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42화 (24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42화

왕민정은 짐을 챙겨 수행원들과 함께 범선에 올랐다.

이 조선의 신형함은, 남경南京의 아래쪽에서 흔히 보인다는 홍모이의 배와 무척 닮았다.

‘많이도 달라졌군…….’

조선의 조선술은 명나라에서도 알아주던 바였다.

임진년, 육지에서는 대명에 의지하지 않고는 승리 한 번 거두기 버거워했던 조선이었으나 바다에서만은 파죽지세였으니까.

그 수준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바다 위에서 살아간다는 홍모이의 선박을 복제해낸 걸 보니 왕민정은 또 속이 착잡해졌다.

천하에 문명은 대명이 첫 번째요, 그나마 조선이 두 번째고 뒤는 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은 한없이 치고 나가는 동안 대명은 어디까지 뒤처지는가.

제국의 면목이 없었다.

‘쩝.’

* * *

선상 여행은 짧았다.

이전에 조선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번개처럼 빠르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바람을 타고 가는 배의 위력이 이러한가.

홍모이들이 이렇게 생긴 배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만,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동안 여러 고을에 배를 대면서 사람과 화물을 빈번히 내렸다는 점일까.

대명의 사신이 한양으로 가는 중이거늘, 여느 승객과 다름없이 치부되어 무심히 일정따라 움직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착한 한양에서, 왕민정은 새로운 감상을 받았다.

‘이게 한양이라고?’

분명 한양을 방문한 것이 오래전도 아니거늘, 그새 강산이 바뀐 듯했다.

“이게 정녕 한양이란 말인가?”

수행원들 역시 대부분 한양을 오갔던 자.

옛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가 달라지면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고 했는데, 과연 왕민경과 그의 수행원들은 눈을 씻고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찬탄이었다.

“허어…….”

과거 왕민경이 방문했던 한양은 변방의 소읍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사람은 많았으나 발전 수준이 미진했던 탓.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달랐다.

그새 인구가 불어난 것처럼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고, 보이는 곳마다 짐꾼이 즐비했다.

복층의 건물도 많았는데, 대부분은 창고로 보였다.

그 주변마다 고지기로 보이는 선비들이 뒷짐을 쥔 채로 오가는 배들을 주시했으며, 이따금 새로운 배가 들어올 때마다 알아보는 선비들이 일꾼을 내보내곤 했다.

그중에서 한 사람이 막 내리는 배의 선장과 만나 포옹했다.

“퇴물사관!”

“퇴물수병!”

두 사람 모두 키는 멀대 같고 터럭은 붉은 것이, 차림새는 조선인이었고 하는 말도 조선인이었지만 영락없이 홍모이였다.

범선이 그냥 등장한 게 아니었다.

“퇴물 수병이라니? 이렇게 출세했는데!”

“그럼 나는 퇴물 사관이 맞아?”

“배 타던 사람이 뭍에 처박혀서 오가는 배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퇴물 맞, 케흑!”

왕면경은 부두에서 투닥대는 두 홍모이를 뒤로하고 수행원들과 짐을 챙겨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번화한 부두 한가운데서 바삐 오가는 짐꾼들과 승객의 길을 막으며 멍청히 서 있는데, 그런 그들을 곧바로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감 왕 대인이십니까?”

듣던 중에 반가운 중국어였고, 왕민정은 화색을 하고서 발을 돌렸다.

“그렇소! 내가……. 왕 태감이요.”

빠르게 힘이 빠지는 왕민정을 찾아온 이는, 일전의 조선행에서 면식을 잔뜩 쌓아놓은 사람이었다.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남 대인 아니십니까.”

조선에서 갖은 박대를 당한 일을 본국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눈물과 콧물로 받아낸 가증스러운 배신陪臣이었다.

아니면, 배신背信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까?

정작 북경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업고서 안하무인으로 활개치며 엄당과 동림당의 싸움을 부채질하고 부스러기를 긁어갔으니 과연 배신은 배신이었다.

그러나, 이 배신자背信者 배신陪臣은 뻔뻔하게도 희희낙락한 낯짝을 한 채 가식적인 환대를 보였다.

“한양에서도 뵙고, 북경에서도 뵈었는데, 이렇게 다시 또 한양에서 뵙게 되니, 왕 대인과 이 사람의 인연이 보통 깊은 게 아닌가 봅니다.”

“그것 참…….”

끔찍한 소리로군.

“반가운 소리로군요.”

“하하.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왕민정은 번화한 부두에 이곳이 한양의 일부인 줄 알았으나, 밖으로 나와보니 아니었다.

강변의 즐비한 복층 건물들 너머로 광활한 논밭이 펼쳐졌기 때문.

그러나, 한양까지 찾아가는 건 남이공의 도움을 받지않더라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지평선까지 이어진 대로로 일꾼과 마차들이 개미 줄 지어가듯 이어졌으니까. 이들이 어디로 갈지란 뻔한 것이었다.

“한양 바깥은 이번이 처음이시지요?”

“그렇소만……, 한양의 바깥은 다 이렇소?”

“다 이렇지는 않지요. 얼마 전까지도 이렇지는 않았고요.”

“그새 한양 주변이 발전한 모양이요.”

“늙은이들이 요즘에는 시간이 특히 더 빨리 지나간다고 투덜대지요. 원래도 그랬습니다만, 설마 진짜로 요즘 들어서 시간 가는 게 빨라졌겠습니까.”

“조선이 그만큼 빠르게 발전한다는 뜻 아니겠소.”

왕민정이 불퉁하게 답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그대로 읊으란 식의 자화자찬이었다.

‘이걸 조선에서는 엎드려 절받기라 하던가…….’

눈물과 콧물로 체액을 짜내며 추접스럽게 약조를 강요하던 지난 날의 남이공을 생각하면 참으로 괘씸한 처사였다.

하지만 왕민정은 조선에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으니, 남이공이 유서깊은 고려봉자高麗棒子의 예법을 보여준대도 옛시절 송나라 때처럼 그저 맞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요즘 조선의 상황은 어떻소이까?”

왕민정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제가 조선 왕인 양 으스대길 좋아하는 남이공이라면 얼씨구나 좋다고 자랑하겠지.

그게 왕민정의 노림수였다.

‘그렇게 살판 났으면서 우리를 안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남이공도 한때 북경에서 모사꾼들과 한바탕 놀아본 자.

“호조의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나, 면밀히 살펴본다면 딱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듯합니다.”

“조선에서는 입에 풀칠을 이렇게 하외까?”

“집이 구중궁궐처럼 웅대하고, 걸친 옷이 비단이라도 밥그릇에 담기는 게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지요. 요즘 조선은 사나운 늑대 한 마리를 어루만지느라 여간 고생이 아닙니다.”

남이공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고, 왕민정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자식이…….’

자랑은 자랑대로 하면서, 동시에 사정이 안 좋다며 염병도 염병대로 떤다.

이게 능멸이 아니라면 무엇이 능멸일까?

비록 연로한 몸이라지만, 기력을 다한다면 사람 턱 정도는 반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다. 왕민정은 그러고픈 충동을 진하게 느꼈다.

하지만, 정말로 남이공의 턱을 돌렸다간 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진다.

거기서는 자신의 목이 반대 방향으로 꺾이게 될 테니까.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

다 죽어가는 제국일지라도 황도에서 태감을 지내며 부와 권력을 향유해온 왕민정이다. 그는 아직 이승이 좋았다.

다만 또 당해주고픈 마음은 없어 조용히 남이공의 안내를 받을 따름이었다.

* * *

“중국 사신을 숙소로 안내하는 동안 신이 거듭 떠본 바, 방문한 사유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아조의 도움을 구하고자 온 것이 확실했사옵니다.”

예조판서 남이공의 보고에 우의정 이상의가 물었다.

“아조의 도움을 구하리란 건 이미 기정사실로 보고 있지 않았던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노골적으로 지원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살이호지전을 앞두고 조선에 원병을 청할 때도 조서부터 내려오진 않았다.

황제와 대국의 체면에 도움을 구한다는 게 무척이나 민망하고, 또 만에 하나 조선이 거부할 경우 체면에 심각하게 실추되기 때문.

그래서 당시에도 지방관원이 먼저 조선과 접촉해 간접적으로 도움을 구해왔다.

‘그런데 노골적일 수 있다면…….’

대뜸 보낸 조서임에도, 직설적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뜻.

“명나라가 황제의 체면을 걸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가 거부한다면, 장차 양국의 관계는 단절된다고 보아야겠지요?”

“단절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답했다.

이에 좌의정 박홍구가 턱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이미 우리가 명나라와의 외교를 반쯤 단절하고 살았는데 문제 된 게 있었습니까?”

박홍구의 마음속에서 명나라는 이미 지워진 존재였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살아난 덕을 보긴 했지만, 황제도 달라졌고 세월도 많이 흘렀다.

입만 쓱 닦고 말았다기엔 살이호지전에서 조선이 온 힘을 짜내어 보낸 원병이 전멸까지 당했다.

그리고 명나라가 산해관 뒤에 숨어 벌벌 떠는 동안 조선은 후금의 침공을 외롭게 거듭 막아내었으며, 끝내는 후금을 단속하여 목줄까지 채워놓았다.

“은혜는 다 갚은 지 오래요, 명나라에 빚진 건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명나라는 장대한 세월 무도한 사신들을 통해 아조를 핍박하고 수탈하였으니, 오래된 원한을 마저 풀지 않고 이쯤에서 교린을 정지하더라도 도리어 저들이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박홍구의 거친 평가에 이원익이 곧장 반박했다.

“명나라는 조선과 이 나라에 단둘밖에 없는 문명인데 망국을 수수방관한다면 끝내 조선은 외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겠소이까.”

“예절이 없는 이웃은 담장 너머의 오랑캐만도 못한 법이라 했습니다. 어차피 따지자면 명나라도 근본은 이반한 폭도 무리에 불과했던 자들이요, 원나라는 잔혹무도한 몽고인이 황위를 찬탈하고 군림했던 것에 불과하니, 기실 중원에 문명이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옛 송나라의 거죽만 뒤집어쓴 채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미개인들만 창궐한 지 오래입니다.”

박홍구가 구구절절 가혹한 평가를 내렸으나 콧대가 하늘까지 충천한 대조선의 중신들은 이렇다할 반박을 꺼내지 않았다.

몇몇 보수적인 이들만이 쓰게 침음할 뿐.

‘사실, 박홍구의 말이 옳기도 하고…….’

몽골은 부강했을 뿐, 문명의 정점을 자부하기엔 도리어 파괴행위만을 자행했고 명태조 주원장 역시 난놈이긴 하되 근본은 농민 반란군의 수괴였다.

이런 오명에서 자유로운 국가를 찾자면 그나마 가까운 게 송나라겠지.

사백 년 전에 망한.

어쩌면, 이런 평가가 조선 선비들이 차마 내색해오지 못한 오래된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눈치 볼 일이 없어졌으니 하고픈 말을 다할 뿐.

“섬서의 폭도 무리가 되었건, 귀주와 사천의 오랑캐들이 되었건, 혹은 자칭 등래대원수이건 북경을 점령한다면 이젠 제깟 것들이 황제고 제국이라며 으스대지 않겠습니까? 항상 해왔던 것처럼?”

박홍구가 적막 속에서 쓰게 평가했다.

“그러면 그 무리들과 새로운 교린을 맺으면 될 뿐입니다. 다 죽어가는 나라를 억지로 도와줄 이유는 없지요.”

이에 이원익이 고개를 돌려 제신들을 살폈다.

이런 주장에 모두 동의하냐는 듯.

신하들 사이에서는 멋쩍은 헛기침만 나왔다.

‘민정이가 들으면 눈에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팡팡 쏟아내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