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7화
탕!
총성과 함께 섬광이 점멸한다.
이곳에서 번쩍, 저곳에서 번쩍.
섬광이 같은 자리에서 나타나는 일이 없었으므로 등래대원수 진광부의 병사들은 직감적으로 적이 계속 움직임을 알았다.
빛을 쫓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몸을 내던지더라도, 기다리는 건 막연한 술래잡기뿐.
차마 그럴 용기가 없던 병사들은 놀란 닭처럼 도망 다니며 픽픽 죽어가기를 한참.
누군가가 정신없이 달리던 와중 모닥불을 걷어찼고, 불씨가 잿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가 어둡게 내려앉았다.
눈치 좋은 이들에게는 발상의 기회였다.
“불을 꺼!”
“그래! 불을 꺼라!”
“전부 엎어버리고 뭉개 버려!”
무수한 광원을 두고 마구잡이로 그림자와 인영이 뒤섞이는 동안, 그것을 저지하려는 듯 총탄이 쏟아졌다.
타타탕! 타타탕!
난사하듯 쇄도하는 총탄에 병사들은 어둡고 혼란한 와중 제가 맞는지, 맞지 않았는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자각했을 때는 차가운 흙바닥 위에 엎어져 마지막으로 주어진 호흡만을 고를 따름.
그러한 와중에도 살아남고자 하는 병사들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하나둘 광원이 사그라들었다.
잿불마저 서로의 발을 짓밟아가며 꺼뜨린 끝에…….
어느샌가 총성도 멎어 있었다.
“……살았나?”
누군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런 기대를 배반하듯 날아오는 총탄은, 없었다.
정녕 적들은 물러간 것일까.
불투명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당장의 소란이 그친 데 안도하며, 미동하지 않는 우군의 물컹한 시체를 밟고서, 조금씩 흩어졌다.
“…….”
진광부에게는 두려운 광경이었다.
단지 적들이 유령이라도 된 듯 종잡을 수 없는 위치에서 총탄을 갈겨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역시 물론 두렵고 무서운 일이나, 진정으로 두려운 건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야음을 틈타 적이 습격이라도 하면 어쩌지?’
모든 불을 소화해버려 적아의 구분조차 힘들어진 상황.
적 역시 그러한 맹점을 감수하고 소수의 병사를 보내 야습한다면, 진광부의 병사들은 혼란 속에 동족상잔을 거듭하다 자멸해 버릴 수 있었다.
‘……불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불을 피웠다가 다시 표적이 된다면?
그의 병사들부터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 역시 항명 끝에 군대가 와해될 터.
“……으음!”
한참 입술을 짓씹던 진광부는 어렵사리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는 상대가 안 된다.
적에게 휘둘리는 상태로 교전에 들어갔다간 필패다.
싸움의 결과를 결정할 힘이 그들에게 적에게 있으니까.
일대가 조선군의 손바닥에 들어와 있음을 인지했을 때 목책부터 서둘러 세웠어야 했다.
병사들에게 총탄을 피할 엄폐물이 있었다면 더 여유롭게 대처를 고민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진광부는 적의 진영을 일방적으로 유린할 줄로 착각했고, 수비적인 행위에 시간과 기력을 투자하지 않았다.
이 순간 궁지에 몰린 건 그 때문이었다.
자만이라면 자만 때문.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고, 진광부는 이번 싸움은 성립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퇴각한다.’
진광부는 무너진 천막과 쓰러진 시체, 뜨끈한 잿가루와 질척거리는 핏물을 더듬으며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의 신원을 물었다.
“부관이냐?”
“아, 아닙니다.”
“부관이냐?”
도리도리.
‘이 멍청한 놈,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으면 보이겠냐?!’
얼핏 보이긴 보였다.
진광부는 계속해서 신원을 물어나갔다.
“부관이냐?”
“아닌데유…….”
“이런 제기랄. 부관을 본 적은 있고?”
“없는데유…….”
진광부는 입술을 짓씹다가, 이러다간 영원토록 부관을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대놓고 외쳤다.
“부관! 진 부관! 진계공陳繼功! 죽었나?!”
죽지 않았다면 회답이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부관을 찾은 진광부였으나, 돌아온 건 총성뿐이었다.
탕! …타타타탕!
총성과 섬광이 연이었고, 죽다 살아난 진광부의 병사들은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 경악하며 다시 뛰어다녔다.
“공격이다!”
“습격이다!”
“갸아아아아악!”
“도망쳐!”
다시 도진 대혼란 속에서 진광부는 목이 헐도록 외쳤다.
“멈춰! 진정해라! 어둠 속에서 쏜 총탄이다! 맞지 않는단 말이다!”
진광부가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불이 없어 보이지 않는 와중 야습이란 병사들에게 먼젓번 습격 이상으로 충격이 강했다.
목책이 없어 본디 경계도 없었던 주둔지.
다급한 발소리와 질겁한 비명은 한계 없이 흩어졌고 진광부는 이것이 결말임을 깨달았다.
자멸.
예상은 했으나, 이런 식일 줄 몰랐을 뿐.
“…….”
진광부는 자신을 툭툭 밀쳐대며 도망치는 병사들을 무시하고서, 그 역시 어딘가로 향해 나아갔다.
그곳이 적의 아가리 속만 아니길을 빌며…….
* * *
이튿날 새벽.
산 너머에서 아련히 울리는 총성과 비명을 자장가 삼아 푹 쉬었던 조선군 수뇌부와 금나라 세자 호격은 트는 동을 뒤로하고 적지를 방문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군요.”
폭풍이 의지를 가지고 적진을 쓸어버린 듯, 적의 주둔지는 폐허가 따로 없었다.
쓰러진 천막과 무너진 기물들 사이로 시체가 듬성듬성 내버려졌고, 한데 쌓인 물자들은 덩그러니 식어 있었다.
그 양이 대군을 먹이고 무장시키기 위함인 만큼 작지 않았는데 도원수 정충신으로선 보는 것만으로 침이 돌 정도였다.
이에 부관이 물었다.
“신종 항복법일까요?”
몇몇 사람이 피식피식 웃었다.
“농이란 건 알지만, 그것과 별반 다르진 않군.”
등래대원수의 군대는 공포에 젖은 채 와해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이것이 두 번째이며, 지난 전투와는 달리 어떠한 성과도 없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자멸해 버린 만큼 수습이 쉽지 않을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꼴을 당하고서 누가 또 조선군과 대적하고자 할까.
대개는 어딘가에 틀어박혀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터였다.
“이제 남은 관창만 느긋하게 털면 되겠군.”
“도시에 항복을 권유해보시지요. 대원수의 군이 깨강정 났다는 건 금세 알려질 테니 받아들이는 곳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도 괜찮겠어.”
정충신이 만족하자, 곁에서 금한의 후계자 호격이 물었다.
“이게 도원수가 말한 비밀 병기의 성과요?”
“그렇습니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이렇게까지 와해하였으니 더더욱 호기심을 억누르기 어렵소. 그 비밀 병기라는 게 무엇인지 봅시다.”
약조도 했겠다, 정충신은 부관에게 끄덕였고 곧 부관이 조총 한 자루를 가져왔다.
“이게 조선군의 비밀 병기입니다.”
“흠?”
호격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조총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적大賊을 와해한 비밀 병기라기엔 흔히 보아온 조총과 너무나 유사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격발 방식일까.
용두龍頭에 화승 대신 부싯돌이 물려 있었고, 그게 차이의 전부였다.
“으음…….”
호격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낯으로 조총을 다시 돌려주었다.
야간전에서의 위력을 직접 마주한 게 아니었으므로, 이것이 고대하던 조선의 무시무시한 신무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총검도 마찬가지였다.
조총에 환도를 고정하여 단창으로 급조할 수 있을 뿐.
그 단순함에 호격은 큰 감상을 받지 못했다.
직접 당해보면 생각은 달라지겠으나, 조선과 금나라는 현재 애매한 공존을 이어가는 중.
호격은 시답잖은 신무기보단 조선군의 뛰어난 전투력이 승리에 기여했다고 판단했다.
“다 보셨습니까?”
“그렇소.”
정충신이 손짓하자 부관이 조총을 다시 가져갔다.
“저희는 원래 계획대로 관창을 점령해나가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나는…….”
호격은 엉망진창인 적의 진지를 돌아보았다.
“적이 정상적으로 퇴각한 게 아니, 산지사처散之四處한 적의 패잔병들을 찾아 격멸하겠소. 그편이 그대들에게도 뒤가 덜 가렵겠지.”
정충신은 배려에 감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이외에는 쪼그라든 호격의 부대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 * *
산동에서 바다 건너 동쪽.
반도 땅의 수도인 한양에서는 시시각각 보고를 전해 받으며 이역만리의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금나라 군대가 내주 동쪽 20여 리에서 패퇴, 홍태주가 전사하고 녹영군 대다수가 와해했다고 하옵니다.”
병조판서 김세렴이 보고했다.
신하들이 모인 이곳은 옛 비변사 청사가 아닌 어전.
대신 모두의 앞에 거대한 탁상과 지도가 놓여 현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김세렴은 보고와 함께 내주 방향을 향했던 금金 깃발을 넘어뜨렸다.
이에 왕이 모두의 생각을 대신해 말했다.
“홍태주가 죽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장계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 세자인 호격이 잔당을 이끌고 합류했다고 합니다.”
“홍태주가 전투와 전사를 가장해 자신과 주공主攻을 위장했을 가능성은?”
“혹 아조를 배반했다간 본토와 바다를 두고 떨어진 적지에 보급도 없이 고립되는데, 그런 무모한 행동을 벌일 가능성은 작다고 사료하옵니다.”
육지로 이어진 가까운 곳에서라면 모를까.
바다 건너에서 배반한들, 그것으로 창출할 이익이 없었다.
혹여 내막이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무방비하게 노출된 금나라의 본토가 바로 공격당할 테니까.
“흐음…….”
왕은 쓰게 침음했다.
여러 사정을 살펴본다면 정말로 홍태주가 죽은 듯했다.
하지만, 홍태주는 이전의 역사에서는 중원의 정복자였으며 청나라를 진정 제국의 반열에 올린 영웅이었다.
그런 인물이 고작 반란군을 상대로 전사했다니, 믿기 어려울 수밖에.
“사람의 목숨이란 때론 말도 안 되게 끈질기면서도, 또 때로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스러지는군요. 홍태주는 아조를 크게 고생시킨 만큼 곱게 죽을 위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어전의 중신들 역시 무언으로,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이 멋쩍은 감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한 하급 관리가 어전으로 들어섰고, 도승지 이덕형이 내려가 장계를 받아왔다.
끈을 풀고 권자卷子를 펼쳐 내용을 살펴보니 역시나 정충신의 것이었다.
다시 권자를 말아 건네니 이덕형이 김세렴에게 전해주었다.
“어인 일인가?”
좌의정 박홍구가 김세렴을 채근했다.
김세렴은 고개를 짧게 까딱여 양해를 구하고는, 마저 장계를 일독한 뒤 막대를 들어 지도의 등래登萊 깃발을 쓰러뜨렸다.
“……!”
“도원수의 군대가 야습을 걸어온 적 대원수의 군대를 상대로 역습하여, 군세를 완전히 와해시켰다고 합니다.”
“허어, 야습에 역습이라!”
박홍구의 찬탄에 다른 재상들도 뒤따라 감탄했다.
전장에 대한 이해도는 낮을지라도, 말만 들어도 쉽지 않은 위업임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도원수가 진정 지상의 이순신이 되려나 봅니다.”
우의정 이상의 또한 찬탄했고, 왕은 안도한 기색으로 낯을 쓸어내렸다.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법.
마음 한구석에서는 만에 하나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등래대원수의 군이 와해했다면 승전은 이미 따놓은 셈이었다.
‘지상의 이순신이라…….’
과연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