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41화
돌계단을 타고 오른 첨성대 꼭대기에는 만리경 대신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지붕이 독특했는데, 여느 건물의 기와지붕과 달리 납작한 판자만 씌워둔 채였다.
“오셨사옵니까.”
영관상감사 이원익이 건물 앞에서 인사했사.
“늦은 시각에 불렀는데, 괜히 영상을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싶군요.”
“천체의 운행은 이 늙은이를 배려하지 않으니, 별수 있겠사옵니까?”
이원익은 허허 웃고는 안쪽으로 안내했다.
독특한 지붕의 모양새와 달리, 내부는 여느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가운데 검은 천막으로 둘러놓은 암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밤하늘의 빛은 미약하고, 만리경은 빛에 민감한 가물이니, 이렇게 건물 안에 암실을 만들어 비치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암실 위에는 지붕이 있었다.
“저 상태라면 만리경으로 볼 수 있는 건 밤하늘이 아니라 대들보 무늬뿐이겠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그렇지요.”
이원익이 손짓하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관상감원들이 움직여 벽쪽의 막대기를 당겼다.
얼핏 보아서는 기능을 유추하기 어려웠으나 관상감원이 기를 쓰는 걸 보아 힘이 적잖게 들어간다는 것만은 분명했는데, 그렇게 막대를 돌리자 건물 안쪽에 점차 한기가 쏟아져내렸다.
지붕이 갈라지고 있었다.
“허어…….”
“민감하고 취약한 만리경을 실외에 세워둘 수도 없었지만, 지붕 라에 두면 쓸모가 없어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사옵니다.”
“지붕을 개폐식으로 만들었군요.”
어쩐지 기와를 놓지 않았다 싶었다. 그런 육중한 장식이 있었다면 장치가 감당하지 못했겠지.
“예에.”
차분하게 답하는 이원익에게서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하기야, 이 나라가 개국한 이래 최초로 개폐식 지붕을 고안해낸 장본인이다.
만리경의 원리를 접하고는 충격받은 듯했는데, 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전하.”
이원익은 공손하게 암실을 권했다.
나는 인평대군을 끌어안고서 중전과 함께 암실로 나아갔다.
검은 천막을 거두니, 황동으로 제작해 암실 속에서도 금빛으로 번뜩이는 만리경이 보였다.
덜컹!
문득 기계음과 함께 발판이 흔들렸다.
중전이 기겁하면서 한쪽 팔을 붙들어왔고, 무슨 상황인가 싶어 천을 걷어 바깥을 보니 시야가 떠오르고 있었다.
“발판이 올라가고 있을 뿐이에요.”
이원익은 자신의 발명품, 아마도 크랭크와 체인을 단지 지붕을 개폐하는 데만 쓰기엔 아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중전은 내가 발판이 뜨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는데도, 여전히 겁이 나는지 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만리경과 함께 지붕 가까이 떠오른 암실은 겨울의 한풍을 맞아 더 싸늘해졌다. 천을 무거운 것으로 쓴지라 요란하게 펄럭이는 일은 없었다.
“영의정이 여러모로 공을 들였군요. 자존심이 꽤 상했나봅니다.”
“…예?”
“이거 만드는 법은 내가 가르쳐줬거든요.”
나는 만리경을 향해 턱짓하고는, 달아올랐는지 품에서 꿈틀대는 인평대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원래는 드넓은 밤하늘을 인평대군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율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영의정과 관상감원들은 그보다 먼저 만리경의 완성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해봤겠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비가 달을 보여주마.”
서둘러 만리경을 조율하니, 보름달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아온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이어서일까.
나조차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분명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기겁할만한 체험이 되지 않을까.
인평대군에게 양보하니 곧장 함성이 터졌다.
“와아!”
“그게 달이다.”
“소자는 달이 평평할 줄로 알았사옵니다.”
“하지만 아니더구나.”
“예에…….”
인평대군은 처음으로 확대해서 본 보름달을 머리에 새기고 싶었는지, 한참이나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비의 몸이 으슬으슬해질 즈음에야, 몽롱해진 얼굴로 물러났다.
“다음에는 오성五星도 살펴보자꾸나.”
오성五星이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
각기 이름에 별 성星이 붙긴 하지만, 실체는 밤하늘의 다른 별들과 달리 지구와 함께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이다.
만리경을 도입했으니 천체의 운행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될 테고, 우주에 대한 지식도 넓어지겠지.
“중전?”
건물에서 반쯤 떠오르게 된 중전은 여전히 발밑이 무서웠는지, 나의 팔을 붙든 채로 만리경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막내와 마찬가지로 감탄하며 보름달의 모습을 감상했다.
“어때요?”
“달이 이런 모습일 줄이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별은 몰라도 달은 따다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해주니, 중전이 고개를 돌리곤 입을 가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가족이 다 보름달을 봤으니 암막에서의 볼일은 마쳤다.
세자야, 뭐.
부모는 골방에 내버려 두고 신축에서 세자빈과 깨가 쏟아지는 중이다. 때 되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 * *
설날.
정월正月 초하루와 함께 시작된 건 새해만이 아니었다.
비사성에서 소식이 있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방문했다고 하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보고에, 뭇 중신이 기함했다.
“명나라!”
“그동안 통교가 단절되지 않았습니까? 어인 일로 명나라에서.”
“무슨 사정이 생겼나 봅니다.”
“하기야…….”
이원익이 크흠, 짧게 신음하자 좌중의 소란이 금세 잦아들었다.
명나라는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이웃이다.
조선 역시, 전통적으로 명나라와의 창구였던 등주가 자칭 등래대원수에게 넘어간 뒤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다 망해가는 제국에 왜 고생까지 해가며 사신을 보낸단 말인가.
무슨 아쉬운 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런 뻔뻔한 태도에도 막상 명나라는 반응이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따로 나설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겠으며, 부차적으로는 자존심도 꽤 상했기 때문이리라.
‘어려운 사정에 기껏 찾아와서는 책망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현재의 조선은 홍태주를 무릎 꿇린 뒤 고삐까지 채워놓았다.
모험심 강한 상인들은 요동을 제 안방처럼 종횡무진하며 상업을 꽃피우는 중.
특히, 상인들이 헐값에 매입하여 본토로 보내오는 자원들은 조선에 큰 이익이 되어주고 있다.
홍태주가 지원의 대가로 특혜와 함께 여러 자원을 양도했으나 요동은 아직 불안정하다.
조정에서 직접 가져오기엔 위험하고 자원의 양도 많았다.
이를 상인에게 매각하여 단기적인 수입을 올리고, 동시에 국내로 반입하면서, 풍족해진 자원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귀금속은 비축 및 화폐 주조에 사용하고 목재로는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식.
그야말로 일거삼득이다.
이외에도 상인들은 요동에서 질 좋은 땅을 매집하는 등, 조선은 홍태주를 용서해 주고 지원까지 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고 있다.
이러한 구도를 봤을 때, 요동 패권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명나라가 이러한 조선을 질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안 좋은 상황을 얼마나 더 안 좋게 만들려고 그러겠나.
‘명나라가 잠잠했던 이유지. ……아직까지는.’
그러나 올해 정초를 맞아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왔고, 비사성에서는 그들의 입국 소식을 전해왔다.
사신들은 한때 명나라 영토였던 비사성에 입국하며 어떤 감상을 가졌을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감상이 아니라, 그러한 감상이 표출되었느냐다.
“영상, 사신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알려왔습니까?”
“원수가 함께 전해오기를, 사신들은 전하께 조서詔書를 전달하기만을 바랐으며 비사성의 주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옵니다.”
“명나라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찾아왔나 봅니다.”
이원익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긍정했고 어전은 다시 웅성거렸다.
명나라가 아쉬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장대한 세월 천하를 주름잡았던 대제국이다.
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그때의 자존심을 내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명나라가 심각하게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는 방증이겠지.
‘수도만 잃지 않았다 뿐, 남명과 다름없는 지경이니…….’
이원익이 물었다.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의례적인 물음이었으나, 그것이 곧 명나라의 몰락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예전 같았으면 명나라의 사신을 상대로는 입국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으므로.
물어보나 마나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게 없었다.
상반한 두 나라의 운명이 이러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무작정 단교하는 것도 상책은 아니겠지.’
역사가 바뀌었고, 후금은 몰락했으니, 만에 하나라도 명나라가 재기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조와 명나라는 지난 수백 년간 교린을 쌓아온 우방이니, 어렵게 보낸 사신을 되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입국시켜 황제의 전언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예에.”
이견은 없었다.
* * *
비사성 여문에서.
사례감 태감 왕민정王敏政은 해안가로 나와 해묵은 추억을 상기했다.
그는 이미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조선이라고 미약하지는 않았고 감회가 새로웠으나, 이번 방문조차 감회가 새로울 줄은 몰랐다.
“……대명의 영토였던 이곳을 멋대로 삼키고는, 황제의 사신을 이곳에 멈춰세우다니.”
옛날 같으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감상이야 어떤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조차도 조선인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다. 이게 현실인 것이다.
‘대명천하도 황혼이구나.’
동편과 서편에서 각기 오랑캐가 발호하고, 안에서는 농민이 궐기하며 군사는 반란하니 대명의 위세가 예전과 같지 않음은 왕민정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너울거리는 파도를 보며 착잡한 심정에 시달렸다.
‘……뇌물을 줘서라도 빠졌어야 했나.’
과거에는 위충현에게 뇌물까지 바쳐가며 조선행을 자처했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조선의 왕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별 수 있으랴?
현재 조선의 왕은 이전의 왕들과 달라, 극도로 괴팍하고 탐욕스러워 사신을 접대하는 법을 망각하고 도리어 핍박한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이다.
이런 막돼먹은 제후를 상대로 황제와 대명의 사신으로서 아쉬운 소리를 해봐야,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오명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잘 되었어도, 무엇을 내어주었냐며 추궁당할 테고 당연히 잘 풀리지 않더라도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묻게 될 테니…….’
조선행이란 무조건 손해보는 짓인 셈이다.
이것이 불 보듯 뻔했던지라, 지난 날에는 앞다투어 자원하던 조선행을 모두가 마다하였는데, 그래서 억지로 등떠밀린 사람이 왕민정과 호양보였다.
이전 조선행에서 나름대로 인상적인 수확을 얻어왔다는 게 이유였다.
조선의 신무기와 패잔한 오랑캐 수괴들의 무구를 가져왔으니까.
그 소식에 왕민정은 한숨만 푹푹 쉬다가, 때가 되어 북경을 나섰는데 호양보가 보이지 않았다.
왕민정은 호양보가 발 빠르게 뇌물을 써서 사행에서 빠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간에는 사행에 넣어달라며 뇌물을 써왔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의 전환이었다.
‘치사한 놈. 내게는 알려주지 않고 혼자서 빠져?’
왕민정은 주먹을 움켜쥐고서 원망하였으나, 호양보가 들었다면 억지 아니냐며 비웃을 소리였다.
모두가 마다해 강제로 두 사람이 등떠밀렸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전부 빠질 수 있겠는가.
저벅, 저벅……
문득 다가오는 발소리에 왕민정은 서둘러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어쩐지 축축한 것이 젖은 듯해, 왕민정은 내심 욕지거리를 삼키며 웃는 낯으로 몸을 돌렸다.
“아, 원수.”
“대인.”
불청객의 정체는 비사성을 점거한 조선군의 지휘관, 이완이었다.
명나라에서도 명성이 전해진 이순신의 조카였다. 비사성으로 출정한 이래 벌떼처럼 모여드는 도적들을 상대로 전승을 거두었다던가.
고작 도적이라고 괄시하기엔 대명조차 할거한 도적떼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대는 지경이다.
대명에 이런 장수가 있었다면 지금의 수치도 덜하지 않았을까.
왕민정은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곤 물었다.
“원수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대인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전하께서, 입국을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아아.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요.”
“마침 들어온 배가 나가는 배입니다. 준비하시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왕민정은 웬지모를 처량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