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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51화 (251/380)

인조, 명군이 되다 251화

조정의 논의를 종식할 인물이 찾아왔다.

“소관, 남경예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이라 하옵니다.”

사신의 소개에 뚱했던 여러 사람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예부상서는 조선의 예조판서에 해당하는 장관직.

남경南京, 이라는 수사가 붙은 건 명나라 관제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명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제국 수도를 기존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인 북경으로 옮기면서 남경에도 관직 일부를 복제해 남겨놓았다.

이것이 일부만이 아니어서, 행정조직인 육부六部는 물론 군사조직인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와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까지 남경에 따로 설치됐다.

이들 남경 조직은 품계와 수행하는 역할마저 북경의 조직과 동일했다.

그나마 다른 점은, 황제 휘하인 북경 조직보다 권한과 정원이 더 적다는 정도.

‘양립하는 두 수도마다 각기 존재하는 행정조직을 통해 광대한 제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황제가 수도를 다시 남경으로 천도하거나 유사시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한 셈이지.’

황제와 북경이 위험에 처해 제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남경에서 임시로나마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남경의 예부상서가 조선을 방문한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로군…….’

용상 좌우로 시립한 중신들 또한 왕과 똑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시선만이 진중하게 뒤바뀔 따름이었고,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남경예부상서 사가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 국왕께서 지난날 제안해 주신 관대한 도움에는 황제 폐하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조정이 혼란하여 오랫동안 의견만 분분하였으므로 지금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 찾아와 이런 말씀을 주신다는 건, 조정에서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겠지요?”

“그러하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북경의 황제가 무엇을 각오하고 희생했는지를 모두 전해 들은 사가법은, 내심 탄식하고는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차마 황도와 백성을 버리지 못하시어 천도에 분명한 뜻을 밝히지는 않으셨으나, 대신 신왕信王을 황태제로 봉하고 대보大寶와 기타 인신을 맡겨 남경으로 보내셨으며, 또한 황태제에게 반드시 조선 국왕께 도움을 구할 것을 전교하셨사옵니다.”

황제가 비록 직접 처소를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대명의 존속을 위해 조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일개 국왕이 간하였는데 폐하께서 이토록 진중하게 응해주시니, 내가 부끄럽고 민망할 뿐입니다.”

“천하에 폐하의 충신이라고는 조선 국왕밖에 없는데, 폐하께서 어찌 진중하게 응하지 않으시겠으며, 또 전하께서는 부끄러워하시옵니까.”

사가법은 조선 왕에게 분명 복안이 있다고 확신했다.

가장 가시적인 건, 대명이 장강 이북을 포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명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북경을 어찌 조선이 대신 지켜주랴.

그저 조선의 이러한 복심 끝에 무슨 의도가 있을지 염려할 뿐이고, 이런 표면적인 충성조차 북경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래서 사가복 자신이 조선에 온 것 아닌가.

최악을 모두 제하고 나니, 남은 동앗줄이라곤 이국의 음흉하기 짝이 없는 군주만 남아버린 것이다.

“황태제께서는 대국의 답변이 늦어진 데 사과와 유감을 표하셨으며, 대국을 위해 힘 써오신 전하의 공로에 사의謝儀를 표하고자 은 5만 냥을 반사頒賜하셨습니다.”

이만하면 무소식에 대한 사죄는 되겠느냐, 그렇다면 당초 약조대로 등래대원수를 무찔러 달라는 황태제의 부탁이었다.

‘대가치고는 좀 적군…….’

은 5만 냥은 통상적으로 쌀 10만 섬에 해당한다.

그리고 곡식 한 섬은 장정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분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근 3만 여를 징발하여 정예군으로 조련하고 원정까지 계획한 조선에 딱 밥값밖에 안 되는 수치였다.

그나마 그 밥값으로도 사의나마 표한다는 게 고마운 일일까.

‘광해군 때는 밥값도 못 줬으니.’

살이호지전 패전 이후, 명나라에서는 위로와 수고로움을 치하할 목적으로 고작 은 1만 냥을 전달했으니까.

그때보다 명나라의 사정이 더 안 좋아진 지금, 출정의 대가가 다섯 배가 되었다는 건 가상한 면이 있었다.

‘사정이 안 좋아진 만큼 더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지…….’

황태제의 사의에 그런대로 만족한 왕이 답했다.

“황태제께서 나의 수고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마음이나마 전달해 주시니, 거듭 황공할 따름입니다. 황태제께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요.”

왕은 말을 마치며 미소 지었고, 사가복은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 하심은……?”

“아조에서는 등래대원수 토벌에 필요한 정예의 조련을 거의 마쳤습니다.”

“아…!”

“등래대원수의 토벌은 다소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한때 대국의 신민들이었다는 건 알지만, 역적들에게 내응한 무리와 그 땅을 우리가 조금도 손대지 않고 수괴만 토벌하기란 나로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명 또한 불가능한 위업입니다. 역적만 토벌해주시는 것만으로, 대명과 황태제께서는 조선 국왕에게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이해해주신다니 안심이 되는군요. 하지만 비답이 내려졌으면 합니다.”

“황태제께 전달하겠습니다.”

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간곡한 우려와 함께 ‘그 땅’이라는 표현을 은연중에 섞은 그다.

왕은 자신의 밑천까지 보태 무수한 재원으로서 정예를 양성하고 원정을 수립했으며, 그 대가로 은자 5만 냥은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대명과 황태제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부족한 수고로움의 대가를 알아서 충당할 생각이었다.

물론,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는 내용.

“중한 소식을 가지고 급히 바다를 건너시느라 여독이 적잖이 쌓이셨겠지요. 본분은 다 하셨으니, 이만 숙소로 돌아가 편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 신하들과 당장 시급해진 논의를 시작할 테니까.

사가복으로선 거부할 수 없는 지시였다.

“조선 국왕 전하의 두터운 후의에 거듭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소관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사가복은 손을 모아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어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입꼬리를 올린 채 저마다 눈빛을 교환하던 중신들 사이에서, 왕이 빵긋 웃으며 외쳤다.

“됐어!”

그리고 어전에는 호방한 웃음이 이어졌다.

* * *

사가복은 조선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명나라의 장관급 인물이었다.

조선을 사신으로서 거듭 방문한 태감들 역시 환관 조직에서는 장관에 해당하니, 이들은 어디까지나 환관들.

태감들이 흔히 조선을 방문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정조직에서 장관이 조선을 방문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래 봐야 재상들에게는 푹 삶아놓은 소갈비와 마찬가지로 야들야들한 먹잇감에 불과하였으나…….

보통 사람들에겐 소갈비란 그리 흔치만은 않은 음식.

그래서인지 사신 숙소 앞에서는 명나라 장관의 낯짝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구경꾼들로 어수선했다.

“바깥이 꽤 소란스럽지요?”

예부상서를 맞아 예조판서 남이공이 나섰다.

그의 역할은 이랬다.

황제가 반사한 은 5만 냥이 적지는 않으나, 조선은 정예에 그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고.

그래서 무리한 원조에 신하들의 반발이 작지 않았다고.

정녕 조선의 왕이 대명의 충신으로 남기를 바란다면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사가법도 만만치는 않은 사람이었다.

“한양이 그만큼 활기차다는 뜻이겠지요. 이 정도 소란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대신, 바깥의 외인들과 필담筆談을 한 번 나눠보고픈데 괜찮겠습니까?”

사가법은 궁궐 밖에서 조선의 정세와 실체를 탐문해 보고 싶었다.

조선 조정을 무턱대고 신용할 수 없다는 건, 곧장 숙소로 쫓아와 안팎의 소통을 차단하는 남이공의 존재만으로도 입증되었으니까.

물론, 남이공으로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조선은 오래전 팽창욕에 취한 신민들을 달래고자 산동반도 진출을 천명해 두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알아서 밥상을 다 차려준 지금, 고립된 북경을 대신해 진짜 예부로서 기능할 남경 예부의 장관에게 이러한 내막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또한, 만만찮기로는 남이공도 마찬가지였다.

“대국의 대신께서 어떻게 하찮은 잡인들과 소통하고자 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조선의 신민들을 잡인으로 보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대인의 신변에 티끌만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소관이 곤란해집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지요.”

남이공이 빙긋 웃으며 부탁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야들야들해야 할 사신이 괘씸하게도 수행원을 부려 비밀스럽게 탐문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 * *

남이공은 고민했다.

사신의 손발은 분명 묶어두어야 하고 계속 주시해야 하지만, 이는 자칫 노골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든다면, 켕기는 게 있어서라고 의심하지 않겠는가?

밖으로는 사가법을 상대하고 안으로는 고뇌를 거듭한 남이공은, 문득 사가법에게 양해를 구한 뒤 대타를 세우고 예조를 찾았다.

몇 년 전부터 예조는 새로운 방면의 직무를 부여받았다.

이는 당시에도 판서였던 남이공이 의주로 파견되면서 관성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적성국에 심어놓은 첩보 조직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홍태주가 조선의 우위를 인정하고 굴복함으로써 요동의 첩보 조직은 꽤 느슨해졌다.

금나라에서는 조선의 첩보 활동을 저지할 힘도, 권한도 없었고 조직의 표면에서는 위장의 수단이어야 할 상행이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

요동에서의 첩보 가치가 하락했다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다녀야 했던 적지가 이제는 밥 먹은 김에나 잠깐 갔다 올 법한 산책로로 전락해 버린 꼴이었다.

자연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유상은 신입을 뽑고 훈련하는 데 쓰고, 더 쓸만한 사람들은 더 쓰일만한 장소를 마련해 줘야겠지.’

예를 들자면 외국의 사신과 그 수행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든가.

유학의 가르침과는 다소 동떨어진 일이지만, 필요한 일이니 어쩌겠는가?

사대부들이 상인은 그저 물건을 옮기기만 하면서 폭리를 취하는 모리배로 몰아붙여도, 정작 그들이 없으면 외지의 물건을 구하기 힘들다는 건 부정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필요한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유례없는 일도 아니고…….’

북경에서 진득하게 머물렀던 남이공이었다.

그리고 그를 가장 성가시게 만들었던 건, 잠들기 전 어미에게 우화를 청하는 아이처럼 거듭 조선의 사정을 물어왔던 천계제나 서로 저들의 편에 서라며 강요하고 회유하고 협박했던 엄당과 동림당 패거리가 아니었다.

동창東廠.

동쪽의 헛간이라는 시답잖은 명칭과는 정반대로, 황제와 환관 조직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비밀 조직이었다.

그것을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요동에 조선유상을 심어놓듯 저들 수도에 심어놓은 것이다.

꼴사납다면 꼴사나운 일이나…….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런 조직도 필요했으리라.

지금은 조선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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