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47화
“자, 자…….”
호조판서가 예산을 아끼고, 병조판서가 군대를 조련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다.
마지막에는 타협해야겠지만, 호조판서 김신국과 병조판서 김세렴의 의견이 당장 평행선을 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보다 거시적으로 문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
다른 방향의 시야를 가진 인물들의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말이다.
“예조판서의 말씀대로 홍태주가 중원을 탐내고 있다면 우리가 등래대원수 토벌을 전적으로 떠안을 일은 없겠군요.”
“그러하옵니다.”
예조판서 남이공이 긍정했다.
“아조에서 무리할 이유가 없다면, 무리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홍태주가 참전한다면 나는 두 가지를 우려할 수밖에 없군요.”
제신이 이목을 모은 가운데 재차 입을 열었다.
“하나는 홍태주의 중원 진출이 장차 남명의 존속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등래대원수 토벌에 응한 건 청나라가 없어진 이번 역사에선 그들이 남명 존속에 가장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청나라에 앞잡이를 자처한 한간漢奸 반역자들이 남명 멸망에 가장 큰 공로를 세웠고.
하지만 홍태주의 중원 진출을 용인한다면 여우를 쫓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 아닐까.
이에 좌의정 박홍구가 말했다.
“이조가 이미 비사성을 장악했고, 산동에서도 중요 해안 거점을 골라 차지한다면, 홍태주가 중원을 차지할 야욕을 품더라도 아조가 원치 않는 한 야망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 부분에서 내가 두 번째 우려를 품게 되었습니다. 지금 홍태주의 앞길을 막는 건 우리뿐이니, 그가 지난날의 어려움과 원조를 다 망각하고서 재차 자멸을 자초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지요.”
“으음…….”
박홍구는 쓰게 침음할 뿐이었다.
본디 오랑캐란 무도하고 비열하여, 신뢰하기 어려운 종자들이다.
조선이 직접 요동을 지배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의해 간접적으로 이익을 실현하고자 금나라의 존속을 윤허하였으나, 혹 빈틈을 보이거나 놈들의 천성이 발작을 일으킨다면 전쟁은 재개될 터.
이러한 우려에 김세렴이 답하며 나섰다.
“그러니 군사의 증강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론은 없었고, 이에 김신국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병판께서는 어느 정도의 증원을 원하고 계시오?”
“삼만은 필요합니다.”
“사, 삼만?!”
김신국의 반사적인 경악과 함께 어전도 술렁거렸다.
그 와중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신국이 따져 물었다.
“아조의 정예한 군사가 채 삼만에 미치질 못하는데,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를 한꺼번에 늘리자는 말이요?!”
“그렇습니다.”
“병사와 군량은 땅을 파서 나오는 게 아니외다!”
“이 사람이라고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변방을 안정적으로 수호하고 산동에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군사는 있어야 합니다. 삼만도 최소한이에요, 어떻게 일국이 반란군만 못한 군대를 가졌단 말입니까?”
“그놈들이야 날파리 같은 부와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무력을 짜낸 것이고, 아조는 엄연히 제도와 질서를 갖추고 만세를 구가하려는 문명이라서 그렇소! 그리고 아조라고 정예병만이 군사의 다가 아니잖소?!”
이외에도 무수한 변진에서 징집병들이 국경과 질서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들이 금나라나 등래대원수의 군대와 맞서 이길 수는 있습니까? 그저 세워두기만 한 허수아비요, 아까운 쌀만 퍼먹을 따름입니다.”
“그럼 그들을 강군으로 조련하면 될 것이지, 어째서 군사들을 더 달라고 한단 말이요?!”
“논밭을 지키라고 세워두는 허수아비를 모두 뽑아 가버리면 논밭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징집병도 나름의 용처가 있는 법.
단지, 강적인 금나라와 등래대원수의 군대와 맞서기에 충분하지 않을 뿐이다.
“허어, 참!”
김신국은 탄식했다.
“즐비한 징집병을 활용하지는 않겠다, 현존 정예병들의 정원을 능가하는 인력을 새로 제공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욕심이오?”
병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전제에는 부정하지 않았던 조정의 신료들도 이런 과욕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감을 드러냈다.
“갑자기 삼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으는 건 무리지요.”
“모으는 건 둘째 치고, 어디에 수용하고 어떻게 먹인단 말입니까?”
“맞아요. 병조판서께서 무리를 하십니다.”
두서없이 나오는 반대들이 어전을 가득 메웠고, 나는 손을 들어 소란을 진정시켰다.
“호조판서는 어느 정도의 증강을 예상해 두었습니까?”
“……오천이라면 무리는 아니옵니다.”
어전이 재차 웅성거렸다.
산동으로 진출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증강은 필요했으니까.
혹 등래대원수를 토벌하게 된다면 본토를 수비하는 정예군을 빼내야 할 수도 있었다.
의견 청취를 계속하니 조정은 세 개의 무리로 나뉘었다.
각기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지하는 소수.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타협을 보자는 대부분.
하지만, 후자마저 제각기 내놓는 답안이 달랐고 깔끔한 타협은 요원해 보였다.
‘병조판서나 호조판서 어느 쪽도 무결한 정답이라곤 못 하겠지만, 어설프게 타협하려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군무를 이도 저도 아니게 한다면 군대마저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더욱이, 명확한 근거 없이 논쟁이 평행선을 달린다고 하여 무작정 중간값을 찍는다면 향후 전례를 의식해 전략적인 주장만 늘어날 터.
배울 만큼 배우고 늙을 만큼 늙은 사람들이 서로 양보할 것을 의식해 미리 질러대는 것처럼 보기 추한 것도 없다.
“논의가 좁혀지지 않고 과열만 하니, 내가 판단해야겠습니다.”
일방적인 선포였으나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호조판서, 병조판서.”
“예에.”
“예, 전하.”
“두 사람은 각자 주장의 근거를 마련해서 나와 의정부 앞으로 한 부씩 올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영상?”
“하명하시옵소서.”
“의정부에서 두 판서의 근거를 분석해 내가 판단에 참고할 수 있는 조언을 올려주세요.”
“받들겠사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허리를 꾸벅 숙였고, 그렇게 군사 증각의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김신국과 김세렴은 앞다투어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빼곡하게 담아 올렸고, 뒤이어 의정부에서도 그들의 고견을 보내왔다.
두 판서가 올린 근거들은 수치만 구체적으로 더해졌을 뿐, 지난 어전에서의 논의와 다르지 않았다.
호조판서는 예산의 빠듯함을 호소했고 병조판서는 군사 증강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의정부에서는 삼의정이 각자 장황한 분석과 여러 부연을 대며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왔다.
-의정부는 병조판서의 안을 지지한다.
축약하자면, 해외 영토가 존재하고 홍태주는 여전히 신용하기 어려운데 원정 전쟁까지 일으킨다면 군사의 증강은 불가피하다는 것.
병조판서의 근거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예병을 3만이나 증원하면 군비가 얼마나 오르지?’
그 대답은 호조판서의 수본手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최저한의 예산만 사용하는 지방군과는 다르게, 정예병은 더 많은 예산을 소모했다.
훈련의 강도와 주기가 늘어난 만큼 식사량도 많고, 군수품의 평상시 손망실도 크며, 녹봉을 지급할 장교진의 비율도 높았고, 설비의 신축 및 유지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탓이었다.
또한 정예병들에게 제공되는 다종다양한 군수품은 실전 상황에 즉시 대응할 것을 전제한 신식에 상품上品들이었다.
여기에 이 막대한 보급 수요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력 및 제반 사항을 조달하는 데도 또 비용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정원의 도합이 채 3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북방군, 수방사, 원정군의 예상만 지방군 전체와 비등했다.
‘여기에 정예병 3만이 늘어난다면 단순히 계산해도 군비가 반 배 이상 뛴다고 보면 되겠군…….’
증강 직후 소모될 설치비용과 호적에 올라 납세하는 장정 3만 명의 생산력까지 고려한다면 실질적인 국력의 소모는 더 클 터였다.
‘그냥, 비용을 두 배로 보는 게 편하겠어.’
이미 재정대비 군비의 점유율이 낮지 않았다.
이것이 두 배로 뛴다는 건, 국가를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추가적인 예산을 충당하려면 백성들을 더 쥐어짜거나, 아니면…….
‘또 빚을 지나?’
은행에는 체계적인 채무를 실현하는 힘이 있었다.
조정에 천문학적인 추가 채무를 지운다면, 당분간은 폭증한 군비를 감당할 수 있을 테지.
상평통보의 수요를 늘려 화폐 안착에 일조하는 미미한 장점도 있을 터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한다면, 조정은 빚쟁이 집단이 되어 은행에 예속되거나 종내에는 파산해버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신하들이 천한 상민들에게 예속된 상황에 자존심 상한다고, 이젠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배째!’하며 드러눕는 순간…….
‘그날로 상평통보는 쇳조각 행, 화폐 정책을 추진해온 조정의 신뢰도는 떡락, 백성들 사이에선 ‘정치하는 놈들을 믿은 놈이 병신’이라는 불신과 배신감이 파다하게 퍼지겠지.’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고 오리지널 인조의 치세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가 빚을 지는 건 편법으로 여겨왔는데.’
이 시대의 여러 국가가 이미 그렇고, 미래의 여러 국가가 또한 그렇듯 괜히 나라가 빚쟁이가 되는 게 아닌 듯했다.
마치 위태로운 경제관을 가진 사람이 으레 그러듯 미래를 팔아 현실에 투자하듯이…….
국가 역시 따서 갚으면 된다는 발상으로 빚부터 지는 것이다.
‘투자가 적절했고 필요했으며 결과까지 좋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땐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포기할까?’
그렇다고 무작정 포기하자니 저울 반대편에 걸린 건 고려 황금기의 부활이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조선의 두 번째 황금기는 화려할 수 있다.
일단 중원이 반분되어 남명이 존속에 성공한다면, 어떠한 세력도 조선을 막지 못하니까.
제국이 존속을 조선에 빚지고 의탁하는 상황이다.
무엇이든 못하랴.
단독으로는 제국을 감당할 수 없어 저울추로서만 중요한 입지를 가졌던 고려보다 더 대단한 존재감이다.
사실, 존재감이 대단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는 여러 세력이 혼란과 내전에 놓여 제 앞가림하기도 벅차기 때문일 뿐.
이때 명나라가 아예 망해버린다면 조선은 고립무원이 되고, 명나라가 단독으로 부활에 성공하더라도 우방답지 않게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지 않은 조선은 역시 고립무원에 놓인다.
막 발호한 오랑캐나 반란군의 무리와는 상식적인 외교가 불가능할 테니까.
빚을 안 지는 게 오히려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 털어먹을 놈도 없고, 내수사도 빠듯하다…….’
장고 끝에 내린 결정에 도움 된 건 의정부의 판단이었다.
* * *
“숙고 끝에 말씀드립니다. 병조판서?”
시립한 신하들 사이로 병조판서 김세렴이 한 발자국 나섰다.
“하명하시옵소서.”
“3만의 추가 병력이 최저한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거기서 2할을 감축해도 되겠습니까?”
“…….”
“군대의 질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상시에 최대한으로 무리한다면,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김세렴은 고민 끝에 답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니, 받들겠사옵니다.”
이쪽은 일단락이다.
내심 진땀을 뺐다.
김세렴에게 최저한이란, 막 부른 게 아닐 테니까.
거기서 2할 감축이라면 작지 않은 수치다. 3만 명 중에 6천 명 감축이니까.
‘……감당할 수 있으니 받아들였겠지.’
최저한을 밑돌게 된 감산이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김세렴이 말했을 터.
“호조판서?”
“예.”
대량의 군비를 지출하게 된 김신국이 편치 못한 얼굴로 나섰다.
“조정이 추가 대출을 받아야겠습니다.”
“……은행의 입지가 이미 작지 않사옵니다, 전하.”
“조정은 국내에서 가장 신뢰도 높고 안정적인 집단이며, 은행은 국가와 존망을 함께 합니다. 최저한의 이율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강요는 못 한다.
아무리 내가 세운 기관이라지만 은행이 땅 파서 돈을 만들어내는 집단은 아니니까.
신용화폐가 충분히 정착하지 않은 환경이라면 특히 그렇다.
은행에서도 수고롭게 대량의 투자를 받아내야만, 조정에 넘겨서 빚을 지울 수 있다.
그 고생을 양반이 노비 부리듯 무상으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내수사 또한 토지를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겠습니다.”
“……!”
신하들 사이에서 놀라움이 번졌다.
내수사의 토지는 곧 내수사의 밑천. 그동안 단 한 뼘이라도 매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초유의 투자에서 부담을 조정에만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으로, 기금을 모아 중원 진출에 쌀 한 줌이라도 보태고픈 이들에게도 도움을 받읍시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전하…….”
“매관매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대가도, 보상도 없는 단순한 기금일 뿐입니다. 내어준다면 가상하고 고마운 일이나, 그 이상을 약조해 줄 수는 없지요.”
안도한 이원익이 말했다.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이것이 공공의 일이니까요.”
기금을 많이 보태주었다고 공적 지위나 권력을 보장해준다면, 그게 나라에서 뇌물을 받고 보답해주는 것과 무슨 차이인가.
고맙다, 하고 받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대신 기금은 훨씬 덜 모이겠으나, 원래 쌀 한 줌이나마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치켜든 채 신하들을 향해 일렀다.
“제공, 이 모든 건 아조가 중원 진출을 앞둔 상황에서 가장 진보하고 강력한 군대를 신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축적한 모든 경험과 기술을 집약할 것이고, 정책과 행정력의 한계를 시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도전에 오점을 남기고픈 분은 이곳에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대조선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