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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43화 (243/380)

인조, 명군이 되다 243화

안타깝게도, 민정이가 눈에서 과즙을 쏟아내는 장면은 볼 일이 없었다.

없어야 하기도 하고.

좌의정의 다소 원색적인 평가가 참트루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 단편적인 평가에만 의존해 명나라를 무작정 손절하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워낙 오래 쇠락해서 그렇지, 나라가 오래되어서 근본이라는 게 없진 않으니까.’

명나라와 청나라의 패권 다툼은 끝내 청나라의 승리로 귀결하나 그렇게 만들어준 건 지방의 반란군들이었다.

여기서 가장 크게 성장한 무리가 섬서의 순順나라와 사천의 서西나라다.

두 자칭 제국은 근본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초대 자칭 황제가 곧 두 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

순나라는 명나라 황자 주상순朱常洵을 잡아먹은 꼴통 황제 이자성李自成 뒤로도 찌꺼기 같은 게 더 붙어있긴 하지만…….

‘딱히 중요한 놈들은 아니니.’

아무튼, 순나라와 서나라는 청을 막아내고 있던 명나라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갈겨대다가 막상 명나라가 망해 버리자 밀고 들어온 청에 순식간에 진압되어 똑같이 망해 버린다.

근본이 없다는 게 이런 것이다.

반대로, 명나라는 북경과 알짜배기인 중원의 북쪽을 잃고도 장강 이남으로 물러나 국체를 지속했다.

비록 마저 몰아붙인 청나라에 채 20년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긴 했으나, 긍정적인 부분을 보자면 실체를 다 상실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도 제법 버텨냈고.

20년이면 한 세대다.

‘나라에 근본이 있다는 건 이런 것이지.’

지난 수백 년 동안 중원이 대대로 명나라의 땅이었다 보니, 나라에 가죽만 남아도 백성들의 정체성에 의지해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이다.

비록 명나라는 실패했으나…….

“진晉나라와 송宋나라는 중원의 절반을 잃고도 국체를 백 년 넘게 보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명나라를 망국까지 몰아붙인 게 반란군들이라면 진정 명나라를 멸망시킨 건 청나라였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번 역사에서 어떻게 되었나.

진화에 실패한 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전락했다.

살아남기 위해 청나라로의 진화 수단이었던 원나라의 옥새조차 넘긴 마당.

이들이 다른 역사처럼 만리장성을 우회하고 산해관을 넘으며 명나라를 멸망시키리란 예상은 그리 들지 않았다.

“명나라가 당장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앞선 사례를 상고해보자면 몇 대는 더 지속할지도 모르지요.”

좌의정 박홍구도 그 점은 반박하지 못했다.

“누가 알겠습니까, 봄볕 아래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몰락해 버릴지, 아니면 위기에 심기일전하여 두 번째 황금기를 구가할지를요.”

다른 역사에서는 전자가 되었지만, 많은 조건이 달라진 지금 후자가 실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청나라가 없어졌으니까.

그나마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무리를 꼽자면, 자칭 등래대원수가 이끈다는 패잔병들의 무리다.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한때의 내부인으로서 가장 열정적으로 명나라를 공격했던 자들이 바로 한간漢奸들이었기 때문.

내부사정을 잘 아는 배신자가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적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그나마 이번 역사에서는 두 무리가 연합하지 않고 하나는 망했으며, 다른 하나는 따로 놀고 있다.

이 역시 명나라의 결말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가 실현되어 명이 진나라와 송나라처럼 백 년 넘게 국체를 유지하게 된다면, 설령 중원의 반분만 남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존재에 부정적이기만 한 인상을 남기기보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게 좋겠지.

황제와 대국의 체면을 굽혀가며 자비를 구걸했는데 매정하게 거절한다면, 사실 돌아올 감정은 단순히 부정적이기보다는 원한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명나라의 존속을 우리가 응원해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옵니까?”

영의정 이원익이 적절하게 장단을 맞춰왔다.

“그래야 과거 요遼, 금金과 송宋이 공존했을 때처럼 이상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순이 되어도 좋고, 서가 되어도 좋다. 하다 못해 청나라가 되다 못한 시즌 2 금나라라도 좋다.

다 죽어가는 명나라의 반분을 빼앗고 중원에서 환자들의 다툼을 치열하게 이어간다면, 조선은 더더욱 눈치 볼 일이 없게 된다.

투쟁 과정에서 흩날리는 부스러기를 조선이 다 빨아먹을 수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한때 내가 절실하게 바랐지만……. 금나라가 처참하게 망가지면서 포기했던 구도.’

어쩌면, 다시 한 번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고려가 누린 영화는 삼한을 통틀어 수隋나라를 망국까지 몰아간 고구려조차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조선 역시 그때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다는 말에, 여러 중신이 달콤한 상상에 젖었는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좌의정.”

“예, 전하.”

“경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한 글자, 한 글자 듣는 나조차도 통쾌할 정도였어요.”

박홍구가 망극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근간이 폭도 무리에 불과한 자들일지라도 오랫동안 중원의 주인으로서 군림해 왔고, 서로 의지해 온 역사가 없잖아 있으며, 지금의 상황을 이용할 여지 역시 없지 않으니, 그들의 위기를 수수방관하는 것만이 상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신이 늙고 우둔하여 경박한 감정에 일순 경도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늙은이의 좁은 식견을 이처럼 넓혀주니, 한없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서 답했다.

“좌의정의 식견이 좁다면 이 세상 사람들 십중팔구는 소경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민망해하는 박홍구를 달래준 뒤에는, 신하들을 향해서 결정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명나라가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청해 온들, 도움의 수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중국 사신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할 힘이 있고, 논의할 시간 역시 충분히 가질 수 있으니, 당장 결정을 내리지는 맙시다.”

“실로 합당한 전교이시옵니다.”

박홍구가 곧장 맞장구 쳤고, 나는 제신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사신이 바닷길로 오느라 여독이 적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 며칠간 휴식을 준 뒤 부르도록 하지요.”

* * *

예전 같았으면 사신이 조선의 왕을 기다리게 했겠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먼 길을 오시느라 여독이 많이 쌓이셨을 테니, 충분히 휴식하신 뒤에 부르겠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당장이라도 뵐 수 있다, 아니면 조서라도 받아달라 해도 공손히 사양할 뿐.

급하게 찾아왔으나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왕민정이었다.

하지만, 저들 조정에서 만나주지 않겠다니 별 수 없었다.

궁궐의 담을 넘어 쳐들어갈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 민정이는 전해질지조차 불투명한 하소연을 잔뜩 남기고는 숙소를 나섰다.

번화한 한양의 풍경을 다시금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과연 한양은 일전 방문했을 때보다 알음알음 화려해져, 전보다는 일국의 수도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처음 발을 내디뎠던 부두처럼 극적인 변화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한양은 수십 만 명이 한데 살아가는 거읍. 고작 몇 년 사이 천지개벽하기엔 덩치가 컸다.

그러나, 점진적일지라도 방향성만은 분명했기에, 왕민정은 자신이 한양을 몇 년 뒤에 또 찾아오게 된다면 더욱 진일보한 한양을 마주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무서운 기세구나. 서쪽에서 지는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려 하는가.”

거리를 거닐던 왕민정의 자문에는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이 나라의 수도 전체가 온몸으로 답해주었으니까.

왕민정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로를 파도처럼 타고 흘러갔다.

한양에서 가장 활발한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이 방법은 적중해서, 곧 왕민정은 시전 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전은 행랑을 빼곡하게 채운 점포들 사이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다녔다.

인파人波가 과연 파도波濤 같았는데, 사람이 마구잡이로 섞어다니지 않고 각자 좌측으로 몰려다녔다.

‘이건 신기한데.’

점포마다 앞을 메운 손님들은 주인과 분주하게 떠들면서 물건과 값을 교환해 갔는데, 놀랍게도 미곡이나 천 대신 동전이 오갔다.

이는 왕민정도 이전 방문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현상.

‘조선도 화폐를 도입했구나.’

그렇게 왕민정은 인파를 타고 시전을 한 바퀴 돈 다음, 원래 자리로 나와 터덜터덜 숙소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삐 돌아다닌 덕에 피로했다.

들어가면 곧장 누워서 단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남 대인.”

남이공은 태평하게 의자 하나를 차지한 채, 한 손에는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출타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디로 가셨다는 말은 없어서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잠시 걷다 왔을 뿐이요.”

“한양은 잘 구경하셨습니까?”

“많이 바뀌었더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이공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적잖이 밉상이었던 왕민정이었으므로,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인 일로 찾아오셨소? 혹, 전하께서 나의 방문을 윤허해주셨소이까?”

“아직은 이릅니다. 출타하셨다는 말만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을 뿐입니다. 소관이 관반館伴을 맡아, 사신의 거취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어찌 우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태평하게 계셨구려.”

“출타하신 곳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혼자 나서서 뒤지자니 막연하며, 한성부에 군사를 청해 우르르 들쑤셨다간 공연히 소란만 일으키는 꼴이지 않겠습니까.”

남이공은 들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접고는 일어났다.

“멀쩡하게 귀환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소관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왕민정은 바른 얼굴로 밉상 짓거리만 하는 남이공의 두개골에 꿀밤을 먹이고 싶었으나, 그를 때리는 대신 미뤄두었던 의문을 확인하기로 했다.

제법 결례를 저질러 주었으니 뻔뻔하게 모른척하지는 못할 터.

“내가 참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요…….”

“예?”

“홍적洪賊이 귀국에 원나라의 옥새를 바쳤다는 말을 들었소이다만.”

“아, 전국옥새! 아시는군요!”

“……전국옥새?”

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은근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명나라조차 가지지 못한 게 전국옥새였으니까.

실상, 명나라도 역대 중원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옥새를 ‘발견’했었다.

그러나 부실하게 만들어 모조품이라는 게 티가 났고, 이 가짜 전국옥새는 곧바로 폐기되었다.

문제는 전국옥새 ‘발견’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세월 ‘거듭’ 전국옥새를 발견하고 폐기를 반복해오던 명나라는, 나라가 안정되고 황권이 견고해지자 허술한 전국옥새 복제 시도는 그만두게 되었다.

진품 전국옥새는 정녕 소실된 것이라 치부하고서.

하지만…….

그 전국옥새가 중원이 아닌 조선의 손에 들어와 있다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래서야 정말로 하늘이 명나라를 버리고 대세를 조선으로 삼은 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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