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9화
“적은 관창도 잃었고 대군의 보급품도 모조리 상실했습니다.”
원수 이완이 말했다.
“우리는 산더미 같은 식량을 비축해둔 채 기다린다면, 적은 자멸과 목숨을 거는 것 중 선택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이완의 제안에 호격도 찬동했다.
“적에 가담한 종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불순분자들이요. 원수의 말대로 주어진 것을 기회 삼아 일망타진을 노리는 게 어떻소?”
조선군의 원래 계획은 등래대원수군의 보급을 무너뜨린 뒤, 적의 자멸을 관망하다 적절한 시기에 다시 개입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와 군벌에 대한 반감이 모두 커야 조선이 힘들이지 않고 통치를 실현할 수 있으니까.
함정을 파 두고 적을 소탕하자는 이완과 호격의 제안은 이러한 원래 계획과 달랐다.
“적지에 오래 주둔하며 추가적인 충돌을 감수한다는 건, 인명과 사기의 불필요한 손실을 의미합니다.”
“내가 단단히 단속하겠네.”
“진광부와 놈의 수하들은 지금 단속해두지 않으면 화근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 놈들은 반역도 아닌가? 살려두었다간 후과를 면치 못할 거야.”
이완과 호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밀어주며 지지하니, 정충신도 다시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홍태주가 사망한 지금 호격은 장차 금나라를 통치할 자.
아직 연배도 많지 않은 만큼, 장기간 금나라를 통치할 공산이 컸다.
그런 인물에게 조선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겨 이로울 건 없었다.
‘화근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극단적인 방법도 있지만…….’
요동은 조선이 차지하기로 한 등주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혼란한 영역.
무턱대고 금나라를 멸망시켰다간, 요동에서 다시금 폭주한 혼란이 조선까지 어지럽힐 수 있었다.
조선이 금나라와 어색한 공존을 이어가는 이유.
이러한 이점마저 포기하고 호격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엔, 마땅히 얻을 것도 없었다.
반하여 호격이 바라는 건 금한으로 즉위할 때 필요한 업적과 입지뿐.
‘부왕은 전사했고 군대는 축소했으며, 점령지는 얻지 못하고 성과는 미미하니.’
구차해질 수밖에 없다.
정충신은 속으로 결정에 따른 장단기적 이익과 손해를 계산한 뒤 답했다.
“좋습니다. 등래대원수가 논밭의 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도 하니, 가까운 곳에 주둔하기 용이한 장소를 찾아 머무르면서 조정의 판단을 기다리지요.”
“잘 생각하셨네!”
반색하며 외친 호격이 덧붙였다.
“혹시나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다고 불만을 품는 자가 나타난다면, 내게 보내주게. 뒤탈이 없도록 해결해 주지.”
“그러지요.”
물론, 만에 하나라도 호격에게 부하의 처분을 맡길 일은 없었다.
* * *
잠시나마 질서가 유지되었던 산동이 다시 전쟁터가 되고, 등주마저 파괴되자 수십만에 달하는 유민이 발생했다.
유민 대부분은 남쪽으로 향했다.
쉽지 않은 여행이 될 테지만, 일단 강을 넘어가면 덜 소란스러운 영역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착은 쉽지 않겠으나 당장 산동에서는 생존부터 쉽지 않았다.
적어도 강 남쪽에는 희망이 있었다.
북쪽의 유민 중 극소수는 더 북쪽으로 향했다.
북직예는 산동보다 먼저 전쟁터가 되어 혼란스러웠지만, 누군가는 황제라는 존재를 믿었다.
황제란 천하에서 가장 지고하며 동시에 제국을 다스리는 이.
그런 자가 기거하는 북경이라면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혼란한 시대였고, 살고자 한다면 그런 막연한 기대라도 부여잡는 수밖에 없었다.
해안에 가까운 일부는 아예 중원에서 탈출했다.
어떻게든 배를 구해, 해동에서 성세를 이룩했다는 조선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망망대해를 가로지를 수는 없었으므로, 바다로 나선 유민들은 일단 최근 조선령으로 편입된 비사성으로 향했다.
비사성은 과거 명나라가 통치하고 요동이 번화했던 시절에도 소외되었던 지역.
사는 사람은 적고, 미개간지는 많으며, 위협적인 오랑캐는 물러났고 대신 강대한 조선이 다스리는 중이었다.
이상적인 정착지로서는 최고의 조건.
또 일부는, 조선의 군정이 설치된 반도의 동쪽 끝자락으로 향했다.
몰락해가는 제국과 혼란한 군벌들의 전장, 그리고 바다를 건너는 위험 전부를 감수할 수 없었던 유민들에게 조선의 군정은 대안으로 훌륭한 선택지였다.
언어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최근 군정의 영역에 들어선 유민들 앞에서 조선군 무관이 말했다.
“조선령에서 살고자 한다면 조선말을 배워야 하오.”
“어째섭니까?”
“조선령이란 조선 사람이 사는 영역이기 때문이오.”
“꼭 조선말을 해야지만 조선 사람입니까?”
“조선 사람인데 조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는 벙어리 밖에 없소.”
조선은 어렵사리 확보한 등주를 일시적인 점령지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발해만을 조선의 바다로 남겨두기 위해서는 발해만의 관문인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의 끝자락 모두 확고부동한 조선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민들이 달라져야 했다.
조선군이 산동의 혼란에 일조했더라도 별수 없다.
물밀 듯 쏟아지는 그들이 언제까지고 중국인으로 남는다면, 그들이 들어찬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끝자락 역시 언제고 다시 중원의 세력에 흡수될 테니까.
“보호를 받고자 한다면 조선 사람이 되어야 하오. 우리는 조선의 군사니까.”
무관의 엄포에 유민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대개는 일자무식에 늘그막이라 새롭게 배운다는 게 여의치 않은 신세들이었다.
하물며 새로운 터전을 찾아온 그들에게, 정착과 함께 새로운 말을 배운다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가 알아서 조선말을 배워야 합니까?”
이에 무관이 답했다.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소. 지금 내가 그렇듯, 군정의 많은 사람이 중국어를 알고 있고 그대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줄 거요.”
유민들은 다시금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그중 한 사람이 나섰다.
“그럼 조선어를 배워보겠습니다.”
뒤이어 다른 유민들도 앞다퉈 따랐다.
* * *
마침 조선어는 글자를 배우기 쉬웠고, 많은 단어가 한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적극적인 언어 교육이 더해지니,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유민들도 그런대로 조선어를 발휘하게 되었다.
많이 어색하고 중국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았으나 기간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진전이었다.
계획을 달성한 건 등주에 주둔한 조선군만은 아니었다.
산동에서 보다 북쪽.
순나라는 북직예에 이어 북경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제국의 수도로서 극도로 번화했던 거리는 약탈 끝에 화염으로 물들었고, 나라와 백성을 착취하며 무수한 부와 권력을 향유해 온 위정자들은 갖은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잿가루 뒤덮인 거리에 검붉은 핏물이 가로질렀다.
화룡점정은 엄당의 영수이자, 북경을 최후까지 주물렀던 위충현이었다.
다 죽어가던 천계제가 남몰래 붕어한 뒤.
위충현은 순나라 병사들에게 끌려 나오기 전, 정당한 주인이 사라진 용상에 앉아 있었다.
직접 황제가 된 심정을 느껴보고팠을까.
“미천한 놈들!”
그러나 그런 위충현은 양팔이 붙들린 채 죄수처럼 거리로 끌려 나왔다.
“네놈들 따위가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몸이 아니다!”
위충현은 마구 몸을 비틀어 저항했으나, 가느다란 두 팔로 억센 병사들을 떨쳐내기란 불가능했다.
그간 황제마저 부럽지 않은 힘을 누려왔고, 끝내는 황제의 자리에도 앉아본 위충현이었으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하늘 아래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대명이 고작 이런 볼품없는 늙은이에게 휘둘렸다는 말인가?”
순나라 장수와 병사들 사이에서 유난히 화려한 갑주를 걸친 자가 말했다.
초대 틈왕 왕가윤이 허무하게 폭사해버리자 뒤를 이어 차기 틈왕으로 즉위한 이자성李自成이었다.
그는 입맛을 버렸다는 듯,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잘 먹고 잘산다기에 토실토실 살이라도 잘 올랐을 줄 알았거늘.”
이전의 역사에서는 명나라의 황족,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삶아먹은 이자성이었다.
이번 역사에서도 발상은 다르지 않아, 이미 죽어 묻혔다는 황제를 대신해 그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른 위충현이라도 삶아 먹고자 했으나…….
“저런 걸 잡아먹으면 있는 영화榮華도 달아나겠어.”
최후를 앞둔 위충현의 한심한 몰골은 괴식을 선호하는 이자성조차 입맛을 다시기 어려웠다.
“수육은 됐다. 그냥 산 채로 태워버려라.”
이자성의 흉흉한 명령에 병사들은 위충현을 최후로 인도했다.
위충현은 기겁하여 더욱 발버둥쳤으나, 이미 병사들을 이겨내지 못해 끌려온 그가 뒤늦게 발악한다고 탈출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위충현을 인도한 곳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연회용 솥 앞이었다.
“안돼! 차라리 목을 쳐서 죽여라! 비열하고 잔혹한 놈들! 그만! 그만해라! 멈춰!”
본디 솥 안이 위충현이 향할 장소였으나, 이자성은 생각을 바꿨고 병사들은 위충현의 오금을 쳐 무릎을 꿇렸다.
“카학!”
잿가루와 핏물 위로 쓰러진 위충현은 물씬 번져오는 열기에 헉 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치 불장난하다 잠든 아이처럼, 위충현의 하반신이 젖어들었고 흘러내린 소변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광경에 이자성이 대소했다.
“하하! 그것으로 불을 꺼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좋다, 노력해 봐라! 살아 남을지도 모르지! 하하하하!”
이자성은 제 무릎을 치며 부하들과 함께 폭소했고, 위충현을 붙든 병사들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위충현을 불구덩이로 밀었다.
“으아아아아!”
위충현은 번져오는 작열감에 비명을 지르고 소금 맞은 민달팽이처럼 발악하였으나, 그러한 저항도 어느샌가 멎었고 늙고 가느다란 몸뚱이는 땔감이 되어 검게 타올랐다.
한평생 권신의 도구로만 부려지다 죽은, 천계제가 바랐던 복수였다.
* * *
그리고, 내주.
등주 없는 등래대원수가 되어버린 진광부는 몇 달 사이 부쩍 말라붙은 얼굴을 한 채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유민의 탈출은 내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주민이 혼란과 굶주림, 강제 징병을 피하고자 내주에서 탈출했다.
황폐해진 내주의 빈자리를 채운 건 북경과 북직예에서 흘러든 또 다른 유민이었다.
대개는 마저 남쪽으로 향했으나, 일부는 도피에 지칠 대로 지친 채였고 옛 주인이 떠나간 집과 들에 기꺼이 의탁했다.
내주에 등을 붙이기로 한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린 건 아니었다.
어떤 유민들은 그저 며칠 더 일찍 내주를 방문해서, 운이 좋아 우연히 빈집을 차지해서, 마침 주인이 버리고 떠나간 집에 은근슬쩍 눌러앉았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을 누리지 못한 다른 유민들은 먼저 자리 잡은 유민들에게 착취당하거나 거리에서 뉘어야만 했다.
알량한 행운과 운수의 차이란, 낙오한 유민 대부분에게 격차의 정당한 이유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 유민들 사이에서는 손쉽게 차지한 우위를 손쉽게 빼앗기 위한 시도들이 무수히 벌어졌다.
지옥을 피해 도망 온 자들이 새로운 지옥을 만들어냈다.
밤낮으로 울려대는 비명과 간밤에는 보이지 않았다가 새로 생겨난 길바닥의 시체들. 수시로 주인이 달라지는 집과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
새로운 지옥은 내주에 남아 있던 원래 주민들까지 유민들로 만들어 어딘가로 쫓아내 버렸다.
오직 등주 없는 등래대원수의 군사로서 비빌 언덕이 있는 자들만이, 집단을 믿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뿐.
그러나 이마저도 이제는 한계였다.
조선군은 지난 전쟁에서 성 외부의 모든 식량을 가져갔고, 여기에는 등래대원수가 북직례 출정을 위해 긁어모은 보급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등래대원수의 군대는 굶주리는 중이었다. 내주의 최상위 포식자로 빼앗고 또 빼앗아왔지만, 비대한 집단의 덩치를 먹이기에는 항상 부족했다.
이제는 결단이 필요했다.
동쪽 저 너머의 적들이 의도한 대로.
진광부는 여명이 솟아오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