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45화
“전하께서 대명의 명운을 위해 이런 소동까지 각오하셨으니, 더는 진심을 의심하지 않으시겠지요?”
남이공이 물었다.
그 당당한 질문에 왕민정은 짧게 침음했다.
“으음….”
왕의 충격 발언으로 한양은 과연 소동에 휩싸였다.
한양의 선비들이 양쪽으로 갈려, 왕의 발언이 촌철살인이니 그냥 살인이니 하며 왈가왈부가 시끄러운 탓.
배편을 예약해 두고 때를 기다리는 왕민정으로서도 놀랍기는 했다.
선대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건 황제는 물론,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정말로 진심인가…….’
혹 진심이 아니며, 이 모든 게 과감한 수작에 불과할지라도, 그래서 명나라가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는 것 외에 상책이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북경은 바다와 접한 부분을 제하고는 모조리 역적과 도적들로 포위되어 있으니까.
특히 섬서에서 할거한 왕가윤의 무리는 겸병부상서 홍승주洪承疇의 분전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잠식해 오는 중.
그나마 안전한 게 남경이라는 점은 왕민정도 부정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북경을 버리면 장강 이북은 다 역적과 도적에게 넘어가는 셈 아닌가?’
이 역시 자명하였으나, 그래서 북경과 그 주변부를 지키기 위해 황제가 풍전등화의 상태로 놓여야 하느냐면…….
‘젠장, 어렵구나. 난 모르겠다. 머리 좋은 놈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왕민정은 그저 이 소식을 가지고 귀국했을 때 자신에겐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랐다.
엄당은 동림당이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었고, 이놈들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올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어떻게 트집을 잡느냐는 귀국했을 때 북경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리라.
아직 살만하다면, ‘이런 모독을 당하고도 뻔뻔하게 돌아오다니?!’
슬슬 불안하다면, ‘한시가 급한데 일단 약조라도 하지 않고서 빈손으로 오다니?!’
“하하…….”
뻔했다.
“사신께서는 어찌 울다가 웃으십니까?”
“남 대인께서는 북경에 계실 적 엄당과 동림당을 오가며 마구잡이로 불을 놓지 않으셨소?”
“갑자기 음해하시는 연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전부 오해입니다.”
남이공이 당당하게 혐의를 부정하자 왕민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돌아가도 제법 귀찮아질 건 분명한데, 이참에 속이라도 시원해진 채로 귀로에 오르는 건 어떨까 하고.
* * *
선조가 아무리 병신 맞다지만 후왕後王이 공공연히 거론해도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곧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말을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맞는 말 했는데 무슨 상관이냐?
두 패로 갈린 건 한양의 식자와 호사가들만이 아니었다.
조정의 두 축을 구성하고 있던 서인과 북인도 평소의 강경함과 온건함을 막론하고서 새로운 기준으로 분열했다.
그렇게 여론의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두 당은 새로운 무리로 재편했다.
왕일지라도 충효 앞에서는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도리道理라는 도道당.
선비란 옳은 말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는 게 정도正道라는 정正당.
“참으로 헷갈리기 쉬운 이름들로 지었군요.”
좌의정 박홍구의 보고에 답했다.
“일부러 혼동하기 쉽게 지었답니까, 아니면 선비들의 창의력이 부족한 결과물이랍니까?”
웃으며 농을 걸자 박홍구도 슬쩍 웃으며 답했다.
“저들 스스로 우리는 이러한 당이다, 칭하지 않고 세간이 그리 명명하였으니 두 당으로선 참으로 억울한 오해이옵니다.”
“아, 직접 지은 이름은 아니로군요.”
박홍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진전입니다. 지금까지 동인과 서인에서 내려오는 해묵은 계파 당쟁에서 탈피하고, 각자 사유思惟 끝에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끼리 뭉쳤다는 뜻 아닙니까?”
그동안 각자의 가문과 스승의 당색을 이어받아 조상과 선대의 원한을 막연히 물려받고 패싸움을 이어간 세월이 얼마나 되었던가.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그건 나도 모르지만,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로군요.”
중요한 건 당장은 건전해졌다는 거 아니겠나.
“적어도 내 대에서는 변질하지 않을 겁니다.”
“어찌 확신하시옵니까?”
“각 당의 성분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깐깐한 도당의 당여들은 비교적 젊고,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들 위주였다.
다들 혈기방장한 만큼 비교적 강경한 견해를 가진 이들이 많고, 아직 힘이 미약한 자가 대부분인 만큼 도당과는 대조적인 구성을 이룬 정당보다 극단적인 견해를 내비침으로써 이목과 유대를 결집하겠다는 전략적 판단도 있을 터였다.
반대로 정당은 원숙하고 품계 높은 조정의 중진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원숙한 만큼 선조의 세대를 직접 경험해 보았고, 촉망받던 후계자인 광해군이 어째서 망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이 나라의 뿌리마저 흔들었음을 몸소 체감했다.
또한, 반정 전후로 천지의 개벽과 같은 진전이 있었으며 금상이 그 선두에 섰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축약하자면 ‘내가 직접 봐서 아는데, 선조는 진짜 병신 맞고 금상은 선녀다!’라고 말하는 자들인 셈이다.
“두 당은 권력의 중심과 주변, 중진과 신진으로 나뉜 셈입니다.”
“그야말로 당쟁이 당리당략의 싸움으로 변질하기 쉬운 조건 아니옵니까?”
“아니에요. 이 구도는 옛날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투던 시절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부자父子와 사제師弟 관계 안에서도 당색이 다른 경우가 빈번하지 않습니까?”
세대 차이에서 나오는 감정은 있을지라도, 과거 동서의 당쟁처럼 혐오와 증오심으로 서로를 몰살해버리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테지.
“선비들의 화액이라 칭해지며 역사의 변곡점이 된 사화의 희생자들도, 막상 돌이켜보면 기축옥사만 못했지요.”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무분별한 대학살이었던 갑자사화의 희생자는 239명.
그런데 기축옥사의 희생자는 약 일 천.
선조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고도 쫓겨나지 않은 건, 모두를 적으로 만든 연산군과 달리 선조는 서인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가 공존하던 기간 발생하긴 했지만 그게 오롯이 당쟁의 결과물은 아니잖습니까.”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史禍.
원인 제공자인 김일손의 품성과 능력 부족, 그리고 자폭이 원인이 되었다.
사망자는 다섯.
이후 벌어진 무분별한 대학살,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왕이었던 연산군이 단단히 돌아서 발생.
그런 연산군이 쫓겨난 뒤 바지사장으로 추대된 중종의 치세 중반 벌어진 기묘사화己卯士禍.
안 그래도 바지사장이라 불안한데 조광조가 자꾸 선을 넘어서 눈 돌아간 중종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숙청.
중종이 승하한 뒤, 인종의 짧은 재위를 거쳐 명종의 즉위와 함께 벌어진 을사사화乙巳士禍.
인종의 지지자들로 졸지에 끈 떨어진 연이 되어버린 대윤을 숙청하고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중에 일으킨 숙청.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구도에서는 왕이 돌았거나 의도하지 않는 한 사화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없지요.”
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난 내가 돌았거나, 사화를 원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원했다면 진즉 반정 때 칼춤 췄을 테니까.
“좌의정께서는 어떤가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전혀 그리 보이지 않사옵니다.”
“하하. 어째, 엎드려 절 받는 기분입니다마는……. 그래요, 좌의정께서는 당색이 어떻게 됩니까?”
나의 물음에 박홍구는 침음으로 운을 떼고서 답했다.
“으음, 의정부에서는 한양이 소란스러워질 때부터 싸움에 연루하지 않기로 약조하였사옵니다. 하오나, 바깥에서 본다면 신을 정正당으로 보지 않겠사옵니까.”
“안타까운 오해입니다.”
“예에.”
“그래도 나쁘게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어요. 이이李珥도 붕당에 연루하지 않기를 바랐고, 나아가 붕당을 부정까지 했는데 결국에는 서인들의 성현으로 추대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늙고 망령한 소관이 어찌 문성공文成公과 비교되겠사옵니까.”
“기분 좋아지라고 무리 한 번 했습니다.”
“아하하!”
박홍구는 시원스레 웃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성상께서 늙고 망령한 신하의 기분을 배려해 주시고 또 안심하라 다독여 주시니, 거듭된 성은에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아시잖습니까.”
나는 실소하고는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박홍구는 앞으로 다가와 황공하다는 얼굴로 과자를 챙겨 들고는, 물러나서 야금야금 먹었다.
“나날이 숙수의 실력이 좋아지는 듯하옵니다.”
“많이 고생시켰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만큼 숙수는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나와 신하들은 입이 행복해졌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실로 그러하옵니다.”
“나와 좌상, 다른 신하들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입이 행복해지는 건 백성들이지요.”
“더 고생하겠사옵니다.”
“고마운 말입니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세요. 가늘고 길게 고생하셔야지요.”
“예에.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박홍구는 빙긋 웃고는 예를 올린 뒤 어전에서 물러났다.
나는 멀어진 과자 상자를 끌어와서 하나를 집고 입을 채웠다.
* * *
“그래서, 전왕이 어떻다고?”
대비가 빤하게 바라보았다.
찾아오게 만들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먼저 매 맞는 심정으로 알아서 자진 납세한 참.
“에이……. 다 명나라의 사신을 속이기 위해 한 말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사신이 물러난 다음에도 한바탕 해주셨던데 말이오.”
“신하들이 워낙 동요하니 없는 말이라도 지어내 무마해야 했습니다.”
“얼핏 전해지는 말은 전혀 그렇지 않던데 말이오.”
“……크흠!”
조금 뻔뻔해지는 게 낫겠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비께서도 막상 전왕과 가례를 올릴 때 이 노친네는 소름 끼친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뭐요?”
“그때부터 전왕은 잘못 먹은 세월만 반백 년입니다. 대비께서는 가장 꽃다우실 때였고요!”
세자도 있고, 다른 왕자들도 있지만 51세의 나이에 자식들보다 어린 19세 처자와 결혼한다고?
서로 못 죽고 사랑하는 사이여서 결혼했다면 차라리 양반이다.
하지만, 이건 간택이잖은가!
“팔도에 금혼령까지 선포해 놓고 말입니다!”
반백 살이 된 늙은이가 온 나라 처자들의 혼삿길을 막아놓고서 내게 젊은 처자를 내놓으라며 꼬장이라니…….
이건 그냥 노괴가 발정이 나서 추태를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허, 그럼 나라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두기라도 해야 했단 말이오?!”
“법도가 엄해서 억지로 빈자리를 채웠다고 칩시다! 그런데, 나라가 누구 덕분에 반쯤 망한 판국인데 밤마다 정력제는 사발로 처먹어대고서는, 신하들 앞에선 기력이 없다 염병을 떨어댄 것도 법도 때문입니까?”
“…….”
“전왕은 병신이었습니다! 얼마나 병신이었냐면, 존나게, 존나게 병신인지라 대통을 이은 저조차 선왕先王이라 부르기 부끄러워 ‘전에 왕 하던 놈’, 前王이라 부르고 있잖습니까!”
나는 선조라는 이 역겨운 생명을 입에 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손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여가 궐을 떠난 지 한 해도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신하들을 채근해서 간택 이야기가 나오게 한 뒤에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지나 아십니까? 윤허한다, 14세 이상부터 선발하라!”
“…….”
“그저, 광해군이 미쳤기에 과거의 그 모든 수난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조는 서자출신의 세자를 핍박하고 탄압하면서, 동시에 기를 쓰며 아이를 낳고 또 낳아댔다.
일반적으로는 이미 세자에 오른 이상 출신이 문제 될 수는 없으나, 왕인 선조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고 일반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이놈은 한참 전쟁 중인데도 사지에서 바쁜 세자 상대로 양위 파동을 벌인 미치광이다.
그 사리 분간 못하는 미치광이가 어디까지 미친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는가?
광해군만 최악을 의식한 것도 아니다.
영창대군의 탄생과 함께 미친 노괴의 총애가 핏덩이 적자에게로 향하자, 영의정인 유영경부터 자기 소북 당여들을 이끌고 영창대군파로 갈아탔으니까.
당연히 광해군이 돌아버릴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돌아버릴 테지.
그동안 나라와 백성, 부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지를 종횡무진했는데!
그 처절한 배신감과 억울함, 비통함을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겠을까? 자기 아버지부터, 주변에서 눈치 살살 보며 다른 줄 건드리는 신하들부터 자기편이 아닌데!
……그리고 노괴가 죽은 다음 벌어진 참상에는, 대비도 크게 일조했다.
대비 역시 노괴 못지않게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고자 노골적인 행보를 보여왔으니까.
한참 적막이 흐르고.
대비가 지친 얼굴로 시인했다.
“……그때는 나도 어렸소. 생각은 없었고, 치기만 어렸지.”
“대비께만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해군의 잘못만도 아니지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인 제공자는 분명합니다. 나는 ‘그깟 것’을 예로써 모실 수가 없어요. 제가 그렇게까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무수한 세월의 풍파가 지나간 대비의 손을 붙잡았다.
“대비께서는 그 소름 끼치는 괴물이 죽고, 그가 악의로 망가뜨려 놓은 자식까지 궁궐에서 쫓겨난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지셨잖습니까.”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라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대비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