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3화
일반적으로 전쟁하기 좋은 시기는 겨울로 여겼다.
추수가 끝나 군량이 확보되고, 작물을 기를 수 없어 농사를 쉬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켜도 부담이 적은 것이다.
조선군은 달랐다.
징집병인 속오군束伍軍이야, 군적에 이름만 올려놓은 것이므로 군대로 칠 수 없다.
조선에서 유의미한 군사력으로 평가되는 북방군, 수방사, 원정군은 모두 상비군으로 농사와는 무관했다.
따라서 이들 병력으로는 계절과 관계없이 군사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추수 직전 개전하여 적의 잠재적 군량을 강탈하는 전략도 가능했다.
도원수 정충신이 제장들 앞에서 말했다.
“산동에 할거한 자칭 등래대원수의 무리는 하찮은 반란군 집단에 불과하다. 그 정체성의 한계로, 피점령지를 착취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여타 반군 집단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비대한 군사조직을 유지해야만 하지.”
등래대원수의 무리가 군사적으로는 강성할지 몰라도 내실은 모래사장에 쌓아놓은 탑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비사성으로 탈주해 온 산동 피난민들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정충신의 부연에, 비사성에 주둔한 원정군의 원수 이완이 끄덕였다.
“우리의 계획은 적에게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보급을 타격하여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다.”
정충신은 마편馬鞭을 들어 산동이 그려진 지도의 빨간 점들을 찍었다.
각 점이 의미하는 것은 곡식을 비축해둔 관창官倉의 위치였다.
성 안의 창고들은 공성을 전제해야만 장악할 수 있지만, 운송과 비축의 편의를 위해 행정구역 외곽에 설치해둔 관창은 헐벗은 수준으로 취약했다.
“사전 상륙할 금군金軍이 반란군의 이목을 유도하는 동안, 우리는 신속하게 노출된 관창들을 점령하고 군량을 탈취한다.”
그동안 등래대원수와 정면 싸움을 벌일 금군은 큰 타격을 입겠지만, 이는 산동반도의 내륙지역과 중원 진출을 허락하는 대가로 협의는 이루어졌다.
그들이 차지할 땅이므로 당사자가 직접 피 흘려 쟁취하는 건 당연한 셈.
주변에서 관창들을 공략해 등래대원수의 무리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려 줄 조선의 도움에 감사해야 했다.
물론, 조선이 명이나 금을 위해 이 같은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건 아니었다.
조선은 밀약의 대가로 반도의 돌출부인 등주登州와 모든 해안에서부터 내륙까지 100리里까지 가져가기로 했다.
야망과 장기적인 이익을 함께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통해 발해勃海와 일대 해역을 격리하여 우리만의 바다로 삼고, 중원과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겠다.
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조선이 보유한 특권의 대상과 범주도 더욱 확장할 것은 자명한 사실.
그 무수한 자원을 국내로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발생할 자잘한 이익까지, 조선에서는 놓치지 않고 모조리 차지하겠다는 의지였다.
바다와 조선령을 두고 본토와 점령지가 격리될 금나라로선 꽤 부담스러운 일이겠으나, 막상 홍태주는 호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니 짐작되는 홍태주의 복심이란 참으로 뻔한 것이었다.
-머잖아 북경과 북직례가 틈왕이 이끄는 순나라에 의해 함락되면, 그 땅까지 점령해 본토와 점령지를 연결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여진족은 바다와는 거리가 먼 족속. 내어주더라도 밑질 건 없다.
한겨울에 얼어붙은 물가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만큼이나 맑고 투명하기 짝이 없는 복심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과정에서 더 넓은 해안을 장악하고 ‘우리네 바다’만 실현하면 그만이었으므로 당장은 모르는 척해줄 뿐.
도원수 정충신은 마편의 끝자락을 쥐며 일렀다.
“이것이 조선의 계획이다.”
왕이 지중해의 별칭에서 따온, ‘마레 조선트룸’ 계획이었다.
* * *
마레 조선트룸을 실현하기 위한 함대가 비사성에 집결했다.
왕과 조정은 범선을 다수 도입했으나, 금나라의 군세까지 포함한 연합군을 실어나르기에는 역부족.
그래서 이번에는 통제영統制營의 함대가 함께했다.
임란 직후 수군의 중요성이 대두하며 삼도 수군이 거느린 통제영은 판옥선의 숫자만 수백에 달했다.
이들이 범선과 함께 여문의 보급항 안팎을 차지한 모습이 실로 장관이라는 것은, 자존심 강한 홍태주도 부정하지 못했다.
“……대단하군.”
승선을 앞둔 금나라 군사들 앞에 선 홍태주였다.
그의 찬탄에, 마침 멀리 있지 않았던 조선군 도원수 정충신이 물었다.
“배에 오르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지요?”
홍태주가 여문을 방문한 건 군사를 환송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금나라는 오랜 혼란 끝에 가까스로 내전을 종식한 참이었고, 여전히 여러 여건이 극도로 불리했다.
당장 나라의 귀금속과 자원을 들어내어 헐값으로 쌀과 바꾸지 못한다면 다시금 내전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
이번 원정에 국운이 걸린 건 조선만이 아니었고, 홍태주는 자신의 능력이 국강의 운영보다는 무재나 군재에 치중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금나라군의 지휘관 명목으로 원정에 참가했다.
“처음이지. 배에 오르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것도.”
“이번 원정을 통해서 소관이 신용을 쌓을 수 있겠군요.”
“나의 신용을 사다가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가?”
“쓸 데는 미리 정해놓지 않았습니다만. 전하의 신용은 귀하고, 살 기회는 흔치 않다는 건 압니다.”
정충신의 호의적인 대답에 홍태주가 실소했다.
조선과 맞서서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뒤로, 그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그 점을 제하더라도 정충신은 홍태주에게 평가가 높은 인물이었다.
자신이 범부凡夫가 아님을 알기에, 그런 자신과 맞서 거듭 승리한 정충신에게 기본적으로 인정과 존중이 깔린 것.
대적자를 업신여긴다면 그런 업신여겨지는 대적자를 상대로 연패한 자신은 뭐가 되겠는가?
더욱이, 예전부터 유능하고 강단 있는 인물이란 적아를 불문하고 좋아했던 홍태주였다.
“나의 병사들을 무장과 함께 승선하게 해준다면 더 많은 신용을 사게 될 걸세.”
“송구스럽지만, 전하께서는 소관의 신용을 아직 얻지 못하셨습니다.”
“허. 그건 안타까운데.”
불가피한 조처였다.
사적인 감정이야 어떻건, 금나라는 그리 오래지도 않은 과거에 조선의 존립을 위협해왔고 홍태주는 그런 금나라의 주인이었다.
그가 친히 지휘하는 이국의 대병을 무장한 채로 선단에 동행해주기란 불가능했다.
“무구는 해안에 도착하는 대로 전달해드릴 터이니, 염려치 마시지요.”
“그 전에 자네가 나와 내 병사들이 탄 배를 침몰시키면 어쩌나?”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내전과 잦은 혼란에도 요동은 여전히 광대한 땅이었으며, 무수한 인명이 폐허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조선이 금나라를 끝내 평정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요동이 계륵만도 못하게 되어, 직접 통치하려 들었다간 허리가 휘다 못해 반대로 접히고 또 접힐 테니까.
또한, 그 땅에서 질서를 유지해주는 금나라의 존재를 없애버릴 이유도 없었다.
다시금 요동에 극도의 혼란이 찾아와 도적과 군벌이 할거하기 시작한다면, 필경 그들 중 일부와 무수한 피난민들이 부유하고 안전한 조선으로 침투 또는 침탈하고자 장대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모든 영역에서 국경의 방비를 시험해올 테니까.
조선으로선 이러나저러나 피곤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홍태주 또한, “알고 있지. 그냥 해본 말일세.”
“처음으로 배를 타게 될 병사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로군요.”
“하!”
홍태주는 조소하고는, 몸을 돌려 군사들에게 외쳤다.
“두려운가!”
홍태주의 물음에 군사들이 ‘와카!’ 하고 일제히 답했다.
일대를 쩌렁쩌렁 울려대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세만 봐도, 정충신은 단어의 의미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두 팔을 펼치고서 그 기세를 마음껏 즐긴 홍태주는, 여유만만한 얼굴로 정충신에게 말했다.
“두려운 것 같지는 않군.”
“든든하군요.”
두 사람의 앞으로 한 장수가 다가왔다.
삼도수군통제사였다.
보급항 하나에 다 들어가지 않는 방대한 선단을 이끌고 수송계획을 세워야만 했던 그는, 피로해진 얼굴로 말했다.
“승선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정충신은 고개를 끄덕이곤, 부관들에게 통제사의 말을 전한 뒤 홍태주를 마주했다.
“통제사가 이제 승선하면 된다고 합니다. 먼저 배에 오르시지요.”
“그러지.”
홍태주가 장수들을 향해 손짓하자, 중무장한 팔기들은 거친 다그침과 함께 후열의 보병들을 부두로 인도했다.
이에 보병들은 초췌한 낯에 마지 못한 기운으로 팔기의 뒤를 따랐다.
녹영綠營.
거듭된 패전에 이은 분란과 내전으로 팔기가 축소하자 홍태주가 원정을 앞두고 선택한 건 군대의 확충과 더불어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었다.
소수로 전락한 팔기군을 원정에 보낸들 등래대원수를 토벌하기엔 벅찰뿐더러, 팔기가 안방을 비우면 한족들이 궐기할 수도 있었으니까.
이 상이한 두 문제는 하나의 해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바로, 요동의 한족 장정들을 대거 징병하여 화살받이로 써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부여된 이름이 바로 녹영이었다.
이전에도 홍태주는 한족을 군대에 편입하여 부렸으나, 녹영은 그보다 더 대대적이고 조직적으로 편성한 부대였다.
“호랑이가 이끈다고 양이 늑대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원정을 총지휘하는 정충신은 아직 교전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다 죽어가는 녹영을 보며 달갑지 못한 투로 물었다.
이에 곁에서 군사들의 행진을 주시하던 홍태주가 답했다.
“피역자들을 조련하여 나와 맞섰던 도원수가 하는 말치고는 건방지다는 생각이 드는군.”
“피역자들을 바로 전투에 투입한 건 아니었지요. 그들에겐 강군으로 거듭날 시간과 훈련, 전략과 보급이 있었습니다.”
“난 그중에서 두 가지만은 확실하게 제공해 줄 수 있네. 훈련과 전략.”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보다 더 확실한 건 그냥 실전 그 자체였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할 테니까.
그런 과정을 몇 번 거듭하다 보면 살아남은 이가 많지는 않겠으나 최종적으로는 강군이 남을 터였다.
또한, 이번 원정이 한족을 그저 도살하기 위함이 아닌 만큼 홍태주는 녹영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 두 가지로도 족하지 않겠는가?”
“시간과 보급은 제하셨습니다.”
“군사들이 시간을 원한다면 살아남으면 될 것이고, 보급이야 적에게서 빼앗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홍태주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여전히 탐탁지 못한 정충신에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몇 번 깨졌다고 나를 우습게 보는군, 도원수. 그대와 조선왕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중원을 정복했을 거야. 그럴 자신이 있었지.”
“자만은 위험합니다.”
“아, 시답잖은 한족 찌꺼기들을 상대로 너무 진지해지는 것이야말로 더 위험해지는 길이라네. 내가 놈들을 많이 상대해 봐서 아주 잘 알지.”
홍태주는 검지를 들어 정충신을 가리키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믿게.”
그리고는 터덜거리며 나아가는 녹영군을 따라 팔기의 선두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