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62화 (26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62화

해가 바뀌어 봄을 앞둔 시점에서.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왔다.

정충신은 조선군의 대원수로서 등래대원수 진광부를 최소한의 피해로 토벌했으며, 청주가 신임 목민관들에게 인계되기 전까지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러니 한양에 귀환한 그가 모두에게 환영받은 건 당연했다.

“도원수.”

“전하.”

“한동안 못 본 사이 인상이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나 덕분에 고생을 적잖이도 하셨군요.”

“성세를 맞아 부월을 받들고 도적을 처단하였습니다. 어찌 고생이라 하겠사옵니까?”

“하하!”

왕은 쾌활하게 웃어주곤 함께 개선장군을 마중 나온 신하들에게 일렀다.

“경들이 나를 대신해 승전한 장병들을 맞아주세요. 나는 도원수와 함께 먼저 궐로 돌아가겠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꾸벅 허리를 숙였고, 왕은 몸을 돌려 어가御駕에 올랐다.

어가가 먼저 출발하자 정충신도 안장에 올라 어가의 옆을 호종했다.

“가까이 오세요.”

“예.”

“홍태주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금나라 군대가 등래대원수의 군대와 접전하던 중 적진에 파고들었다가 포환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시체는 확인했습니까?”

“예. 분명 홍태주가 맞았습니다.”

정충신의 확언에 왕은 미련을 떨쳐내고서 물었다.

“후계자는 호격이지요?”

“그러하옵니다.”

“됨됨이가 어땠습니까. 그가 금한에 오르면 조선에 해를 끼치겠던가요?”

“부친을 닮아 무용이 뛰어나고 사리를 읽으며 호승심은 있습니다.”

“…호승심‘은’ 있다.”

“예. 다만 냉정하지 못하고 소관 앞에서 자존심을 지킨 걸 보아 나서서 조선에 대항할 자는 아니었습니다.”

“머리 좋고 잘 싸우는데 호승심까지 있는 녀석인데, 무릎만 가볍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굴종하는 척하며 살살 눈치 보다가 여차하면 뒤통수 칠 놈들이나 보일 법한 모습이다.

호격은 이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중원의 정세는요?”

“신이 청주에 진주進駐하기 직전, 순나라는 왕가윤이 겸병부상서 홍승주와 폭사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등래대원수 진광부가 그 틈을 노려 북경을 노리는 모양새였습니다.”

왕이 경청하는 동안 정충신이 보고를 이어나갔다.

“신이 군대를 이끌고 청주에 진주하자 진광부는 회군하여 맞섰다가 패망했고, 순나라는 차기 틈왕으로 이자성李自成을 추대한 뒤 북경을 점령했습니다.”

“황제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소문에 따르면 황제는 북경이 포위됐을 때 진즉 죽었고, 그동안 용상에는 위충현이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위충현은요?”

“이자성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태워 죽였다고 합니다.”

“흐음…….”

삶아 먹지는 않은 건가.

왕은 잠시 고민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물었다.

“사천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전해지는 건 소문뿐이라 불투명하지만, 들리는 바로는 나전왕?甸王 안방언安邦彦과 대량왕大梁王 사숭명奢崇明이 각기 이끄는 오랑캐 무리와 그들의 수탈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난 농민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라 합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왕이라니 세상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개의치 마시옵소서. 근본 없는 무리들의 참칭이란 개가 짖어대는 것과 소리도, 의미도 다르지 않사옵니다.”

왕, 이라고.

“하하하…….”

* * *

대부분 장계로 보고받았던 내용이었지만, 정충신을 통해서 확실히 하고 싶었다.

특히 홍태주의 죽음은 최근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할 방도가 없어 묻어두고 지냈는데, 정충신이 돌아온 김에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중원을 정복하고 황제까지 했던 인물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물론, 그렇게 치자면 다이곤도 쉽게 죽을 인물은 아니었다.

끝내 홍태주를 극복하고 그의 적장자인 호격을 축출한 뒤 핏덩이를 앉히고 섭정을 빙자해 진짜 황제처럼 군림했으니까.

하지만 다이곤이 죽은 건 홍태주와 무력으로 대결했으며 여기에 조선까지 의도한 결과를 내고자 개입했기 때문이다.

홍태주의 죽음은 이에 반하여…….

그저 허망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던 건 홍태주가 이전 역사와는 판이한 결말을 맞아서만이 아니었다.

홍태주는 내가 즉위했을 때부터 2차 의주전투가 끝난 뒤에도 예의주시해 왔다.

이전 역사의 조선은 극복하지 못했던 숙적이고, 그 다운 재능과 성취를 모두 증명해 낸 인물이었으니까.

쉽지 않은 적이라 여겼고 과연 그러했으므로 생에 완전히 종말을 고하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을 숙적으로 여겼다.

그래서 더 허망했던 것이다.

너무 허망해서, 죽었다는 사실마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아들놈은 나와 맞설 수준이 아닌 듯하고.’

조선에 의해 생에 종말을 고한 다이곤에게 패했던 인물이다.

이번 역사에서는 다이곤이 사라지고 달리 경쟁자도 없는 만큼 금한의 후계를 잇는 데는 성공하겠지만, 정충신의 말을 들어보아 딱히 기대는 들지 않았다.

‘……명나라도, 금나라도 반쯤씩 보기 좋게 망했고 애들은 다 컸는데 숙적은 진짜로 죽어버렸군.’

분명 주변은 정리되었는데 뒷맛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어느새 어가御駕가 멈춰 슬쩍 고개를 드니 경운궁 앞이었다.

“도원수.”

“예, 전하.”

“여독이 많을 텐데 내가 괜히 호종까지 맡긴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옵니다. 개의치 마시지요.”

“돌아가서 장병들을 달래주세요. 아니면, 처소로 돌아가서 편하게 쉬어도 좋고요.”

“편찮으시옵니까?”

“갑자기 피곤해지는군요. 잠깐 못 본 사이 늙어버린 건 도원수만이 아닌가 봅니다.”

정충신은 놀란 얼굴을 하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물러나겠사옵니다.”

* * *

그로부터 보름쯤이 지났다.

개선장군의 귀환으로 들떴던 한양의 분위기도 차츰 가라앉고, 후한 대접을 받으며 승전의 기쁨을 누렸던 장병들도 해산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기존의 정예 부대를 대체했다.

북방군과 수방사, 원정군은 설립 후 몇 년 동안 실전과 험지 근무를 거듭해 왔다.

누군가는 전역이 필요했고, 숙련병인 그들의 자리를 메울 자로는 마찬가지로 험지에서 실전을 겪은 이번 군사들이 적합했다.

또 일부는, 완전히 해산했다.

원정을 전제로 한 군사력 증강이었으니 완정이 완수된 지금 다시 군사력을 감축하는 것이다.

해산한 병사들은 근속기간과 투입 횟수, 공훈 등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을 받았다.

기본은 점령지의 토지였다.

청주와 비사성의 광대한 토지는 전역자들에게 두 번째 도전을 제공했다.

그러나, 모험은 질린 이들을 위한 연금도 선택지 중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게 빠졌군요.”

병조판서 김세렴의 보고가 마무리되어가던 중이었다.

“하교하시옵소서.”

“전사상자의 처우는 말씀드리지 않았잖습니까?”

“그들 역시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옵니다.”

김세렴은 전사상자라고 보상 계획에서 딱히 배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딱히 무언가 더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통상적인 보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하께서는 참전자들에게 충분한 관용을 보여주셨사옵니다. 신은 병조의 판서로 예산을 사용하는 입장이옵니다만, 과도한 집행을 선호하지는 않사옵니다.”

“…과도한 집행이라니요?”

“해조에서는 각 장병이 감수한 위험의 정도를 보상마다 최대한 세밀하게 반영했사옵니다. 이는 전하의 특명에 기인한 것으로, 응당 고생하고 감수한 자일수록 더 나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논지는 신 또한 공감한 바이옵니다.”

“전사상자의 추가적인 대우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장병 개개인에게 발생한 전사상은 조정의 책임이 아니며, 지휘부의 실책 또한 아니옵니다.”

기계적으로 본다면 틀린 말만은 아니다.

각 장병이 감수한 위험성은 이미 보상에 반영했으니, 그 위험성이 실현되었느냐 마느냐는 개인적인 영역인 것이다.

단지 운이나 실력 부족에 따른.

“지나치게 건조한 관점입니다.”

“공무에 있어, ‘지나치게’ 건조한 관점이 있사옵니까?”

“백성의 눈으로도 보셔야지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이번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가족이나, 심각한 부상을 입어 여생 내내 구호가 필요해진 이들은 모든 백성의 잠재적인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될 위험성을 고려하여 책정한 보상안이옵니다.”

“나는 그렇게 되어버린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대담對談이 어째 공회전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영의정 이원익이 나섰다.

“전하의 하교는, 유족이나 전상자라면 보상의 합당함을 떠나 아쉬운 마음이 더 들지 않겠냐는 것일세.”

“나라에서 백성 개개의 사적인 감상까지 배려해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김세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백성들이 저들의 경우를 억울하게 여겨, 세간에 그리 말하고 다닌다면 신경을 써야겠지.”

“그건 바람직한 행위가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여론을 선동하는 건, 우매함의 발로고 벌 받아야 할 죄과이지요.”

“그래서 아프고 다친 사람이 제가 억울하다 하여 벌을 내린다면, 세간이 정의롭다고 하겠나?”

“…….”

김세렴은 차마 답하지 못했고, 나는 다시 그에게 일렀다.

“판서께는 옳지 않다고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판서만도 아니겠지요.”

“…….”

“그러나 감정적인 부분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유족과 전상자는 백성이 나라에 헌신한 결과예요. 우리의 생각이 어떻건, 그들 스스로가 억울하다거나 비참하다고 여기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군역의 결과인 유족과 전상자를, 저들 스스로와 세간이 억울하고 비참하다 여기는 사례가 늘어날수록 군역 자체도 억울하고 비참한 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합당하기만 한 정도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김세렴은 반박하지 못했다.

병조의 판서로, 군역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군대의 사기와 직결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터.

“원정에서 발생한 전사상자는 명단에 올려, 충훈부忠勳府에서 관리하게 하려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우의정 이상의가 나섰다.

“충훈부는 본디 공신들을 우대하는 기관인데, 그 기능을 전사상자들에게도 확대하자는 말씀이시옵니까?”

“충훈忠勳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충절忠로 세운 공훈勳이라는 뜻이다.

그게 있는 사람을 우대하고자 세운 관청이라 이름조차 그리 정해놓았는데, 전사상자들이야말로 충훈한 결과 아닌가.

“그리고, 달리 공신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요.”

충훈부는 거의 노는 중이다.

나의 즉위 이래 조선에는 반정과 많은 전쟁 및 공로가 있었지만, 이것이 공신 책봉까지 이어진 경우는 오직 반정뿐.

특권층의 남발은 공익公益을 그만큼 축소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재건하는 데만도 벅찬 상황이었다. 몇 줌 안 되는 나라의 이익을 흩어버릴 수는 없었다.

반정공신의 책봉도 정말 마지못하여 행한 것.

‘그때는 반정으로 막 즉위해서 신권은 압도적이고 나는 바지사장에 불과했으니. 딱히 결정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

그리고 반정과 함께 기존의 광해군 시절 책봉된 공신들은 모조리 삭제됐다.

덕분에 오늘날의 공신 집단이란, 의도적으로 조명되지 못하는 반정공신들과 늙어 일선에선 물러난 지난 임란 세대의 공신들뿐.

‘마음 같아서는 뒤쪽도 줄여버리고 싶지만…….’

선조가 아무리 병신에 머저리였어도 왕이었던 놈을 따라 고생한 게 공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게 정략적으로 과도하게 우대되었다는 점이 불합리할 뿐이지.

직접 임란을 극복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은 개차반 대우에다 선조와 수준 비슷한 놈도 하나 끼어 있는데,호성공신扈聖功臣은 머저리 똥 수발 해주었다고 대대적으로 책봉이 이루어졌으니까.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거는 건 쥐뿔 의미 없는 헛짓거리고, 내 주변에서 똥이나 잘 닦아주는 게 제일이라는 인상을 주고팠던 거지.’

선조 이 똥싸개가 전쟁에서 한 게 뭐가 있냐는 공론에 맞서, 실질적으로 전쟁을 종결시킨 전쟁영웅들의 공로를 의도적으로 격하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거다.

원균 같은 미꾸라지 한 마리 집어넣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화나네.’

지금 도원수인 정충신도, 옛 도원수인 장만이나 김충선도, 개혁을 함께 한 중신들도 가지지 못한 게 공신위다.

그런데 선조가 공신 책봉에도 처발라놓은 똥자국 같은 놈을 나라에서 우대해줘야 하나?

“이건 조금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하교하시옵소서.”

“원균元均 이놈은 왜 아직도 공신입니까? 전쟁에서 한 일이라곤 함대 말아먹은 것밖에 없는데.”

선조랑 똑같이 나라 조지려던 놈 아니랄까 봐 못난 놈들끼리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다.

“삭제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