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5화
베고, 찔렀다.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충혈된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간다.
손짓 한 번에 목숨 하나.
기계적인 도살이 이어질수록 홍태주는 생을 느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단연 살육과 정복이리라.
무자비한 학살에 무의미한 저항이 그쳤다.
홍태주와 그를 따르는 친위대의 주변으로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물러서지 않는 자들이라곤 죽어 시체가 된 자들뿐.
“이것이 네놈들의 최선이냐? 하, 어처구니가 없군!”
요동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 자들에게는 적어도 의지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제국의 살점을 씹으며 덩치만 불려온 패배자에 반역자들의 무리에게 의지라곤 추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오거豪格를 보낼 필요도 없었군!”
치열한 싸움을 예상한 홍태주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호격에게 과반의 팔기를 맡겨 전장을 우회시켰다.
적들이 접전에 매몰되어 있을 때 후방에 기병 돌격을 날려, 단번에 와해시키기 위함.
그러나 이 전통적이고 단순한 전술이 성과를 보이기도 전에, 등래대원수의 군대는 전장에서 날뛰는 홍태주의 앞에서 이미 좌절해버렸다.
“자칭 등래대원수라는 작자는 어디 있나?! 나와라! 한이 너의 목을 원한다!”
만주어를 알아먹을 이 하나 없거늘, 주변의 군사들은 더욱 창백해진 안색으로 웅성거렸다.
요동의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그들에게 만주인이란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었으며, 언어는 그것의 증명이었으니까.
그렇게 질색하는 군사들을 밀치며 한 장정이 다가왔다.
다른 병사들보다 머리가 반 개는 더 큰 인물.
“네놈이냐?”
홍태주는 여흥을 느끼며, 아직은 한 병사의 뒤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장정을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나와라. 이 하찮은 싸움을 끝내야겠다.”
그 순간이었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장정 앞에 서 있던 병사의 상체가 흩어지더니, 핏물과 육편을 헤치고 검은 포환들이 쏟아졌다.
홍태주는 반사적으로 말 고삐를 잡아당겼으나, 말의 반응은 그만큼 빠르지 못했다. 검은 포환들이 이미 홍태주를 스쳐간 뒤에야 놀란 말이 앞발을 들었다.
히히힝!
말이 울었고, 홍태주는 기울어진 안장에서 흘러내렸다.
“한이시여!”
기겁한 친위대가 서둘러 말을 이끌고 낙마한 홍태주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에서, 친위대의 대장을 맡았던 라이무부賴慕布가 황급히 홍태주의 곁으로 뛰어내렸다.
“폐하.”
“…크.”
홍태주는 대답 대신 핏물만 토하고는, 그새 창백해진 손으로 자신의 붉게 물든 가슴께를 더듬었다.
“폐하!”
라이무부가 홍태주의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고, 홍태주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숨 고르기를 몇 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쥐, 같은 것들이 수작을 부렸구나.”
라이무부가 쉬이 답하지 못하고 식어가는 손을 움켜쥐는 동안, 홍태주는 숨을 헐떡이고는 유지를 남겼다.
“다, 죽여라.”
“예. 폐하.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을 다 죽이겠습니다!”
“…….”
홍태주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호격의 말이 결국 옳았다고 여겼다.
하찮기 짝이 없었던 이놈들에게 이런 비열한 한 수가 있을 줄이야.
전장에서 죽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전사라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축복.
다 늙어 칼조차 들기 어려워진 몸뚱이로, 덜덜 떨어가며 최후를 두려워할 바에야.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정복만을 기다리는 이 광대한 중에 발을 디딘 지 얼마나 되었다고 눈을 감아야 한단 말인가?
다만 그것만이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소회를 드러낼 여유를 주지 않았다. 홍태주는 아쉬움만을 느끼며 최후의 숨을 뱉어냈다. 마지막 체온이 담긴 한숨은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흩어졌다.
“…….”
홍태주의 임종을 확인한 라이무부는 채 감지 못한 눈을 덮어주고는, 손을 끌어 팔을 감고 시신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안장에 올라, 긴장한 친위대 사이에서 외쳤다.
“한께서 명하셨다! 쥐새끼들을 모두 죽여라!”
친위대가 다시 적진으로 난입했고, 때마침 호격의 팔기군도 전장의 뒤에서 나타났다.
난전 속에서 열세 중의 열세인 팔기군은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 *
까악!
문득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에.
조선군 도원수 정충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곁에서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던 부관이 나무 꼭대기에 앉은 까마귀를 보곤 침을 뱉었다.
“에이, 퉤.”
“갑자기 침은 왜 뱉나?”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재수없다지 않습니까.”
“흐음…….”
까마귀를 좋아하지 않기로는 정충신도 마찬가지였다.
저 영리한 날짐승은, 사람의 전쟁을 이해해서 군대를 쫓아다니거나 전장 될 곳의 하늘에 미리 모여 있고는 했다.
그리고는 싸움이 벌어지고 양측이 물러난 뒤 내려앉아 즐비한 시신을 파먹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인상을 받기는 힘든 습성.
반대로 그런 습성 탓에 상무정신이 강했던 삼한의 조상들은 사람의 혼과 하늘을 이어주는 영물로 보기도 했다지만, 정충신은 그런 괴력난신에는 딱히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때였다.
“대감!”
일단의 기병들이 정충신을 찾아왔다.
복장이 조선의 두정갑과 유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이들은, 바로 금나라의 팔기군이었다.
조선과의 통교 및 우호가 금나라에 중대한 일이 된 후, 팔기군 중에서 언어적 소양이 뛰어난 일부는 이들처럼 조선어를 익혀 소통을 담당했다.
“어인 일인가?”
이들의 기세가 평소와는 달라 정충신이 의아해하며 물어보니, 팔기군이 좌절하며 전했다.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뭐라?”
정충신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금한 전하께서 말인가?”
“…예.”
침울하기 짝이 없는 단답이었고, 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못하게 된 정충신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거듭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웠기에 잘 알았다.
홍태주는 거대한 야망을 가진 자였으며, 그것을 실현할 힘마저 갖고 있었기에, 쉽사리 죽기에는 힘든 자라고 말이다.
“금한께서는 어인 일로 승하하신 겐가.”
“비열한 적들이 군사들을 장막 삼아 몰래 화포를 터뜨렸습니다. 한께서는 즉각 피하고자 하셨지만…….”
바로 앞에서 쏘아진 포환을 피하지는 못했다.
“음!”
정충신은 짧게 침음하고는 일렀다.
“알았네. ……유감을 표하지. 한데, 싸우던 와중이었다면 전투는 어떻게 된 건가?”
“세자 호격이 분전하여 적군을 패퇴시켰으나, 혼란 중 녹영 다수가 도망치고 한께서도 승하하셨으므로 적을 마저 쫓아 소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군세가 많이 줄었겠군.”
“그렇습니다.”
기병들의 방문은 단순히 비보만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의 승하와 녹영의 와해로, 더는 등래대원수군과 싸움이 불가능해져 도움을 구하려는 것이다.
“알았네. 합류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다.
등래대원수의 토벌은 산동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홍태주의 죽음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계획은 재고해야 했다.
이완의 조공을 불러 합류시켜야 할까?
아니면, 계속 관창을 점령하게 둘까.
조선군의 원래 계획은 홍태주가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노출된 관창을 모두 점령해 등래대원수의 군세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태주가 죽고 그의 군대가 축소한 지금은, 더는 시간이나 적의 관심을 끌어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관창을 포기한다면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중원의 방대하고 즐비한 거성을 일일이 무력으로 점령하려 든다면 손실이 클 텐데…….’
결국에는 보급을 타격하는 전술이 여전히 최선이라는 뜻.
정충신은 턱수염을 거듭 쓸어내린 끝에 말했다.
“저하께서 이쪽으로 합류하시는 게 맞겠군.”
“내주는 공략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지금 상황에 공성을 거는 건 상책이 아닐세. 그럴 필요도 없지. 등래대원수가 관창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쪽에서 찾아올 테니까.”
금나라로서는 달갑지 못할 제안이었다.
최초로 함락시킨 등주는 본디 조선령으로 두기로 합의된바.
그 외에 해안에서 100리里보다 더 안쪽에 있는 내지는 금나라가 가져가기로 했는데, 내주를 함락시키지 않는다면 내지를 가져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수행할 군사력을 상실하고 등래대원수군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게 된 금나라였다.
“저하께 전달하겠습니다.”
“부탁하지.”
* * *
호격은 이튿날이 되어 합류했다.
그동안 정충신은 세 곳의 관창을 확보한 뒤였고, 패잔병이나 다름없이 급급하게 파괴된 관창의 흔적을 쫓아온 호격은 지친 군사들과 함께 급히 침소에 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한계였으니 좀 쉬자는 가벼운 항의였다.
때마침 정충신의 군사들도 작게나마 연전을 거쳤으므로, 주둔지를 세우고 천막을 펼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금국군金國軍의 진영을 살피고 왔는데, 수효가 원래의 십분지일 수준이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정충신이 쓰게 답했다.
“원수가 이끄는 조공만 못하게 되었군.”
“금한이 말한 정예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요?”
“무슨 말인가.”
“금한은 전투를 거듭하고 나면 정예만 남을 거라지 않았습니까. 지금 금세자가 이끄는 군대는, 실전으로 연마됐고 혼란한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고 남은 자들입니다.”
“흠.”
정충신은 짧게 콧김을 내쉬고는 답했다.
“일리는 있군. 하지만 금세자나 금국군 앞에서 말하지는 말게.”
정예를 양성한다는 게 이런 식은 아니었을 테니까.
“퇴군을 청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군대를 수습해 쫓아온 걸 보면 전의만은 충분한 사람이야. 굳이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지.”
“명심하겠습니다.”
정충신은 제장을 시켜 당보군塘報軍과 첨병을 퍼뜨렸다.
당보군이란, 깃발을 가지고 주변의 높은 곳에 올라 일대의 동향을 감시하는 병사.
주둔지를 차리고 휴식에 돌입한 만큼, 기습을 방비할 필요가 있었고 겸사겸사 당보군과 첨병을 퍼뜨리면서 전장도 파악할 생각이었다.
* * *
그리고 그날 밤.
병사들은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천막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찌르찌르 풀벌레 우는 가운데 병사들의 뒤척이며 배를 긁고,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함께 잠자리에 든 병사들은 이따금 신경질을 냈지만…….
외곽에서 화등을 피워놓은 채 깜깜한 바깥을 멍하니 주시하는 경계병들로선 그마저도 부러웠다.
그러던 중이었다.
멀리 남색 하늘과 시커먼 산봉우리가 맞닿은 지점에서 빛이 났다.
빛은 제가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닌 신호를 주기 위해서라는 듯 필사적으로 깜빡, 깜빡, 깜빡…….
점멸을 반복했다.
그 광경에 멍하니 밖을 보는 듯 마는 듯했던 경계병도 단숨에 정신을 차렸다.
“어어, 저거?!”
“당보군 신호다! 인간들 깨워!”
주둔지는 금세 코 고는 소리가 묻힐만큼 시끄러워졌다.
자다 깬 병사들은 무기만 챙겨 천막을 빠져나왔고, 장수들은 그런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으며, 이는 곧 정충신에게도 전해졌다.
“북쪽에서 당보군의 점멸 신호가 있었습니다. 야간에 적의 접근을 포착한 걸 보아, 등래대원수군의 주공이 산 너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충신은 투구를 눌러쓰며 답했다.
“잘 쫓아왔군. 기병들을 보내 놈들이 당장 공세를 펼치고자 하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게.”
“예!”
부관이 서둘러 물러나고, 그새 잠기운을 몰아낸 정충신은 맑기 짝이 없는 밤하늘을 마주했다.
딱히 연기는 보이지 않음에도…….
처음 산동에 발을 디뎠을 때 맡은 탄 내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전운戰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