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48화 (24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48화

평안도 안주목.

조선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많고 정예한 군대가 주둔한 이곳에, 선물이 내려왔다.

각자 선물을 받아든 병사들은 감상과 함께 소회를 드러냈다.

“이대로 퇴물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우리 손에 들어오긴 했네.”

고리형 마개가 달린 고정장치.

외부인이 본다면 용도를 궁금해할 이 부품은, 환도에 부착해두었다가 유사시 총검을 실현하는 용도였다.

그동안 총검은 수방사의 전유물.

간단한 부속으로 총기의 육박전과 대기병전 위력을 진일보할 수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이 기술의 유출을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이걸 왜 지금 나눠준대?”

한 북방군 병사가 자신의 환도에 부속을 장착하며 물었다.

“전쟁하나 본데.”

“어디랑? 말 타는 야만인들은 해결된 거 아닌가.”

이에 다른 병사가 끼어들어 답했다.

“저번에, 나라에서 산동을 먹겠다고 하지 않았냐?

“…명이랑 싸운다고?”

병사들은 저마다 술렁대기 시작했다.

“설마…….”

“명나라가 옛날 그 명나라냐. 지금 싸우면 우리가 이기지.”

“이봐, 명나라 땅덩이가 있는데.”

“안 그래도 그 땅덩이 주체를 못 해서 망해간다며?”

“한 입 하러 간다는 거네.”

잡설이 분분히 이어지던 가운데, 무관이 천막의 입구를 젖히며 들어섰다.

“……!”

놀란 병사들은 입을 닫고 일어났다.

“한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가던 것 같은데…….”

무관은 말채찍을 자신의 손바닥에 내리치며 덧붙였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나?”

이에 눈치만 한참 오가다, 최고참인 병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명나라와 싸우게 될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라…….”

무관은 재차 손바닥을 때리곤 답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

“조정에서는 명나라의 의향에 따라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중원, 산동반도의 패잔병 반란군을 토벌하게 된다.”

“……명나라의 반란군을 왜 저희가 토벌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너희가 이유 없이 이역만리 땅에서 피 흘리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명나라는 저물어가는 어제의 태양이고, 조선은 떠오르는 내일의 태양이다. 다 망해가는 명나라의 반란군을 대신 토벌해 준다면, 우리가 명나라에 요구할 수 있는 게 많겠지?”

“그렇습니다!”

“새로운 장비만 아니라 신병들도 계속 들어올 거다. 곧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워야 할 전우이니, 유의하도록. 이상.”

무관이 전언을 마치고 천막을 빠져나가자 병사들은 그새 기가 빨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진짜 명나라로 가겠네.”

* * *

보름쯤 지나 안주목에 새로운 무리가 찾아왔다.

비사성에서 배를 타고 청천강으로 들어온 이 무리는, 원수 이완과 그가 이끄는 원정군 군사들이었다.

장차 안주부에 충원될 신병들을 북방군과 함께 교육할 고참들.

이들 원정군은 생소한 해외 영토에서 현지 도적들이 수시로 걸어오는 기습에 숙련되어 있었으며, 미개척지에서 시설을 급조하고 수축하는 것에도 경험이 많았다.

산동이라는 또 다른 해외 영토로 진출할 신생 정예군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교훈이었다.

그리고 북방군 도원수 정충신과 원정군 원수 이완이 만나 회포를 나누고 전략을 구상하는 동안, 아래에서는 병사들이 각자 소속부대의 고생과 성과를 과시하며 친목을 다졌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쯤 지나, 또 새로운 무리가 안주목에 합류했다.

이번에는 수방사의 고참들이었다.

홍태주가 회심의 수단으로서 난전 중 우회시킨 팔기군 정예를 한양에서 격퇴한 주역들.

일부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사각방진을 구성했던 자들이었으며, 일부는 오합지졸 징집병을 가장하여 목숨을 걸고 팔기군을 방진 안으로 끌어들인 자들이었다.

총검이라는 생소한 무기로 무장하게 될 신생 정예군에는 이 또한 배워야 할 전투였다.

수방사 고참들만 안주목으로 합류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에서 막 모집한 신병들도 인솔해 왔다.

조선군의 화려한 신화를 멀리서 전해듣기만 하다, 각 부대의 고참 앞에 서게 된 신병들은 맹수 앞의 피식자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야, 신참아.”

“예, …예!”

“너는 북방군, 수방사, 원정군 중에 어디가 제일 약해 보이냐?”

“예?”

* * *

명나라 북경.

조선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례감 태감 왕정민의 전언은 명나라의 뭇 위정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소식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만큼, 소문은 금세 북경 전체로 퍼져나갔다.

학사들은 조선의 제안을 두고서 이렇게 다퉜다.

-변방의 일개 왕이 황제의 거처를 좌지우지하려 들다니, 이건 무례한 월권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조선에서 명분을 만들어주었으니 지금이라도 황제의 처소를 옮겨야 한다!

북경은 세 세력에게 동시에 포위되고 있었다.

북서쪽 섬서성에서 발호한 틈왕 왕가윤의 농민 폭도 무리.

남서쪽 사천성에서 발호한 나전왕?甸王 안방언安邦彦과 대량왕大梁王 사숭명奢崇明의 오랑캐 무리.

정남쪽 산동성에서 발호한 등래대원수 진광부의 반란군 무리.

정북쪽 만리장성 너머는 북원의 분열 후 생겨난 몽골계 부족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고, 북동쪽 요동은 홍태주의 금나라가 꼴깍 삼킨 뒤 입을 닦아버렸다.

육상에서는 명나라가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게된 셈이다.

이외에는 땅이 연결된 곳도 없어, 그나마 있는 퇴로라곤 동쪽 바다 발해만을 거쳐 남명으로 피신하는 것뿐이었다.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은 형세.

또한, 최전선의 장수와 관리들 역시 이어지는 내전에 하나씩 패사하고, 항복하고, 귀부하면서 포위망은 이 순간에도 확실하게 조여들고 있었다.

-조선의 제안에 응하면 국체도 보전하고, 산동의 진적陳敵도 격퇴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아니냐?!

-내란한 무리들이 사분오열하거나 서로 싸울 수도 있는데, 옆에서 권했다고 스스로 북경을 무너뜨리자는 말이냐?!

학사들의 다툼이 이러했다면, 명나라의 조정을 양분한 엄당과 동림당은 다른 관점에서 대치했다.

-조선 왕이 한 말 중에 한 마디 틀린 것 없는데, 고집스럽게 북경을 수호하다 폐하가 역적들에게 떨어질 위기를 자초하자는 말이냐?

조선의 제안을 가져온 사례감 태감 왕민정부터 엄당의 중진이기도 했지만, 엄당은 이전부터 황제를 끼고 부와 권력을 방탕하게 남용해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북경을 버리고 황제와 함께 남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림당은 달랐다.

-조선의 왕이 바보 멍청이도 아니거늘, 강대한 역적 무리를 어째서 대국을 대신해 토벌해준다는 말이냐? 여우를 내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다!

동림당은 애초에 남경 천도는 논제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충신들이 분전 중이거늘, 안에서부터 수도를 버리니 마니 떠들어대는 건 전의를 저하하고 충신들을 배신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논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림당의 이러한 노력에도 천도설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권력과 끈이 닿고 먹물깨나 맛보았다는 작자들이 공공연히 조선의 제안과 천도를 두고 떠들어대었으니, 통제가 될 리 없었다.

-황제부터 북경을 버리니 마니 할 지경이라는데 남아 있으면 우리만 끝장이다!

-벌써 병사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북경이 위험하다는 증거다!

-여러 장원의 주인들이 간밤에 내뺐다더라!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도망치고 있다!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우려들은 진실과 거짓이 무분별하게 뒤섞인 채로 왜곡과 재생산을 거듭했다.

그리고 우려는 단 며칠 만에 여론을 능가해 광기에 가까워졌고 주민들은 엄격한 통제에도 갖은 수단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북경을 탈출해나갔다.

황도는 그렇게 생기를 잃기 시작했고, 명나라 조정은 결단을 강요받았다.

* * *

산서성山西省의 중심지 태원太原.

중원 역사상 여러 세력에서 요충지로 군림했던 이 도시에도, 제국의 망조와 함께 불청객들이 몰려왔다.

틈왕闖王 왕가윤王嘉胤과 그를 따르는 농민군 무리였다.

그들 앞에는 태원의 군사와 주민들이 집결한 평요성平遙成이 있었다.

평요성은 높이만 12m에 달하는 석제 성곽이 장장 6.4km나 이어진 거성.

그러나 그 거성의 맞은편에는 제국을 뒤엎고자 몰려든 십만여 명의 농민군이 있었다.

어느 쪽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폭풍전야와 같은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농민군의 대오에서 한 기병이 평요성의 대문 앞으로 달려왔다.

히히히힝!

기병은 자신을 겨눈 무수한 활시위들 앞에서 고삐를 잡아당겨 멈춘 뒤, 태평하게 말을 달랬다.

그리고 그 또한 활과 화살을 챙겨 빼들었다.

성벽 위 관군들 사이에서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더욱 매서워졌으나…….

누각에 선 겸병부상서 홍승주洪承疇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쏘지 마라.”

홍승주의 단호한 명령이 전해지고, 관군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활을 내렸다.

그 광경에 농민군 측 기병은 반대로 활을 들었다.

위협적인 광경이었으나, 겸병부상서의 지시에 누구도 나서지는 못했고 곧이어 활시위가 튕겼다.

쐐액!

홍승주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든 화살은, 그가 서 있던 자리 바로 옆 기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박혀들었다.

여러 사람이 기함하는 동안 홍승주는 화살을 뽑았고, 그것에 매인 쪽지를 풀어 전언을 읽었다.

-틈왕이 친히 전한다.

-천하의 질서가 새롭게 세워져 낡은 명나라가 쇠하고 대순大順이 부흥하는 것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과 같으니, 어찌 인명의 힘으로 거역하겠으며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고자 하는가?

-홍승주는 나의 관대한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과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라.

-그것이 하늘과 나에게 죄를 덜 짓는 유일한 방법이다.

“흥.”

쪽지를 일독한 홍승주는 조소와 함께 생각했다.

왕가윤은 그저 반란한 말단 지휘관에 불과한데, 말하는 것이 제법 그럴싸하고 필체가 유려한 걸 보아 먹물 좀 먹었다는 작자가 염치도 없이 들러붙은 듯하다고.

홍승주도 인명을 낭비하고 피를 흘리는 건 원치 않았다.

제국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아 시시각각 꺼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중이다.

어찌 내란을 지속하여, 이 나라의 위기를 자초하겠는가.

그러나 각지에서 발호한 역도들은 대명에 망조가 들었다는 말이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듯 급격히 덩치를 불리고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하니, 적어도 이들에게는 대명의 평화와 안위에는 관심이 없음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태원은 산서성의 중심이며 이 너머에는 북경이 있다.

자신이 항복하여 이곳이 넘어가게 된다면, 저 달아오른 역도들을 황제의 앞까지 안내하는 꼴이 될 터.

신하 된 도리로 그럴 수는 없었다.

홍승주는 지평선까지 시커멓게 깔린 역도들을 향해 자신이 일독한 쪽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만하면 역도들이 보았을 법하다 싶었을 때, 당당하게 쪽지를 부욱부욱 찢어 허공에 흩날렸다.

바람이 일순 멎었고.

“하하하하하!”

지평선 너머에서 누군가 쩌렁쩌렁 웃어댔다.

곧, 개미 떼처럼 무수한 농민군이 성을 향해 몰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