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2화
“한윤과 그의 수하들을 이 땅에 불러들이자는 말씀이십니까?”
“전부는 아니옵니다.”
예조판서 남이공이 덧붙였다.
“다만, 그중에서 쓸만한 자를 가려 자질을 발휘할 기관을 신설하자는 것이옵니다.”
“흐음……. 예조판서의 제안은, 꽤 독특하군요.”
“그렇사옵니까?”
“그러한 조직을 국내에 설치한다는 건 삼한의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가 없으니까요.”
몇몇 위정자들이 개인적으로 정보원을 굴리기는 했을 것이다.
마치 고려조의 실세들이 사병을 거느렸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못했다는 건 후대까지도 무수히 전해진 왕의 미복微服 사례가 증명한다.
오죽하면 왕이 직접 나와서 보기까지 해야겠는가.
대개는, 궁궐이라는 폐쇄된 환경에 구속된 신세에서 해방되고자 미복이라는 명분으로 나선 것일 테지만.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조선은 첩보 조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신권과 유교적인 통치 이념 때문이겠지.
위정자들에게 있어 비밀스러운 주시자들의 존재는 입안의 가시와 같아 껄끄러울 수밖에 없고, 유교적 이상 사회에 있어서는 비밀 첩보 조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도 명분상으로도 이러한 기관은 설치되기 힘든 것이다.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의 사례가 있긴 하지만…….’
제국익문사는 아마도 한반도 최초일 비밀 첩보 조직이다.
하지만 ‘제국’익문사라는 그 이름처럼, 이 기관은 조선이 사실상 망해 버리고 묘비에 이름만 멋들어지게 새겨놓은 대한제국 시절 단기간 존속했던 기관이다.
그만큼 첩보 조직이란 이 땅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존재였다.
“오랑캐의 동향을 정탐하고자 깔아놓았던 사람들을 한양에 불러 풀어놓는다면 신하들의 반발이 작지 않을 텐데요.”
“조선유상의 존재를 아는 신하들은 많지 않사옵니다.”
최초 조선유상과의 창구를 맡았던 의주부윤.
그리고 의주에 파견되어 보다 높은 위치에서 첩보 활동을 감독했던 예조판서.
마지막으로 의정부서사제의 부활과 함께 이조와 예조를 전담하게 된 영의정까지.
과연 조선유상을 인지한 신하들의 수는 손에 꼽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자는 겁니까?”
“반대를 부러 살 이유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남이공이 능글맞게 웃었다.
“조선유상과 같은 존재를 국내에도 둔다면 분명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지만…….”
“예에!”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고 두기에는 조심스럽군요. 달리 말하면, 소수가 결탁하여 전황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당장은 조선유상의 주인인 한윤조차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다.
나는 홍태주의 목을 따지도, 금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한윤은 부친 한명련의 원수를 갚고자 조선을 저버리고 후금에 의탁했었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괴롭힌 것으로 만족했다면 좋겠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이를 드러내지도 않는다면 한윤은 위험한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그리고 현재와 마찬가지로 오직 소수만이 조선유상의 실체를 아는 상황에서는, 한윤이 손을 과격하게 쓰거나 소수와 결탁하는 것만으로 한양의 밤거리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건 어떻겠습니까?”
“하교하시옵소서.”
“예조에 계제사稽制司나 전향사 典享司처럼 속사屬司의 형태로 조직을 신설하고, 청사는 외부에 따로 설치하는 겁니다.”
남이공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답했다.
“존재는 공식적으로 두되, 실체는 드러내지 않은 것이로군요.”
“약간의 조심성만 더해진다면 나의 본의에 맞게 반발은 줄이면서도 조직은 공개적으로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뒤통수를 감시해야 하니 첩보 조직을 두겠다, 대놓고 공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반발해 달라고 주문해 주는 격.
그러니 예조에 속사로서 두는 형태로 신민들이 적응할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나도 눈치는 봤다는 점에서 신하들의 이목은 덜고 관용은 더 구할 수 있을 터.
남이공이 물었다.
“그렇다면 속사의 이름으로는 무엇이 좋겠사옵니까?”
“속사 관원들이 전국을 돌아다닐 당위가 있어야 하는데, 마침 내가 백성들의 여론을 취합해 국사에 반영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를 전담한다는 의미에서 실방사悉訪司가 어떻겠습니까?”
다할 실悉에 물을 방訪자를 붙여, 빠짐없이 물어본다는 뜻.
이는 세종대왕이 공법의 시행을 두고 백성들의 여론을 물어볼 때 내린 지시이기도 했다.
남이공은 만족스럽게 미소짓고는 꾸벅 허리 숙였다.
“받들겠사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답게 복심을 읽어낸 모양이다.
첩보 조직이 여론 조사를 전담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필요하다면 여론을 조작하거나 호도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상황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론이란 게 항상 옳지만은 않으니까.
* * *
그날 밤이 되어, 남이공은 사가법을 이끌고 천문대를 방문했다.
건물의 천장과 만리경 받침대를 기계식으로 조작하는 천문대의 시설은, 최근 조선의 영화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허어…….”
사가법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국의 대신으로 자존심이 상하긴 하였으나, 실내에서 지붕을 여는 기술은 명나라에도 없었을뿐더러, 승강기를 통해 밤하늘로 나아가는 건 실로 진귀한 경험이었으니까.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십니다.”
남이공은 장막을 펼쳐 주변을 암실로 만든 뒤, 만리경을 달에 맞췄다.
그리고 사가법에게 보여주었다.
“……!”
“달이 하늘에 떠 있는 울퉁불퉁한 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소관은 적잖이 놀랐습니다. 대인께서는 감상이 어떠실지 모르겠군요.”
사가법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남이공은 자신이 최초로 달을 ‘제대로’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삼의정과 중추부와 기로소의 원로들, 종친까지 달의 모습을 보겠다고 줄을 섰으므로 판서인 그조차도 제법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
만월滿月은 그 이름처럼 보름에 한 번 돌아오니까.
그리고 때가 되어 승강기를 타고 야경 한가운데서 장막을 치고 마주한 보름달의 모습은, 기다림의 대가로는 충분하고 또 충분했다.
‘괜히 당상들 집구석마다 보름달 그림이나 달밤에 관한 시조를 걸어놓은 게 아니었지…….’
다 몽환적인 그 풍경에 빠져든 것이다.
달을 마주한 재상들은 매양 사람들 앞에서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과 붓끝을 저주했다.
사가법은 멍한 얼굴로 물러나서 말했다.
“화성이나 금성 같은 다른 별을 볼 수는 없겠습니까?”
“음, 달은 보름마다 관측하기 좋은 때가 돌아와 이렇게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만, 다른 별들은 관측에 적절한 시기가 매우 드물게 찾아오지요.”
“……아아.”
사가법이 탄식하자 남이공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한양에 조금 더 머무신다면 최적은 아닐지라도 관측할 수 있는 때가 올 겁니다.”
남이공의 부연에 사가법이 침음을 흘렸다.
황태제의 사과와 사의를 전하고도 그가 한양에 남아 있는 이유는, 조선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으니까.
그것이 지금 거론되는 건, 남이공이 한 말이 얌전히 지내기를 주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때, 달의 진짜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랐지? 이거 어디에서도 못 보는 광경인 건 우리도 안다. 화성이랑 금성도 제대로 보고 싶으면 얌전히 지내야 할걸?
그리고 이것이 남이공이 사가법을 천문대로 데려온 이유이기도 했다.
조선의 뛰어난 문물을 과시할 생각도 분명 있었지만, 황제국의 장관인 사가법의 행보를 통제할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이쪽에서 일일이 가는 길을 막아설 수는 없으니, 스스로 얌전히 있게 만들도록 인질을 잡은 것.
그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자 남이공은 만족해하며 말했다.
“대인께서 인내심을 발휘해주시겠다면, 인평대군께 양해를 구해보지요.”
“……인평대군이요?”
“만리경을 천하에서 가장 잘 다루시는 분이 바로 인평대군이십니다. 보통 다른 별을 관측할 수 있을 때는, 여기 천문대에서 기거하다시피 하시지요.”
그리고 기존의 우주관과 배치되는 각종 이상 현상을 관측하고 분석 및 해명함과 동시에, 국익에도 공헌하고자 전왕이 금지한 옛 역법 칠정산七政算의 개정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아니 계십니다만, 그 때가 온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인평대군밖에 없으십니다.”
“대군께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보통은, 연구로 분주하기도 하시니…….”
그 눈깔에 다른 별들의 실체를 담게 해줄 수 있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인평대군의 의사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가법은 그 ‘인평대군의 의사’가 자신의 거동에 따라 달렸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가법은 속으로 한참을 끙끙대었으나, 조선의 실체란 천문대와 만리경이라는 일면만 보아도 모두 거짓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빈말로 해동성국을 가장한다면 이런 건 절대 만들어내지 못했을 테지.’
사가법은 그렇게 속으로 타협하며, 우주를 향한 호기심과 매력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부디 인평대군께 소관의 간곡한 여망輿望을 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동안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사가법의 항복에, 남이공은 웃는 낯으로 응해주었다.
“예. 그 뜻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써보겠습니다.”
* * *
“사신이 응해주었습니다.”
남이공의 보고에 여러 중신이 감탄했다.
사가법이 조선을 들쑤시고자 한다는 건 많은 사람이 인지한바.
그러나 대국의 장관이라 섣불리 거동을 금하지 못하고 방법을 고민했는데, 남이공이 천문대와 만리경을 활용해 사신 스스로 거동을 묶어버린 것이다.
‘실방사悉訪司 없어도 제 몫은 다 하는군…….’
그렇다고 실방사의 신설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잘 풀린 건 남이공 한 사람의 뛰어난 기지와 적절한 환경이 어우러진 덕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천문대와 만리경이 큰 인상을 주지 못할 수도 있고, 강한 의지를 발휘해 호기심을 꺾을 수도 있었다.
그 점에서, 실방사는 잠재적인 여러 상황에서 유리한 여건과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실방사 없이도 잘할 수 있네, 하면서 번복했다간 남이공이 나를 경회지에 던져버리겠지.’
난 경회지 물맛은 궁금하지 않다.
“고생하였습니다, 예조판서. 인평대군에게는 잘 말해두지요.”
“망극하옵니다.”
“병조판서?”
고개를 돌리며 부르니, 김세렴이 대답과 함께 나섰다.
“하명하시옵소서.”
“원정은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겠지요?”
“예.”
“명나라가 도움을 받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으니, 이제는 그들도 멈출 수 없습니다.”
계획이 거대할수록 관성도 크다.
현실이 달라지고 특별한 상황이 발생해 환경이 어그러져도, 무모해진 옛 계획이 지속된 사례들이 다 이 때문이었다.
딱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 그대로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면 끝까지 내달릴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내려오려 했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테니까.
“도원수에게 전해주세요. 이 나라 야망의 실현은, 오직 그대에게 달려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