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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50화 (250/380)

인조, 명군이 되다 250화

생기를 잃은 북경, 가장 깊은 곳에서.

“평요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평요성이라면, 태원도 역도들에게 넘어간 꼴 아니요?”

“허어어……!”

태원은 산서의 성도省都이고 산서는 북경의 일대인 북직예와 맞닿아 있었다.

이곳이 적에 넘어갔다 함은 진정으로 적이 지척에 다다랐다는 뜻.

“홍승주가 평요성을 끼고도 역도들을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무능합니다!”

한 대신의 탄식에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그래도 참작할 여지는 있어요. 죽기 전 수괴 왕가윤 및 그의 부하들과 함께 폭사해 여럿을 죽였습니다.”

“허황한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역도들의 무리가 와해하지 않고 계속 몰려든단 말입니까?”

신하들이 보고와 소문의 진위를 두고 시끄럽게 웅성대는 동안, 용상에서는 천계제가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홍승주는 죽고 역도들은 지척에 다다랐다고……?’

조선에서 사신이 내방하였을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정무다운 정무를 본 적이 없고 각오다운 각오를 품어보지 못한 천계제였다.

그야 엄당과 동림당이 모두 황제를 황제로 보지 않고 국사國事를 전횡할 수단으로만 여겼으니까.

그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두 당파에 있어 황제란 용상의 방석을 데우며 더 강대한 당파를 위해 손들어주는 존재일 뿐.

하지만 이제는, 망국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어버렸다.

‘도망치고 싶구나!’

천계제는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용포 자락을 틀어쥐었다.

부담감 속에서 조용히 헐떡이는 그에게, 한 대신이 물었다.

“폐하. 이제는 결단을 내려주셔야 하옵니다. 지금이라도 남경으로 이어하시지요!”

“이어라니! 당장 북경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거늘 백성과 수도를 버리자는 거요?!”

“태원과 평요성이 함락되었으면 이미 북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소! 폐하!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저 나약한 겁쟁이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시옵소서!”

“뭐라!”

어전이 극렬하게 소란스러워졌고, 황제를 존중하지 않는 두 당파는 흥분한 가운데 솔직한 심정을 내비쳤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허리를 숙이라는 거냐!”

“그래! 인명을 구걸하고자 환관 따위에게 이미 허리를 숙인 네놈들 아니냐?!”

언쟁이 극렬하게 이어지는 동안, 천계제는 심경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의 자리에 절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명은, 백성들은 더 나은 황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 또한.

하지만 엄당과 동림당이 이를 원치 않았다.

황제 이상의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자 아귀다툼을 반목하는 이들에게는, 유능한 황제란 경쟁자이자 압제자에 불과했으니까.

‘짐이 암군이라면, 이들은 사신邪臣이다.’

그리고 무능한 군주와 간사한 신하들은 나라에도, 백성들에게도 필요치 않는 법…….

천계제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래간만의 각오였다.

여전히 격렬한 언쟁이 이어지는 어전에서, 황제는 최후의 의지를 내비쳤다.

“대신들의 의견이 저마다 달라 합의는 내지 못하고 격론만 오가는구나.”

허락되지 않은 황제의 발언에 대신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목을 모았다.

소속은 다를지언정 하나같이 불충하기 짝이 없는 낯짝들이다.

다시금 각오를 다진 천계제가 말했다.

“북경을 버릴 수도 없고, 후일을 기약하지 않을 수도 없다면, 이는 어떠한가? 내 동생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을 황태제로 책봉하여 남명으로 보내는 것이다.”

“……!”

황태제를 책봉한다는 건, 황제가 자신의 후사를 포기하고 동생에게 황위를 넘겨주겠다는 뜻이었다.

흔치는 않은 일.

그래서 대신들은 만의 하나로서 생각하면서도 현실성은 크게 치지 않았다.

황제가 후사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으니까. 비록 모두 요절했다지만, 황비와 후궁들 사이에서 거듭 자식을 보기도 했다.

“폐하의 춘추가 아직 적고, 보체寶體가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빛깔처럼 창창한데, 어찌하여 황태제의 책봉을 서두르십니까?”

“그러하옵니다. 신들에게 불충을 명하지 마시옵소서.”

천계제는 내심 조소하며 말했다.

“나라는 위급한데 국본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으니, 어찌 후사를 마음에 두겠는가. 오롯이 후일만 염려할 따름이다. 책봉식을 준비하라.”

천계제가 답지 않게 고집을 피우자 대신들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주판알이 굴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후일을 염려한다는 명분은 강력했다.

그런데도 황제의 억지에 무리하게 맞섰다간, 경쟁 당파에 불충한 무리로 낙인찍힐 수도 있을 터.

대신들은 서로 거듭 눈치를 보다가 수긍과 함께 답했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 * *

신왕 주유검은 천계제 주유교朱由校의 이복동생이었다.

위로 형들이 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

“많던 형제 중에 오직 나와 너만이 남았구나.”

천계제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맞은편에서는, 책봉식을 앞두고 궁궐로 불러진 주유검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폐하…….”

“가까이 오거라.”

주유검이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나아갔고,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천계제가 단호하게 명했다.

“더 가까이.”

“…예.”

“가까이.”

천계제는 주유검이 마지 못해 용상의 계단을 올라, 코앞까지 다가온 뒤에야 만족하고서 일렀다.

“동생아.”

“예….”

“내 일생에 한이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예기치 않게 황제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되어서도 이 나라를 받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

“내가 자격도 자질도 없어 기껏 황위에 오르고도 해낸 바가 없어 죽어도 열성께 낯을 들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 네가 나를 대신해 내 몫까지 다해준다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천계제의 말에 주유검이 씹고 있던 입술을 놓으며 말했다.

“만세를 사셔야지요……. 어찌하여 듣기 황송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천계제는 그동안 세 명의 아들을 봤다.

매번 기대가 많았고, 사랑 또한 컸다. 자신이 황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성군의 그림자가 되기를 각오했다.

하지만, 세 아들은 이른 황태자 책봉이 무색하게도 모두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때마다 천계제는 자신의 가슴이 찢어졌다.

“자식을 잃어 모로 찢어지고, 부끄러운 치세가 이어져서 외로 찢어졌다. 그것이 세 번쯤 반복되다 보니 심신이 한계까지 고달파져, 식음이 모래를 씹고 삼키는 듯하고 호흡은 쓰리며, 말과 음악이 모두 고막에 거슬리게 되었구나.”

이런 마당에 제국은 쇠락하다 못해 스러지고 조정에서는 사신邪臣이 창궐했다.

“내가 공사公私로 압박을 못 이겨, 정신은 밝지 못해 희끗거리고 생은 타오르지 못해 버석거리니, 일생의 종식을 분명히 예견할 수 있구나.”

“폐하…….”

주유검은 황제에게 애석함을 느꼈으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천계제였다.

“그러나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천계제는 직전의 무기력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분명한 의지를 담고서 말했다.

“내가 비록 황제로서는 부적합했으나 마지막까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천계제는 지척에 놓인 주유검의 멱살을 움켜쥐고서 끌어당겼다.

저도 모르게 끌려온 주유검의 곁에서, 천계제가 속삭였다.

“책봉례는 함정이다.”

“……!”

“내가 갖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책봉례를 지체할 것이야. 그동안 너는 대보大寶와 다른 옥새를 가지고 남경으로 피신해라. 인신印信과 조서는 모두 황후에게 맡겨놓았다.”

“폐…….”

“떠날 때 항구에 불을 질러라. 간사한 신하들이 너를 뒤따라 남경과 대명의 나머지 절반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

엄청난 완력과 기세를 보인 천계제였으나, 그새 기력이 바닥났는지 숨을 헐떡였다.

잠시 호흡을 고른 천계제는 짜내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조선에 이를 알려서 도움을 받아라. 적을 하나라도 줄여야 대명이 살아남을 수 있고, 내가 열성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다. 알겠느냐?”

“……예, 폐하.”

천계제는 주유검의 멱살을 놓으며, 파리해진 안색으로 헛기침을 거듭했다.

“커흑, 커흑, 커흑…….”

“폐하!”

“후우우우…….”

천계제는 질색한 얼굴로 손을 휘젓고는 일렀다.

“내가 황제로서 내리는 마지막이자 전부인 명령이다. 배반하지 말아라.”

“예…… 폐하… 형님.”

“흐흐. 흐흐흐.”

천계제는 실실 웃고는 마저 손을 저었다. 주유검은 그런 황제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 *

조선, 한양.

비대해진 국가의 체급과 격동하는 중원의 정세를 의식한 해동성국海東盛國은 군사의 강화를 주문했다.

그 결과 당초 계획의 삼분지 이에 달하는 병력이 안주부에 충원되었으며, 각 정예부대의 맹훈련을 받으며 강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덕분에 나라의 등골은 절찬리에 휘는 중.

왕마저 사비를 털다 못해 밑천까지 떼어가며 비용을 대고 있으니 당연했다.

“마지막 3기 신병의 충원을 서둘러 주시지요.”

병조판서 김세렴.

“명에서 의지를 아직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는데, 어찌 군사의 충원을 서두르라는 말입니까?”

호조판서 김신국.

“홍태주가 출정은 언제쯤 할 것인지 다시금 채근을 해왔습니다. 군대를 먹이는 비용이 작지 않다면서, 군량을 지원해 줄 게 아니라면 서둘러 달라는데 어찌 전해야겠습니까?”

예조판서 남이공.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은 우리도 적지 않소이다. 게다가 그간 충원한 일만 육천의 병력만으로 안주목의 식량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소. 덕분에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지급할 품삯이 잔뜩 늘었단 말이외다.”

공조판서 김류.

“내가 상임감사로서 은행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어 하는 말인데, 은행에서도 예치금을 한계까지 털어내서 더는 대출이 불가능하다는군!”

병조참판 이귀.

“전하, 세금을 더 거두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우의정 이상의.

“이미 세법을 바꾸어 차례대로 적용하고 있거늘, 또 세법을 바꾼다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외다.”

좌의정 박홍구까지.

중신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두들 적어도 한 가지만은 동의했다.

“군사를 더 충원하건, 충원하지 않건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명나라에서 먼저 분명하게 의지를 표명해주어야 하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마저 덧붙였다.

“하온데 명나라에서는 도움을 제안한 지 반 년이 지난 지금, 봄에 파종한 낱알이 싹을 틔우고 자라 열매를 맺은 지경에도 명확하게 의사를 드러내지 않으니, 이렇게 의견이 분분해진 것이옵니다.”

이에 좌의정 박홍구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아조의 관대한 제안에도 다 망해가는 제국이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않으니, 이는 성국盛國을 무시하는 처사이옵니다! 차라리 당초 계획대로 군사를 마저 증원하고, 그 군사로 북직례北直?를 쳐서 그 땅을 아조의 것으로 삼음이 어떻겠사옵니까?!”

극단적인 발언이었으나, 다들 신식군 건으로 날이 잔뜩 선 만큼 나서서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박홍구의 의도 또한 정말로 북직례를 쳐서 북경을 함락시키고 황제 목도 한 번 잘라봐야지, 가 아니라 이놈들이 묵묵부답인 게 이토록 화가 난다는 성토에 가까웠다.

‘그건 나도 공감하지…….’

지금 들어간 밑천이 얼마인데.

왕 역시 조선의 번영을 위해 적잖은 투자를 했으므로,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의지를 태울 땔감을 주지 않는 명나라의 태도에 적잖이 노해 있었다.

그때였다.

“전하.”

뒤에서 슬쩍 들어온 최 상선이 쏠리는 이목에도 개의치 않고 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방문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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