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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44화 (244/380)

인조, 명군이 되다 244화

“전국옥새를 대명에 양도해 줄 수는 없겠나?”

왕민정이 간절하게 물었지만, 남이공은 뻔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두 팔을 휘저어서 하늘을 날아보신다면 전하께 상주 드려보지요. 아니면 지금 당장 인왕산 꼭대기로 가 보시겠습니까?”

“거긴 왜…?”

“거기서 힘껏 뛰어내리면서 두 팔을 휘저으면 하늘을 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나가 죽으란 소리군.”

“오해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남이공은 개 풀 뜯는 소리는 그쯤 하라는 듯 웃고는 덧붙였다.

“더욱이 사신께서는 본국에서 가져온 조서도 있지 않습니까?”

분명 조서에 담긴 내용은 억지스러운 부탁일 게 분명한데, 여기에 전국옥새까지 내놓으라니.

왕민정도 그걸 부정할 순 없었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말은 해봐야지.”

“만족하셨습니까?”

“전혀.”

“만족하셔야 할 텐데요.”

남이공은 덮어놓은 책을 겨드랑이에 끼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소관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소식이 생기면 전해드리지요. 말도 없이 한양을 방황하시는 건 자중해주시고요.”

“흥. 지난번 한양에서 볼 땐 이렇지 않았는데.”

눈과 코, 입에서 즙을 질질 짜내면서 조선을 모함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내던 순간이 아직도 선연했다.

“많이 달라지셨소?”

왕민정이 빈정거렸으나, 남이공은 당당했다.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기엔 그동안 한양과 북경에서 본 단맛과 쓴맛이 적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세월이란 게 여간 빨라야지요. 그럼.”

남이공은 최대한 밉상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숙소를 빠져나갔다.

* * *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남이공은 숙소를 다시 찾아왔고, 왕민정은 불청객 보듯 했으나, 이번에는 남이공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이제야!”

왕민정은 수행원들을 시켜 조서를 바칠 준비를 하고는, 남이공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인 일로 접견이 늦어진 거요?”

“못된 늑대를 먹이느라 식량 가격이 많이 올라서 말입니다. 대처를 상의한다고 바빴지요. 다행히 잘 해결되었습니다.”

“잠깐, 조선에서 홍적과 그의 오랑캐 무리를 먹여준단 말이오?”

“배고픈 짐승처럼 사나운 짐승도 없지요.”

남이공은 그 조건으로 비사성을 할양받았다는 얘기는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명나라 딴에는 요동을 여전히 저들의 영토로 여길 테니까.

“하물며 사신께서는 조서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변방의 소란을 유의해야지요.”

남이공의 이어진 대답에, 막 조서를 수행원에게서 건네받은 왕민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배신이 폐하의 성심을 가벼이 짚어서 되겠소?”

“그 외에 명나라가 구할 도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좋지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안내나 해주시오.”

“그러지요.”

남이공은 왕민정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사신이 한양을 방문했다는 소문이 그새 파다하게 퍼진지라,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아가는 일행을 구경했다.

그 가운데에서 왕민정은 불쾌함보단 긴장감을 느꼈다.

지난번 조선 방문에서도 접대를 잘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이공만은 조선의 평판을 지키고자 구차하게라도 약조를 구했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는 남이공이 북경 때 이상의 밉상을 실컷 보여주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일 터.

최근 조선의 성취와 행보를 돌아보자면 과연 자신감을 가질 법했고, 이렇게 배가 잔뜩 부른 조선이 무엇이 아쉬워 명나라를 도울까 우려스러웠다.

‘왕이라는 작자부터 뻔뻔하고 괴팍하니…….’

감언이설을 늘어놓더라도 씨알조차 먹히지 않겠지.

왕민정은 주변은 의식조차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마침내 남이공과 함께 어전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용상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고생하였습니다, 예조판서.”

남이공은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빈자리로 물러났다.

그렇게, 용상 좌우로 시립한 조선의 중신들 사이에는 왕민정만이 덜렁 남아 왕과 마주했다.

조서를 가져왔으나 그동안의 예법과는 많이 다른 만남.

왕은 맞절하여 조서에 예를 표하는 대신 여전히 용상을 지키고 있었으며,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은 나올 말을 짐작하고는 편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왕민정이 조심스럽게 조서를 받쳐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조서입니다.”

이에 왕이 짧게 일렀다.

“도승지.”

그렇게 황제의 조서는 배신의 손에 들려 용상의 주인에게로 넘어갔다.

“예상한 대로군요.”

신하들이 멋쩍은 헛기침을 날려대었고, 왕민정은 눈치를 봤다.

“폐하께서는 내가 이번에도 대국의 어려움을 대신 짊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사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소관이 어찌 함부로 조서를 읽어보겠습니까.”

“조선은 소방小邦에 불과한데, 대명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던 금나라를 거듭 패퇴시키고 무릎 꿇려 그들의 무도한 참칭을 중단시켰지요.”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등주와 내주의 반란군까지 우리에게 떠넘기신단 말입니까?”

조선의 왕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지극히 송구스럽게도, 대명은 지난 임진년 조선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 사건은 당대의 왕과 조정이 한없이 멍청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

놀라워하는 반응은 왕민정이 아닌, 좌우에 시립한 중신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왕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망국을 앞두고 멍청하고 덜떨어진 놈들끼리 알량한 부와 권력을 두고서 다투었으니, 과거 무수한 국가들이 몰락한 과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때 아조가 망했더라도 나는 하늘을 원망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랬던 조선을 선제와 대명이 구원하였습니다, 전하.”

“내가 사신에게 물어본 건 은원이 아니라, 대방大邦에서 저들의 과오를 인지하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

“설마 성제聖帝와 협치 하에서 강건성세를 구가하던 대명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천벌을 받아 오늘날과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왕의 추궁에 왕민정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억울한 처사는 아니었다. 그는 엄당의 중진이었으니까.

“대방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무리하여 돕더라도 이내 같은 위기에 처할 것이니,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을 돕다가 도리어 붙들려서 함께 익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관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의 전교가 천 번, 만 번 지당합니다. 대명에서도 위기를 느꼈고 반성의 필요성을 통감하였으니 한 번만 손을 뻗어주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왕민정의 애걸에 왕이 용상에 기댔다.

“실로 그러한지는 차후 대명의 행보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전하….”

“북경은 현재 무수한 반역도들에게 둘러싸여 그 위태로움이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등래대원수를 어렵사리 토벌한들, 북경의 위기가 사라질까요?”

그다음에는 장차 순나라로 진화할 왕가윤의 도적들이, 또 그다음에는 반란한 토사의 무리가, 또 그다음에는 서나라가 들이칠 거다.

“폐하께서 남경으로 천도하시면, 조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등래의 반란군을 토벌하겠습니다.”

“하지만, 북경을 버리게 되면…….”

정말로 장강 이북은 모조리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제안을 불경이나 불충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왕이 단언했다.

“조선이 대명의 원호를 얻어 구명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은혜는 살이호지전에서 보낸 원정군이 몰살하고 금을 패퇴시키며 충분히 갚았다 한들, 문명이란 야만인들의 세상에서는 고립무원과 같아 양국이 예로부터 서로 이를 덮은 입술처럼 여겨왔으니, 앞으로 그와 같은 우호와 필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간청하는 것입니다.”

왕이 몰아붙이자 왕민정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어렵사리 답했다.

“전하의 진실한 마음을 어찌 소관이 모르겠습니까. 다만, 폐하의 이어는 소관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폐하께 전하십시오. 오직 용단만이 대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이외는 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

왕의 축객에도 왕민정이 차마 물러나질 못하자, 대오로 물러나 있던 남이공이 나와 비틀거리는 왕민정을 부축하고서 물러났다.

“…….”

그리고 두 사람이 떠나간 뒤.

무겁게 가라앉았던 좌중의 분위기가 일순 풀렸다가, 다시 굳어졌다.

모두의 긴장 속에서 영의정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지극히 황공하오나, 명이 중원의 절반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한들 선열을 욕보이는 건 과하다 사료하옵니다.”

“하하하. 영의정께서 그리 말씀하신답니까?”

이원익은 선조 때부터 관직을 지냈던 이.

정철에게 사주하여 대규모 무고 옥사를 일으킨 선조의 비열함이, 그 직후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어떤 후폭풍을 몰고 왔는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전왕이 퍼뜨린 해악은 나라가 한바탕 뒤엎어진 뒤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열성이라고 다 정답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물며, 왕이 되어서 말초적인 욕구로 망국을 자초하였다면…….”

선조가 병신이었다는 건 신하들이 공공연히 거론만 않을 뿐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세종대왕이 국가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전을 끌어냈다면, 선조는 국가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퇴락을 가져왔으니까.

“내가 이참에 전왕에 대해 솔직해지기로 했으니, 그대들 역시 전왕에 대해서라면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신하들을 둘러보며 이르자 다들 얌전히 고개만 숙였다.

내가 허락했더라도 신하들로선 가벼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

기실, 명에서 중원의 절반을 박탈하기 위해서였다만 꽤 사치스러운 발언이긴 했다.

나는 광해군을 축출하고 그를 대신해 선조의 뒤를 이었으니까.

왕위의 정통성을 선조에게서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선조를 공격한다는 건, 보통의 경우라면 제 살 깎아 먹기와 마찬가지.

그런데도 선조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선 건, 더는 선조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어서다.

쌓아놓은 게 많으니까.

황제의 거처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마당인데 고작 전왕 욕을 못 하랴.

‘……자유로워진 기분이군.’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굳이 거론하지 못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제는 아니다.

병신은 왕이어도 병신이 왕일 뿐임을 증명하고자 왕업에 헌신해왔다. 그 헌신이 내게 자유를 주었다.

* * *

단순히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만 선조 욕을 한 건 아니었다.

딱히 이유가 없어도 욕을 할 순 있지만, 왕이므로 실리 또한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는 병신임을 내가 공인한다. 땅땅.

조선에 두 번째 황금기를 가져온 왕의 공언에 한양은 곧바로 논쟁에 휩싸였다.

툭 던져진 세기의 떡밥에, 먹물을 한 방울이라도 먹은 이라면 가리지 않고 이것이 옳으냐 마느냐를 두고 입술이 불어터지도록 싸워댔다.

심지어는 일자무식인 촌부들조차 그런감, 아닌감 떠들 정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충효보다 더 중요한 게 없거늘 어떻게 선왕을 모독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후계를 이어도 되느냐.

그런 날카로운 비판에 맞서, 반대편에서는 왕일지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간하는 게 본디 선비와 신하의 도리였다며, 금상이 다시 언로를 텄다고 찬양했다.

그 과정에서 거리낄 게 없어진 많은 식자가 공공연히 선조를 비판했다.

무적인 금상과 한배를 타게 되었으니 회포를 가감 없이 풀어댄 것.

그리고 선조가 욕을 먹는다는 건, 그가 싸지른 갖은 똥들이 공개적으로 비판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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