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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54화 (254/380)

인조, 명군이 되다 254화

산동, 등주登州에서 고작 10리里 떨어진 해안에서.

“물자는 빠짐없이 하역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의 전언에, 홍태주는 여유로운 얼굴로 속속들이 무장해나가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중원을 정복하겠다는 숙원이 있었다.

비록 조선을 얕잡아보았다가 호되게 당하고, 사람이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 자신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경험해보았으나…….

보라.

“드디어 중원에 발을 디뎠군.”

“경하드립니다.”

“내가 중원을 정복하게 되면, 나의 군대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그대의 공로는 잊지 않겠어!”

“무리하진 마십시오.”

통제사의 뚱한 반응에, 홍태주의 곁을 지키던 호격豪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통제사 역시 나라를 적잖이 고생시킨 오랑캐 두목을 대접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홍태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듯 여유롭게 호격의 등판을 두들겼다.

“내가 중원을 정복하면 통제사는 공신이다! 예의를 갖춰라.”

“……예.”

호격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엎드려 절 받은 통제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흘 뒤에 조선군이 상륙합니다. 그 전에 적의 이목을 최대한 끌어주십시오.”

“그건 내가 의식해두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 같군.”

중원 정벌의 디딤돌을 확보하려면 홍태주 역시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야 하니까.

마침 등주 근처에 상륙한 참이었다.

적이 대비하기 전 불시의 공격을 날리기엔 지금이 최적이었다.

통제사는 두말하지 않고 꾸벅 묵례했다. 그리고 부장들과 함께 발을 돌렸다.

그 모습이 꽤 멀어졌을 즈음.

홍태주는 호격의 등판을 재차 두들기고는 일렀다.

“준비해라. 온 중원이 나와 너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다!”

“……예!”

* * *

산동의 중심인 등주 앞에서.

급작스레 등장한 금나라 군대의 존재는 등주의 관리와 백성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등래대원수는 때마침 군대를 이끌고 북직예를 치러 간 참.

그 시일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등주에서는 서둘러 파발을 보내 ‘하늘에 뚝 떨어진’ 적의 존재를 알리며 성군을 굳게 닫아걸었다.

그런 등주 앞에서 홍태주는 군사를 시켜 나무를 베고 사다리를 짜며 방패를 만들었다.

양측은 다가오는 충돌을 앞두고 긴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홍태주는 대오를 갖춘 팔기와 녹영 앞에서 외쳤다.

“쳐라!”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전장에 울렸고, 사다리를 인 녹영이 자기 스스로를 마취하듯 고함 지르며 질주했다.

팔기는 녹영군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등을 돌리는 자를 베어가며 잔혹하게 독전했다.

덜커덩!

사다리가 성가퀴에 걸리고, 녹영군은 발작하는 이성을 애써 억누르며 한 발씩 디뎌나갔다.

성벽을 두고 혈전이 벌어지는 동안, 지붕에 쇠판을 둘러놓은 충차도 성문을 향해 전진했다.

일반적인 충차는 아니었다.

금나라는 요동을 정벌하며 상당한 수의 화기火器를 입수했다.

비록 그 대부분은 2차 의주전투에서 소실되었지만, 일부는 남아 있었고 홍태주는 그것을 충차로 위장했다.

“신담비!”

충차를 이끄는 팔기군이 외쳤고, 불씨를 가져온 녹영군 병사는 명령대로 대포를 점화했다.

쾅!

폭음과 함께 거대한 성문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다.

고작 주먹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지만, 성문을 두고 육박전을 각오했던 등주의 병사들에게 갑자기 날아든 포탄은 실로 재앙이었다.

빼곡한 인파 사이에서 육편이 된 병사들이 피와 비명을 쏟아냈고, 그 경악스러운 광경에 등주의 병사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충차를 지휘하는 팔기군은 그 광경을 구멍 너머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허! 비잠비!”

이에 도끼로 무장한 녹영군이 성문으로 달려들었고, 이미 구멍이 난 채 지켜주는 사람도 없어진 성문은 무자비한 도끼질 앞에서 차차 형체를 잃어갔다.

주변을 지휘하는 팔기군에게는 그마저도 답답했는지, 그는 한 녹영군에게서 도끼를 뺏어들고 드러나기 시작한 빗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나무를 패고, 찢어진 부분을 뜯어내기를 몇 번.

콱! 하는 일격과 함께 도끼가 빗장을 관통하자 팔기군이 외쳤다.

“아팜비, 하풀암비!”

물러났던 녹영군이 다시 성문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전히 격전이 이어지는 와중, 홍태주는 부하들을 이끌고 성을 방문했다.

비명과 고함. 창칼 부딪치는 소리. 말발굽 아래 깔리는 무수한 시체들.

홍태주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음미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역시 나는 전장에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구나. 이 좋은 것을 어떻게 끊는단 말이냐.”

금나라의 군세가 성으로 들어선 뒤, 적의 저항은 빠르게 위축되고 있었다.

“여전히 이 동네 족속들에게 기개란 찾아볼 수가 없군. 고작 이깟 놈들을 치기 위해 반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홍태주는 질린 얼굴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이고, 빼앗을 수 있는 건 모두 빼앗으며, 태울 수 있는 건 모두 불태워라. 내가 뒤따라 올 놈들을 위해서 정리 좀 해줘야겠다.”

홍태주의 명령에 부하들은 기꺼운 낯으로 저마다의 팔기를 이끌고 성 안쪽으로 들이쳤다.

잦아들던 비명과 고함이 다시 거세졌고, 그것이 다시 잦아들 즈음 노을보다 더 붉은 화마가 성에서 피어올랐다.

* * *

사흘 뒤.

범선들과 통제사의 함대는 산동을 왕복했고, 조선군을 금나라군의 상륙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었다.

실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삼한 시절 백제가 무역거점 수준으로 잠시 개척했던 이곳 산동의 끝자락에, 천 년이 지난 지금 삼한의 후예가 다시 발을 디뎠으니까.

그러나 그런 위업을 환영해주는 건 환호와 흩날리는 색종이가 아니었다.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도원수 정충신이 눈살을 찌푸렸고, 원수 이완이 말했다.

“오랑캐들이 제 습성을 견디지 못하고 등주에 불을 질러 버린 모양입니다.”

조선령 산동에서 핵심적인 입지를 보유했을 등주다.

명나라인들이 주축인 만큼, 통치에 여러 차질은 각오했다지만 아예 불살라 없애버릴 생각까진 없었는데 홍태주가 그냥 파괴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야겠군.”

“이로울 게 있습니까?”

“굳이 찾아보자면, 홍태주가 우리를 배반하지 않고 계획대로 공격에 착수했다는 점 아니겠나.”

무장과 함께 상륙지에 내려주었기 때문에, 공세는 하지 않고 뒤따라 상륙할 조선군을 급습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상륙하는 위치도 바꾸고 첨병부터 펼쳤는데, 탄내가 등주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진동하는 걸 보아 우려는 우려로 그쳤다.

“놈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꽤 가까워 보였습니다만.”

“당연하지. 홍태주가 어떤 놈인가.”

황제를 참칭하고 조선을 상대로 건곤일척의 싸움을 걸어온 장본인이었다.

대적자로서 인정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신뢰와는 별개.

오히려 홍태주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충신은 더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신한다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잖나.”

“그건 그렇지요.”

“놈들이 제 몫을 수행하고 있다니, 우리도 몫을 해야겠지. 당부하였듯 매 두 시진마다 밤낮 예외 없이 행보를 보고해 주길 바라네.”

노출된 관창을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분할할 수밖에 없었다.

주공인 2만가량은 도원수 정충신이 맡았으며, 나머지는 이완이 맡아 각기 다른 방면에서 관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다만 허술한 군의 분할은 위험을 초래하기 쉬운 짓.

과거 명나라가 호지胡地에서 대병을 동원하고도 노아합적에게 참패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여러 불운이 겹치긴 했으나, 인재人災만 따지자면 군을 분할하고도 연계를 중시하지 않아 각개격파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정충신과 이완은 전례를 참고하여 각 군의 연계를 긴밀히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염려치 마십시오. 각골명심하였습니다.”

“음…….”

정충신은 노파심에 더 당부하고자 했으나, 이완의 됨됨이를 알았으므로 자중하기로 했다.

대신 만약을 각오할 뿐.

이완이 원칙을 준수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산동은 조선에 있어 이해도가 극도로 낮은 타지. 무슨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상륙이 완수되자 더 크게 우회해야 할 이완의 조공이 먼저 출발했다.

서로 속도를 맞춰야,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

홀로 남은 이완은 멀어지는 조선의 군기를 주시하며 왕이 강조했던 대조선의 야망을 가슴에 새겼다.

* * *

그 시각.

등주를 파괴한 뒤 군세를 정비하여 내주로 향하던 홍태주는 고대하던 적군과 마주했다.

등래대원수를 자칭한 진광부陳光福의 군세였다.

진광부는 허세만으로 대원수를 자칭하지는 않았다는 듯, 휘하의 군대로 지평선을 빼곡하게 메워놓은 채였다.

그러고도 군대가 다 대오를 갖추지 못해 너머에서는 병력이 꼬리처럼 늘어져 속속히 합류하고 있었으니, 과연 대원수를 자칭할 법했다.

“적들의 수효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군을 능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장을 우회해 적의 측후면을 정탐한 호격豪格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너는 저들의 출신이 요동의 패잔병에 불과함을 전해 듣지 못했느냐?”

이미 금나라에 꺾였던 자들이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선한이 사르후에서 명군을 격퇴했을 때는, 어려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나 방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내가 방심한 것으로 보이느냐?”

“한의 진의는 알지 못합니다만……, 어린 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흐음.”

홍태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말해주어 고맙구나.”

“아닙니다.”

등주 공방에 이어서 오래간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했기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흥분했을지도 몰랐다.

홍태주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전장을 마주했다.

‘나의 군세가 예전과는 다르긴 하구나.’

선한 시절 무수하고 막강했던 팔기의 군세는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었으며 빈자리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녹영이 대신하고 있었다.

예전 그 기세로 명군을 쳐부수리란 보장은 없는 셈.

“측후방에 팔기가 돌입할 우회로는 있더냐?”

정면으로 돌파할 기병 전력이 없다면, 우회를 통해 충격력을 극대화하면 될 뿐.

“숲이 있어 기병은 기동하기 힘듭니다. 아예 숲 전체를 돌아 후방을 노릴 수는 있습니다.”

호격의 썩 달갑지 않은 보고에, 홍태주는 미덥지 못한 녹영을 돌아보았다.

등주를 함락시키며 한 차례 승전과 함께 전리품을 취하고 즐겼다지만, 이들은 전성기의 팔기보다는 과거 대금을 혼란케 만들었던 도적 떼에 가까웠다.

점령지의 약자들을 잔혹하게 유린할 때는 언제고, 전투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을 보라.

그러나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중원의 제패도 없었다.

정복자가 되는 과정에는 항상 장애물이 함께했다.

홍태주는 결심과 함께 일렀다.

“팔기를 이끌고 숲을 돌아라. 그동안 내가 버티고 있겠다.”

“예.”

홍태주는 시선을 돌려 등래대원수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숲 사이 언덕에서, 빼곡한 군사들 사이로 화려한 군기를 휘날리는 모습이 참으로 휘황찬란했다.

선한, 노이합적에 의해 처참하게 짓뭉개지기 전 명나라의 군세 역시 그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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