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6화
“오랑캐 놈들 기세도 예전 같지 않더군. 골치깨나 썩였던 홍洪도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한밤중.
등래대원수를 자칭한 진광부는 횃불을 든 선두를 따르며 지난 전투의 소회를 드러냈다.
이에 곁의 부하가 비위를 맞췄다.
“양호楊鎬 같은 무능한 놈이 아니라 대원수께서 토벌을 맡으셨어야 했습니다.”
양호는 살이호지전에서 명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자.
명을 상대로 반역한 진광부이나 한때 요동군에 몸을 담았던 그다.
과거 요동에서의 연전연패가 직전의 살이호지전의 패전으로 결정되었던 만큼, 양호를 향한 진광부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겸손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군. 양호, 그 작자는 어떻게 되었지? 살이호 때 죽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패전한 책임을 물어 갇혔다가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고문을 당했겠지요.”
부하의 답에 양호는 조소를 터뜨렸다.
“한심한 죽음이로군. 고작 그런 꼴이나 되려고 무수한 장병을 사지로 내몰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언뜻, 사지死地에 매몰된 옛 전우를 아쉬워한 진광부는 달라진 현실과 자신을 자각하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조선군 차례다. 놈들은 만만치 않을 거야.”
“놈들은 왜 바다 건너에서 여기까지 찾아와 깽판이랍니까?”
“황제가 사주했겠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긁어모은 금은을 바치면서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래서 우리가 거의한 게 아니었습니까?”
요동의 패잔병들을 해산시키는 대신 재배치하면서도, 지원이라곤 일절 없었다.
덕분에 막 요동에서 탈출한 패잔병들은 헐벗고 굶주린 상황에서 직접 주둔지와 식량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심각했던 게 식량이었다.
먹지 못하면 살지도 못하는 법.
잠깐은 사냥으로, 때로는 소일거리를 찾아서, 철면피를 깔고 관과 유지들에게 구걸하여 버텼지만, 이는 장기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일부는 견디지 못해 탈영하였으나, 본디 요동에 적을 둔 그들이 탈영한다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버려진 패잔병들은 그렇게 도둑이 되고 강도가 되었다.
“이 나라가 망할 때가 되었다는 방증이다. 조선이 백 배, 천 배로 쳐들어와 우리를 꺾은들 명나라가 살아남겠느냐?”
진광부에게 명나라는 알아서 망해가고 있었다.
이미 사천과 산서에서도 제각기 봉기가 일어나 북경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오랑캐와 조선을 부른 것도 구차한 미봉에 불과할 뿐.
덕분에 북경에 깃발을 꽂지 못하고 회군한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뭐, 침략자들을 격퇴한 다음에는 마저 남진하여 남경이라도 노리면 되겠지.
진광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그때, 정면에서 병사 몇 명이 어둠을 헤치고 다가와 보고했다.
“대원수 전하, 산자락 너머에서 패퇴한 오랑캐 무리와 조선군이 함께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에 진광부 곁에서 부하가 말했다.
“제 버릇은 개 못 주는군요.”
“그래. 하찮은 오랑캐들이 또 조선에 의탁했구나.”
홍태주가 거듭한 패전과 몰락으로 끝내 조선에 굴종했다는 건 산동에서도 익히 알려진 사실.
한때 대명의 존속마저 위협했던 금나라의 하찮은 결말에 모두가 조소했다.
“마침 잘 되었다. 오랑캐들이 마저 도망치지 않고 조선군과 한 데 있다니, 같이 토벌해버리면 되겠구나.”
오랑캐가 무모한 싸움을 걸어오는 동안 조선군은 뒤에서 식량 창고들을 털어갔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태.
계속 내버려 두다간 군대가 굶주릴 판이었으므로 조선군을 저지하고자 서둘러 남진하던 중이었는데 일석이조의 구도가 나왔다.
“주둔지를 펼쳤다는 건 태평하게 쉬고 있다는 뜻이겠지?”
진광부는 곧장 떠오른 좋은 생각을 말했다.
“기병을 보내라. 오늘 밤 놈들을 악몽으로 지새우게 만들어줘야겠다.”
* * *
탕!
총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산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골짜기를 선두에서 질주하던 기병의 말이 고꾸라졌고, 좁은 길목에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선두의 기병 무리는 곧바로 한데 엉켜 무너졌다.
“적이다!”
뒤늦은 외침에 회답하듯 골짜기 좌우로 총성이 연이었다.
풀벌레와 산새 우는 소리는 이미 그친 와중, 기습을 가하려다 되려 기습을 당한 등래대원수군 기병들은 쓰러진 전마戰馬의 시체를 방패 삼아 몸을 움츠렸다.
기대할 수 있는 변수라곤 뒤따르는 아군 기병들.
그러나,
“적의 매복이다! 모두 협곡을 나가라! 말머리를 돌려! 빨리!”
유일한 희망이었던 동료들은 차마 사지로 달려들지 못하고 낙오자만 몇 명 더 남겨놓은 채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뒤이어 멎은 총성과 함께 양쪽 골짜기에서 남색의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내려왔다.
“큭, 죽여라!”
낙오한 기병들은 자존심을 부렸으나, 총성이 이어지는 동안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숨어버린 그들이다.
포위당한 지금이라고 저항할 용기는 없었다.
낙오한 기수들은 두 손이 포박되었고, 낙마하며 다리가 부러진 한 사람만이 처우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놈은 어떻게 하지요?”
“데려갈 게 아니라면 없애버리는 게 맞지.”
“자기가 원해서 다리가 부러진 건 아니잖습니까.”
“그럼 다른 놈들이 부축하게 해. 그래도 이동이 지체되면 없앤다.”
통역이 있었고, 두 포로가 각자의 어깨를 빌려주어 다리가 부러진 기수를 부축했다.
조선군이 특별히 잔혹하거나 냉정해서 내린 조치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지켜야 할 비밀이 있었고, 포로가 된 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뿐.
통역이 있고서 포로 두 사람이 각자의 어깨를 빌려주어 다리가 부러진 기수를 부축해 주었다.
“주둔지로 보내.”
* * *
조선군 주둔지에서.
포로의 심문을 마친 부관이 지휘부를 찾았다.
상석에는 도원수 정충신이 자리해 있었고, 바로 오른편에는 금나라 세자 호격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부관은 두 사람과 제장 앞에서 보고했다.
“도원수 대감의 짐작이 옳으셨습니다. 적들은 우군의 휴식을 방해하고자 기병을 보냈습니다.”
“이외의 야습 계획은?”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놈들 딴에도 열심히 쫓아오느라 지쳤던 모양이군.”
체력이 충분했다면 기병만 보내는 게 아닌,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했을 터.
마침 부관은 도원수의 짐작에 도움 될 정보를 알고 있었다.
“예. 등래대원수군은 전날 묘시卯時(오전 5~7시) 초에 기상하여 지금까지 행군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소수의 기병을 간헐적으로 보내 우리의 휴식은 방해하고 그동안 자신들은 푹 쉬어서 아침에 팔팔한 상태로 공격하겠다……. 그런 계획이었겠군.”
“소관도 그리 짐작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百戰하여도 불태不殆라.
정충신은 예기치 않게 막 합류한 우군을 제하고는 조선군의 내부를 속속들이 알았다.
그리고 포로에게서 적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았으니, 이를 활용할 수 있을 터.
정충신은 그 전에 한 가지를 확인해두고자 했다.
“포로들이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던가?”
“떠보았지만, 아는 듯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을 느끼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이 생사가 걸린 와중 미묘한 이상을 감지해 낼 수 있을까.
보통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적들도 우리의 비밀 병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예.”
“……좋아. 놈들의 계획을 그대로 돌려주어야겠다.”
몇 사람이 곧 벌어질 일을 짐작하고서 조소를 지었다.
그 광경에, 잠자코 있던 호격이 통역을 통해서 물어왔다.
“그 비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이국 군대의 비밀 병기라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볼 법도 하건만, 호격은 사리기보단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지난 격전으로 한을 잃고 군대는 무너진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후계자의 지위뿐.
당돌하다면 당돌한 것이고, 뻔뻔하다면 뻔뻔한 것이었다.
“비밀은 비밀로 남겨둘 때어야만 흥미로운 법이지요.”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처지에, 우군에게 무슨 병기로 적과 맞서는지도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오?”
“소관이 알려주지 않아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
호격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자신을 향한 조선군 장수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헛기침으로 감정을 갈무리했다.
“일부러 숨기는 건 아니리라 믿겠소.”
“물론입니다. 해가 뜨면 실체를 직접 보여드리지요.”
정충신은 제장을 돌아보며 일렀다.
“시행하게.”
* * *
아직은 으슥한 시각.
기병대를 통한 야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등래대원수 진광부는 즉각 군영을 펼치고 경계를 세웠다.
적이 기습에 대응했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알았고 방어를 했다면 역습이 올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격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나머지 병사를 휴식시켰다.
“외곽에 불을 피워서 적이 야습을 걸어오지는 않는지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라. 화등이 부족하면, 모닥불을 피우고 횃불이라도 들게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진마다 기병들을 차출해서 적을 혼란시켜. 곱게 재워주면 안 돼. 효시와 화전火箭을 지참하게 해.”
“예.”
야간을 책임지는 부하에게 간밤의 계획을 전한 진광부는, 노려보면서 덧붙였다.
“내가 자다가 깨는 일이 없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하도록.”
진광부는 몸을 돌려 사라졌고, 엄명을 받은 부하는 함께 야간경계를 맡은 수하들을 닦달했다.
그리고 병사를 주둔지 주변에 세워두고, 불을 피웠으며, 일부는 근처로 보내 부족한 땔감을 모아오게 했다.
파스스!
갓 부러지고 꺾인 나뭇가지와 솔가리 따위가 모닥불마다 뿌려졌다.
습기를 머금은 땔감은 매캐한 연기를 퍼뜨리며 탁탁 시끄럽게 타올랐다.
덕분에, 근처에서 경계를 선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연발해야 했다.
“쿨럭, 쿨럭, 쿨럭……. 이 멍청한 놈들은 젖은 땔감을 태우면 개판이 난다는 걸 모르는 거야?”
“케흑! 제길. 높으신 분들이 뭘 알겠어? 그냥 나무라면 다 타는 줄로 알지.”
“염병할.”
“잠깐.”
“어?”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뭔…….”
이상이 발생한 건 그때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탕!
일순의 화염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타탕! 타타탕!
경계병들이 귀를 의심할 때쯤, 환청의 가능성을 부정하듯 총성이 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쩍거렸고 경계를 선 병사들은 횃불과 함께 쓰러지고 모닥불 위에 엎어졌다.
불씨가 하늘로 비산하며 경악 섞인 비명이 사방에 울렸다.
“무슨 일이야?!”
엄포를 놓았던 진광부였으나, 소란이 이처럼 커서야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적습입니다!”
“이 덜떨어진 자식,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나?! 왜 멍청하게 당해주고 있냐는 말이야! 기병들을 보내!”
“…그게!”
진광부의 부하는 답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화창火槍이란, 불이 붙은 화승으로 화문의 화약을 터뜨려 격발하는 것.
그렇다면 한밤중에는 불붙은 화승이 보일 수밖에 없다.
아니, 보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