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49화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지진과 같은 인마의 질주가 대지를 울려댔다.
그러나 기세만으로 거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는 법.
왕가윤은 이를 알고 있었고, 즐비한 농민군들 사이로 거성의 성가퀴를 마주할 정도로 높은 공성탑이 함께 진격했다.
장정 수백 명이 안팎에서 공성탑을 밀어내는 동안, 관군의 이목을 분산하기 위한 사다리 또한 성벽에 놓였다.
농민군은 악착같이 기어올랐고 관군은 악착같이 저지했다. 창칼이 교차했고 시체가 추락했다.
공성탑에는 기름단지가 던져지고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몇몇 공성탑은 아래까지 흘러내린 기름에 농민군들이 대피했으나, 일부는 그렇지 않았고 화염에 휩싸인 방패 겸 발판이 성가퀴를 때리자 무수한 농민군을 토해냈다.
“밀어붙여라!”
“막아라!”
필사적인 면상을 한 무리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장정들이 비명 지르고, 토해내고, 붙들고, 베는 동안 질척하게 흘러내린 피는 성벽 벽돌의 홈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것이 성벽 아래 거리에 닿아 웅덩이를 이룰 즈음.
난전을 틈타 일부 농민군 또한 성 안으로 내려왔고, 거리에서는 성문을 열고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혈전이 벌어졌다.
* * *
최초의 공방은 관군의 승리로 귀결했다.
왕가윤의 농민군은 숫자와 기세 모두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조직적인 관군 앞에서는 한계가 분명했고, 싸움이 길어지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평요성 안팎으로는 밥 짓는 연기가 물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졌고 노을빛은 스산하게 왜곡됐다.
그 가운데 평요성 깊은 곳 안쪽에서는 겸병부상서 홍승주가 긴장한 장수들 앞에서 눈을 감았다.
원래 역사에서는, 왕가윤의 뒤를 이어 농민군을 이끌게 된 이자성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홍승주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와 함께 많은 사건이 달라졌고 대체로 홍승주에게는 유리한 편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온 한 사신의 영향이 컸다.
그동안 엄당은 황제를 낀 채 금의위, 동창을 거느리고서 권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는 한 외부인에 의해 흔들렸고, 어렵사리 이 불청객을 쫓아낸 엄당은 유출된 부와 흔들린 권력을 전보다 더 공고히 쌓고자 했다.
이때 지방군이 유탄을 세게 맞았다.
엄당의 태도가 더 악착같이 바뀌어, 예산은 착복하다 못해 알아서 먹고 살라는 식이 되어버렸고 지방관을 향한 견제와 강압도 심해졌으니까.
이 조처로 여러 유능한 지방관이 사직했다.
일부는 아예 역도들과 결탁해 버렸다.
지방이 자멸에 가깝게 파죽지세로 무너지는 동안, 반란군들의 기세가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듯한 비결이었다.
‘……양학楊鶴이 옳았나?’
양학은 홍승주가 섬서총독을 지낼 당시의 전임이었다.
홍승주가 섬서총독 이전에는, 그 휘하인 연수순무를 지내기로 했으므로 양학은 상관이자 전임이기도 한 셈.
그런 양학의 반란에 대한 입장은 위무慰撫였다.
부모가 자식이 대들 때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로하고慰 어루만져撫 주기도 하는 것처럼 폭도들을 그리 대해준 것이다.
홍승주는 전자에 속했다.
이반하는 무리를 잘 대해준다면 밑도 끝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제국은 쇠락했고, 수뇌부는 썩어가는 중이다.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잔불을 남겨두지 말고 짓이겨버리는 게 최선이다, 홍승주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유화책은 실패했다 판단한 조정에서는 양학을 파직하고 홍승주 본인을 총독에 이어 겸병부상서에 제수하고 반란 진압을 명하였으나 결과가 시원찮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도탄과 비탄에 빠진 백성들은 밟을 때마다 납작해졌지만 이내 더욱 크게 들고 일어났다.
그 결과가 왕가윤의 십만 대군이었다.
“대인.”
홍승주의 고뇌가 이어지자 침묵을 견디다 못한 한 장수가 입을 열었다.
이에 홍승주가 눈을 떴고, 장수는 흠칫하면서도 마저 말했다.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야음을 틈타 역도들이 기습을 벌이거나, 안에서 내통하는 자가 소란을 피울 수 있으니 경계를 그치지 말게.”
나름의 지침이었으나 장수들은 떨떠름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야,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서 하달할 지침치고는 너무 뻔했으니까.
불편하리만치 길었던 홍승주의 고뇌와 그 끝에 나온 지극히 건조한 지시는 뭇 제장들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연 무슨 고민을 했기에 끝내 뻔한 소리가 나왔을까.
그러나 지침은 정론이었으므로 이견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장수의 떨떠름한 수긍에 홍승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일렀다.
“해산하시게.”
“예.”
의자 밀어내는 소리가 겹쳤고, 장수와 관리들은 홍승주에게 예를 표한 뒤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동안에도 홍승주는 눈을 감은 채 저만의 고뇌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회의실을 빠져나간 장수와 관리들은 밖에서 저마다 우려를 표했다.
* * *
그리고 며칠 뒤.
그간 접전을 거듭한 관군은 숫자와 사기 모두 치명적으로 하락해 있었다.
시체를 매장할 장소가 없었고, 성 밖으로 내버리기엔 이미 사기가 치명적이었으므로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다.
성 내에 버려진 집이 즐비했으므로 땔감을 구하는 건 쉬웠다.
공터마다 거대한 제단이 세워졌고 땔감과 뒤섞여 켜켜이 뉜 시신들 사이로 화마가 피어올랐다. 밤하늘보다 더 시커먼 연기가 흩날렸다.
홍승주는 지쳐 먼저 잠들었던 장수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대인.”
전날 그 자리에 같은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나, 빈자리가 많았다.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도망쳤으리라. 홍승주는 훗 코웃음쳤다.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장수와 관리들의 낯짝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혈전으로 인해 심신이 모두 한계에 다다른 자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깨워져 소집된 게 유쾌할 리도, 기운찰 리도 없었다.
“제공들은 이 전투의 승산을 어떻게 생각하나?”
장수와 관리들이 당혹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평소 같았다면 눈치를 더 보았겠으나, 지금은 다들 너무나 지쳐 있었고 누군가는 인내심을 발휘할 여력조차 없었다.
“필패입니다.”
“그런가.”
“운이 좋으면 내일은 버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다음 날은요? 그리고 그다음 날은요. 우리는 기약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음.”
“북경에서 지원이라도 온다는 보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홍승주가 반란 진압을 명받으며 최초로 데려온 소수의 군사를 제외하면 지방은 그동안 북경에서 어떠한 물적 인적 지원도 받지 못했다.
태원이 포위된 지금이라고 딱히 다를까.
“저는 회의적입니다.”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장수와 관리 중 회의적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건, 신하 된 의리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를 버리거나 역적들과 결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충절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예로부터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충성하는 대상이 자신의 충성을 미련으로 폄훼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의기를 시험받을 수밖에 없었다.
죽지 않고 성을 탈출한 자들은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한 자들이었고, 아직 버티는 자들은 마지 못해 있을 따름이었다.
후자에 속하는 이가 말했다.
“……뻔한 대답 외에는 딱히 드릴 말씀도 없는데, 어째서 승산을 물어보셨습니까?”
“그대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네.”
홍승주도 지금 상황이 한계라는 건 알았다.
저항을 지속한들 하루나 이틀은 더 버틸까.
군사와 물자는 처음부터 부족했고, 평요성이 아무리 대단한 성일지라도 성에서 사람이나 군수품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평요성의 방대한 둘레를 다 지키지 못했던바.
그때보다 병력이 더 줄어든 지금은, 왕가윤이 정면공세의 미련을 버리고 사방의 해자부터 메우는 것만으로 평요성은 쉽게 공략될 수 있었다.
왕가윤의 책사들 또한 그 방법을 제안하고 있을 터.
“……그대와 군사들은 생명으로 충절을 증명하였네. 그런 자네들을, 이곳에서 모두 죽이는 게 대명이나 후대에 이로운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
홍승주의 회의적인 발언에 다른 장수가 말했다.
“대인께서 약한 소리를 하시면 저희와 병사들은 무엇을 믿고 싸운단 말입니까?”
장수의 책망에 몇몇은 공감하였으나, 대부분 멋쩍게 헛기침을 흘렸다.
홍승주의 지도와 노력이 무가치하진 않았다.
열세의 병력과 부족한 물자에도 파도처럼 몰아치는 왕가윤의 무리를 지금까지 지연시켜 왔다.
홍승주가 겸병부상서에 제수되어 반란 진압을 명 받은 이래, 그의 지휘하에 벌어진 굵직한 전투만 수십 번.
그때마다 홍승주는 매번 전략적 승리를 취해왔다.
단지 지금은, 더 물러나 계속 싸울 곳이 없을 뿐이다. 여기가 막다른 골목이다.
“왕가윤의 무리가 성을 포위하고 있긴 하지만, 접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저 엉성하게 모인 무리에 불과해.”
십만 여에 달하는 농민군 모두가 병사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싸움에 가담하는 자는 일부.
나머지는 예비대에 보급부대에 불과하다. 무장했는지마저 불분명하며, 전투력은 당연히 전무.
“새벽에 빠져나간다면 포위망을 뚫는 건 어렵지 않을걸세.”
“성을 버리고 탈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대인답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자네들이 여기서 전부 죽어버리면, 대명과 후대는 누가 책임지겠나?”
적어도, 북경의 위정자들은 아니었다.
태원이 지척이라곤 할 수 없어도 그동안 북경에서 지원의 의향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지원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병사고 물자고 번듯한 지원 한 번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저러다가 바다를 통해 남경으로 탈출할 게 뻔했다. 육로는 막혔으니까.
좋게 보아도, 충성의 대상은 될지언정 몰락해 가는 명나라를 받칠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성이 함락될지라도, 누군가는 대명을 위한 불씨를 지켜나가야 하네. 그걸 그대들이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대인께서는요?”
“내가 성을 버리고 탈출하면, 황상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면목이 없지.”
관군이 성을 버렸다는 말만 나돌아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성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는 사실 또한 전해져야 했다.
그래야 백성들이 마음 한구석에나마 희망을 품을 테니까.
장수들 사이에서 시선들이 오갔다. 적잖게 내적으로 고민하던 자들이었으나, 막상 홍승주가 다 내려놓은 듯 출성을 권유하자 되려 껄끄러워진 것이다.
홍승주는 그것으로 족했다. 성을 나가라 했다고, 좋다며 우르르 뛰쳐나갔다면 그것대로 허탈한 광경은 없을 터.
고민해 주는 걸 보니 다들 적잖이 미련이 있는 듯했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이들 중 누군가는 진지하게 대명의 불씨를 지켜나가지 않겠는가.
“지시를 내려야겠군.”
“…….
“밤 3경更이 되면 군사들을 이끌고 성을 탈출하게.”
홍승주의 명령에 장수들은 코로 한숨을 토해내며 끄덕였다.
* * *
그날 새벽.
수십 기의 기병과 중무장한 정예 수백이 평요성의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섰다.
“병부상서!”
선두의 사내가 생김새만큼이나 호방하게 외쳤다.
그는 홀로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겸병부상서 홍승주를 똑바로 마주했다.
허리를 숙여 팔을 뻗는다면 그대로 멱살이 잡힐 거리.
그럼에도, 홍승주는 기세등등한 왕가윤의 무리 앞에서도 일말의 주눅도 들지 않은 채였다.
왕가윤이 말했다.
“잘도 귀찮게 굴어주었어! 간밤에도 말이야! 병부상서라는 직책이 아깝지가 않아!”
“역적의 죽음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왕가윤은 주변의 무리와 함께 대소하고는 물었다.
“네 충절이 가상하니 기회를 주마. 북경의 비렁뱅이들이 아니라 내게 충성을 바침이 어떻겠느냐? 대순大順의 병부상서 자리를 주마!”
“……하하하!”
홍승주는 대소하고는 들고 있던 횃불을 옆으로 휙 던졌다.
왕가윤이나 그의 무리에겐 급작스럽긴 했으나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행동이었는데, 결과는 아니었다.
횃불이 성문 안쪽에 한가득 쌓아둔 화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횃불을 따라간 왕가윤과 그의 수하들의 눈동자에 검은 흙더미와 격돌하며 솟구치는 폭염이 일순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