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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40화 (240/380)

인조, 명군이 되다 240화

여주목사의 전언을 받은 유지들은 무리할 각오를 되새겼고, 사돈에 팔촌의 명예를 건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농번기를 마치고 겨울을 편히 보내기를 바라는 농민들을 부리기란 쉽지 않았다.

“추석도 며칠 안 지났는데, 천천히 시작하면 안 되겠습니까요?”

기껏 불러모았으나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농군들.

그들 앞에서 일정이 빠듯한 유지가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서 달랬다.

“이 사람아, 모내기를 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한겨울에 말입니까?”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다 물을 대어야 할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 동리에는 번듯한 관개시설이 없어. 저수지고 수로고 멀쩡한 게 없는데 내년에 어떻게 모내기를 하나.”

“……천천히 하면 안 되겠습니까요?”

“천천히 하면 늦는다니까?”

유지는 게을러터진 농군들의 머리채를 붙들어다 한바탕 휘두르고픈 충동이 가득했으나,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다 함께 잘 되자고 하는 일이니, 하루에 두 시진만 나와서 제대로 힘 좀 써주게. 더 닦달하지는 않을 테니까…….”

고작 두 시진이라도 제대로 몸을 쓰면 사람이 나가떨어지기 마련.

그것을 아는 농군들은 유지의 애원에도 영 시큰둥했다.

최근까지도 무척 바빴고, 그 고생이 아직도 몸에 서려 있는데 또 몸 쓰는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유지들은 평소 콧대를 높이면서 거들먹거렸던 이들이다.

이들이 도리어 애처롭게 구는 꼴을 보아하니, 당해온 게 많은 농군들로서는 청개구리처럼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하루에 두 시진이면 없는 밭을 일구고도 남습니다. 그 고생을 한겨울에도 하라는 말입니까요?”

“대신 일을 마치면 밥을 차려주겠네. 술과 고기도 갖춰서!”

술과 고기라는 말에, 시큰둥했던 농군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그간 농사를 지으면서 갖은 고생을 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먹고 살 수 있다면 고생이야 할 수 있는 법. 하물며 술과 고기라면 마다하기 어렵다. 보통 귀한 게 아니었으니까.

쌀로 빚는 술이야 말할 게 없고, 고기는 육식자肉食者라는 단어가 곧 권력자를 의미할 정도다.

정말로 술과 고기가 지급된다면, 그냥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되는 셈.

안색이 달라진 농군이 물었다.

“……얼마나 주는데요?”

그 조심스럽고 기대 가득한 물음에 유지는 반색하고서 답했다.

“매일 반주로 탁주 한 대접에 고깃국, 이레마다 닭 반 마리씩 주겠네!”

유지의 선언에 농군들은 저마다 놀라움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괜찮은데?”

“할만한 것 같군.”

“기왕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먹여줘야지.”

“암, 하하.”

여론이 반전하자 유지가 진땀을 뺀 낯으로 다시금 물었다.

“그럼 힘 써주는 걸세?”

“……그럽지요, 뭐.”

“역시 자네들밖에 없어. 자, 자.”

안도한 유지는 어리둥절한 농군들을 어딘가로 몰아갔고, 이에 농군 중 하나가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힘쓰러 가야지, 힘!”

“……오늘부터 말입니까?”

“오늘부터! 자네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일정이 아주 빽빽해! 손 봐야 할 구석이 많단 말일세!”

유지가 다급히 재촉하자 농군들은 혹 너무 좋은 조건으로 힘 써주기로 한 건가, 후회했으나 합의는 이미 끝난 뒤였다.

* * *

낡고 오래된 저수지를 고치고 확장하는 건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지난 전란으로 방치되어버린 저수지와 수로는 수십 년간 부엽토로 뒤덮여 정확한 위치조차 알아내기 힘들었다.

늙은이들의 해묵은 기억을 빌려 가까스로 위치를 알아낸 다음에는, 터가 되어버린 저수지와 수로에서 부엽토와 함께 쓰러져 내린 돌과 바위들을 치워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충분한 저수량을 확보하고자 기존의 낡은 벽을 허물고 새로 쌓기도 했으며, 물길 또한 새로 낼 때도 많았다.

한겨울 몸이 얼어붙는 시기에 육체노동을 반복하다 보니 부상자도 흔히 발생했다.

다행히, 여주목사는 자신의 공적을 확대하기보단 사업의 성공 자체에 집중했고 한양에 엄살을 부린 덕에 세자의 신의술을 익힌 의원들을 다수 지원받았다.

그렇게 작업 공간마다 불을 피우고 든든한 밥과 뜨거운 고깃국으로 몸을 데우며, 힘을 쓴 다음에는 술로 피로를 씻어내고 부상자는 한양의 실력 좋은 의원들이 봐주니, 관개시설의 재건과 증축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 * *

살얼음 같은 추위도 지나가고 여러 작업이 일정을 따라 완수되었을 즈음.

꽝꽝 얼어붙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남한강도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수문水門들이 강물로 젖어들자 여주목의 여러 동리에서는 저들이 고생한 결과를 시험하기로 했다.

“문을 열어라!”

유지의 호령에 따라 장정들이 으쌰으쌰 수문을 개방했다.

이에 그동안 문만 적시면서 지나갔던 강물이 수로로 파고들었고, 투명한 강물은 눈밭을 헤쳐나가며 저수지로 콸콸 흘러들었다.

그 물길을 쫓아 저수지까지 모여든 유지와 농군들은 긴장이 완연한 채로 모여드는 물을 주시했다.

혹 설계가 잘못되었다면 물이 새거나 넘쳐 흐를 수 있기 때문.

여러 사람의 염원이 담긴 주시 속에서, 저수지의 물은 새거나 넘치는 일 없이 안정을 찾았으며 이를 확인한 유지와 농군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되었다! 되었어!”

“고생만 잔뜩 시키더니 이제 제 몫을 하는구나!”

“염병할!”

* * *

“현장 검토 결과, 이앙법의 시범 도입이 확정된 구역에서는 빠짐없이 관개시설의 구비를 마친 뒤였사옵니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보고했다.

“고작 겨울만에 그 시설을 다 갖추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테지요. 목사와 수고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치하를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김신국은 이견이야 있겠냐는 듯 허리를 꾸벅였다.

“시설은 충분히 갖추었으니, 봄이 되면 이앙법을 시험해보지요. 삼남에서 이미 알음알음 모내기를 해왔으니 기술을 전수할 사람이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이미 이앙법을 전수할 사람들을 수배해두었사옵니다.”

“만족스러운 소식이군요.”

가볍게 건넨 치하에, 김신국은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콧대를 높였다.

“더 보고할 사안은 없습니까?”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물어보니, 영의정 이원익이 한 발자국 나섰다.

“신이 영관상감사로서 올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하시지요.”

“첨성대瞻星臺의 만리경萬里鏡이 완성되었사옵니다.”

“그래요? 듣던 중에 기쁜 소식입니다.”

만리경은 조선스웹 망원경의 정식 명칭이었다. 정말로 조선스웹이라고 호명할 수는 없었으니까.

꽤나 단순한 작명이었다.

천리경을 집약하여 만들었으니까 만리경이다.

첨성대는 그러한 만리경이 설치되는 관상대의 부속시설이다.

명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신라 첨성대에서 가져왔다. 첨성대가 가장 근본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있을 리 없지.

그만큼 직관적이기도 하다.

이름 그대로 별을星 보는瞻 곳臺이라는 뜻이니까.

“조만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당초 만리경 개발에 많은 비용이 소모될 예정이라, 신하들의 반발이 많으리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선조의 분탕으로 역법이 망가졌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관상감에서 꼬박 반년이 넘는 세월 매달린 결과물이 드디어 나왔다는 소식에, 당상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만리경을 통해서 하늘을 보면 별과 달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좌의정 박홍구가 제법 달아오른 투로 물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과연 코앞에 두고서 보는 듯합니다.”

“허어……. 그럼, 나중에 이 사람도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박홍구가 먼저 허락을 얻자, 당상들도 앞다투어 그 대단한 광경 나도 보자며 첨성대의 방문을 부탁했다.

그러한 요청이 무수히 쇄도하자, 거의 소란에 가깝게 되었고 이원익은 난처한 얼굴로 용상을 의식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응이 이토록 호의적이라면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관상감사께서 당분간 고생해주세요.”

“하하, 그리하겠사옵니다.”

* * *

이원익에게는 ‘조만간’ 방문한다고 했지만, 그야 왕의 거동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오후의 정무를 마무리지을 즈음 하늘도 노을로 물들어 하루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나는 이원익에게 패초를 보내 관상대 방문 소식을 알렸고, 그 순간을 인평대군과 함께하기 위해 대전을 들렀다.

“막내야.”

인평대군은 서안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막 펼쳐진 장에 별자리가 그려진 걸 보아, 오늘도 천문학 서적을 보는 듯했다.

“아바마마.”

“공부하고 있었구나.”

“예에.”

나는 무릎을 꿇어 막내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말했다.

“만리경이 드디어 완성됐다는구나.”

“알고 있었사옵니다.”

“알고 있었어?”

“예. 소자의 스승이 천문학교수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준비한 기간이 오래됐다 보니, 역시 깜짝선물로는 어려웠다.

“그래도 마침 완성되었다니 오늘 밤에 이 아비와 함께 밤하늘을 보러 가자꾸나.”

“예!”

나는 인평대군을 꼭 끌어안은 뒤, 구석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던 중전에게로 나아갔다.

“중전께서도 나와 함께 별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중전은 고개를 들곤 씨익 웃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가야지요.”

그렇게 답하면서도 연신 손으로는 복주머니에 수를 놓고 있었다. 보지 않고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그만큼 빠듯한 듯했다.

중전은 왕가의 안주인으로 왕실의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또한,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왕가와 가까운 이들에게 내릴 선물도 때론 직접 만들었는데 지금 준비하는 새해 선물이 그러했다.

“나도 같이합시다.”

“전하께서요?”

“제법 서투르겠습니다만, 그게 어디랍니까? 왕이 친히 고생해서 만들었다는데요.”

감사히 받아야지.

“바느질할 줄은 아시고요?”

“이참에 배우면 되지요.”

“그러면,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세요. 천천히 하겠습니다.”

나는 천과 바늘을 받아들고, 중궁의 손끝에 집중했다.

인평대군은 눈치껏 책에 집중해주었다.

의외로 난 바느질에 소질이 있던 모양이다.

손가락을 몇 번 찌르고 나니, 금세 속도가 붙어서 어설프게나마 복주머니를 하나 완성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저 혼자 하겠습니다, 전하.”

“아니, 왜요? 이만하면 배움이 빠른 편 아닙니까?”

“배움이 빠르시긴 합니다만, 험하게 배우시니 그렇지요. 그렇게 손가락을 찔러대시는데 나랏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붓 쥐면 조금 따끔할 것 같긴 했다.

“아직 하나밖에 완성을 못 했습니다만…….”

“전하의 정성에다, 피까지 들어갔으니 이 세상 어느 복주머니보다 진귀한 복주머니지요. 하나라서 아쉽겠습니까?”

과연 진귀하긴 하겠다. 역대 어느 왕이 직접 바느질해서 복주머니를 만들었겠으며, 자신의 피로 축성까지 했을까.

그래도 실력은 서툴렀던지라 영 보기에는 안쓰러웠는데, 그래도 이 복주머니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남 선물하기엔 고작 하나밖에 없으니, 이건 중전께서 가지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복주머니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중전밖에 없습니다. 자. 날도 늦었으니, 이만 일어나시지요.”

노을도 다 졌겠다, 어두침침하여 촛불을 켜지 않고서는 바느질하기도 벅찬 지경이 되었다.

인평대군도 아마 책 보기가 힘들어져서 부모의 꼴사나운 사랑을 버티고만 있었겠지.

과연 기다렸다는 듯이 책 덮는 소리가 났다.

“자, 막내도 채근하니 사이좋게 밤하늘 보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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