙은이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흐흐 웃었다.

“다른 동리에서는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텐데, 태평하게 목사 호박씨나 까대는 걸 보니 다들 여유가 있어 보여 보기 좋구나.”

좌장 늙은이의 빈정에, 좌우에 앉은 선비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동리 외곽의 시설 중 어디를 취하고 말 것인지를 두고 분주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막상 논의가 시작하자 유지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치열하게 논리를 전개해나갔다.

자신의 농지와 가까운 관개시설을 동리에서 가져가야 높은 우선권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

반대로 농지와 가까운 관개시설을 다른 동리에 넘겨버린다면 사용 우선권이 낮으니 평소 불편한 건 차치하더라도 날이 가물 때는 작황이 망해버리는 수가 있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밀어낸 유지들은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으로 치열하게 이익싸움을 시작했다.

* * *

농부들이 바빠지는 농번기에도, 곧 들어올 소작료만을 태평하게 기다렸던 유지들이다.

이번 가을에는 달랐다.

향후 수백 년 이어질지도 모를 동리의 이익을 두고 다른 동리들과 싸움이 벌어졌으니까.

물밑 접촉도 흔하게 벌어졌다.

이쪽 시설은 우리가 가져가는 게 유리하니, 안에서 포기하자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가로 우선 이용순위를 보장해 주는 식이다.

대개는 물밑의 협상과 타결로 그쳤으나 때로는 전말이 드러나고, 배신마저 당하면서 경쟁은 격화했다.

“쳐라!”

“때려눕혀라!”

다 큰 어른들의 골목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유지의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노복들이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서 패싸움을 벌이니, 이쯤 되어서는 목사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옛 성인들의 말씀을 익혔다는 사람이 백주대낮에 패싸움을 벌이니, 이 어찌 사대부로서 부끄럽지 않은 일이오?”

그러나, 본디 사대부란 꼬운 구석이 있으면 쟁송爭訟을 대대로 이어나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

틈틈이 멱살을 잡아대고 주먹질하는 것까지는 목사가 다 간섭할 수 없었고, 경기도 여주목에는 어느 때보다 더 파란만장한 가을이 흘렀다.

* * *

그리고 추석에 다다랐다.

지난가을이 제법 요란했던 터라, 콧대 높였던 이들치고 이쯤 되어 추문 하나 생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상대방의 영향력을 실추하기 위해, 또는 보복을 위해 서로의 흑역사를 까발려댄 탓이다.

그러나 흑역사는 오히려 양반이었다.

말로써 승부를 보기 싫어했던 자들이 많아, 입에서 때 이른 옥수수가 수확되거나 어디 한구석 부러졌던 자가 부지기수이며, 한동안 칩거하며 눈탱이에 밤탱이가 된 낯짝을 숨기고 다녔던 이도 더러 있었으니까.

그러나 장대한 이권 다툼도 수확이 없다면 유명무실인 법.

추석을 기해 농번기가 종결한 만큼, 고을의 각 동리는 전교를 수행할 때를 맞이했고 그간 치열했던 이권 다툼은 목사의 엄포로 종식됐다.

그런다고 사적인 감정마저 흩어지는 건 아니겠으나, 지금 당장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다.

아니 그런다면, 모두가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전하께서 다시 한번 전교하셨네.”

목사가 선언했다.

그는 동헌東軒에서 각 동리의 대표들을 불러모았고, 나름 사비까지 차출하여 연회 자리를 마련했다.

대청과 그 아래에서는 서로 불온하게 시선을 교차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목사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간 제공이 다퉈온 것도 다 전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소이까?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혹 쌓인 감정이 있다면 털어내고, 왕명의 수행에 전력투구해야 하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감사 영감 외에도 호조와 병조, 공조의 세 판서와 삼의정까지 본읍의 사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외다.”

“……!”

겉으로만 듣는 척하며 속으로는 콩밭에 가 있었던 유지들이 모조리 현실로 돌아왔다.

판서와 의정이라면 나라의 실세 중에서도 실세들.

오죽하면 사돈의 팔촌들까지 거들먹거리게 만들 정도다.

그만큼, 이들의 눈밖에 나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이들의 관심이란 한 사람이라도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이만하면 거의 온 조정이 여주목을 주시하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유지들은 목사의 창백하고 초췌한 안색이 그저 추위 때문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판서 다수와 의정들의 관심이람 정삼품 목사조차도 기력이 빨려 끝내는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절실했다.

“혹여 제공 중 혹자가 때를 분간하지 못하여 사사로운 다툼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어지럽히게 된다면, 전하와 온 조정의 노여움을 당하는 건 나만이 아니게 될 것이외다.”

“…….”

“그러니 모쪼록이면 높으신 분들 실망시켜 드리는 일 없도록 신경 써주었으면 하오.”

좌중 속에서 참다 못해 터져나온 기침이 천둥처럼 울렸다.

여러 사람이 침을 삼켰고, 목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어 나라의 백년대계에 유난이 일조해준다면, 그 공을 전하께 상주하는 것도 아끼지 않겠소이다.”

채찍만 들어서는 게으른 나귀들을 움직이기 어려운 법.

물론, 온 조정의 주시란 채찍보다는 도살장에 가깝겠으나 더 많은 호응을 구하기 위해서는 포상도 필요했다.

관심이 막중할수록 부담스럽긴 해도 일을 성취했을 때의 보상 역시 막중해지는 법.

목사는 모두를 위해, 특히 자신을 위해 힘써준 자들에게 보상의 일부를 기꺼이 나눠주겠다고 천명했다.

“……!”

중압감에 벌벌 떨고만 있던 유지들에게는 혹하는 소리였다.

본래 조선에서 ‘양반’이란 관직자 이하 후손 삼대까지만 허락되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 공직자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배운 사람이라 거들먹거리는 유지들 중에서도 엄밀히 따지면 양반이 아니라 갓쓴 양민에 불과한 자가 태반이고, 자신이나 자식의 대가 끝인 자를 치자면 전부라 봐도 무방했다.

괜히 유지들이 자식들 공부에 혈안이 아닌 셈.

그러니, 이참에 나랏일에 크게 일조하여 좋은 일도 하고, 공을 세워 목사의 추천도 받는다면 주변의 가짜 선비들 사이에서 후손들까지 진짜 선비로 거듭날 수 있었다.

“…….”

유지들의 눈알이 서로를 향해 뒤룩뒤룩 굴렀다.

새로운 경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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