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63화
지시는 급작스러웠으나 이론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거론조차 못 되었을 일.
선조 이균李鈞과 원균元均, 함께 일컬어 조선흉적朝鮮凶賊 견자쌍균犬子雙勻에 대한 세간의 평가야 워낙 분명했으나 이균이 꼴에 왕인지라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균이 병신 맞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신하들도 더는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것이다.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과연, 원균은 전임 통제사인 이순신을 모함해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어렵게 구축한 함대를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죄인이옵니다.”
이에 좌의정 박홍구도 거들었다.
“그런 천하의 죄인이 어떻게 일등공신의 반열에 올랐는지, 신 또한 이해할 수 없었사옵니다.”
선조가 꼴에 왕은 왕인지라, 대놓고 욕하지는 못해도 이유는 뻔하지 않겠냐는 듯 은근히 돌려 깎는 박홍구였다.
“누군들 이해했겠사옵니까?”
이에 우의정 이상의까지 화룡점정으로 짧게, 그러나 더 노골적으로 선조를 깠다.
시립한 중신들 사이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선왕을 모욕하는 이 순간 자체가 탐탁지 않다는 듯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서서 만류하지는 못했다.
선조는 연이은 실정과 배반으로 나라를 거의 무너뜨렸다.
충심과는 별개로 무작정 비호하긴 힘든 인물.
‘선조는 병신’ 선언이 있었던 뒤, 이를 두고 중앙이 정正당과 도道당으로 재편된 상황에서 선조에게 온정적이었던 도당이 약세로 접어든 근본적인 이유다.
“그동안 원균 같은 작자조차 일등공신의 반열에 있었는데, 전사상자를 위한 배려가 특별 대우로 여겨진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겠지요.”
지금이라도 정의를 바로잡았으니 다행이다.
원균이라는 참혹한 피조물에 분수에 넘치는 우대를 받아, 그것이 교정되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렀더니 어떤 사태가 발생했던가?
원균명장설이니, 임진왜란의 영웅 원균이라니, 원균 기념관 건립이라니, 두개골에 천공술을 시행한 다음 회백질을 모두 긁어내고 우동사리를 대신 이식한 듯한 결과물이 뻔뻔하게 자행됐다.
이런 치욕스럽고 낯부끄러운 추태의 재현 가능성을 남겨두는 건 임란으로 고통받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죄짓는 꼴.
‘선조 무덤 파는 건 어려워도 원균 무덤은 팔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놈은 조선 수군을 모두 죽게 만들고는, 혼자서 도망쳐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다 뒈졌는지, 잠적했는지는 임란 당시에는 물론이고 기술이 발전한 21세기에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
논공행상이 무척 중요했던 당대 일본에서조차, 빈번히 그들을 물 먹여온 통제사의 후임 모가지를 땄다는 기록이 남지 않은 걸 보아 한쪽에 무게가 꽤 실릴 뿐.
그런데도 원균이 뒈진 것처럼 여겨지는 건, 원균이 전장에서 도주했으며 생사는 불분명하다는 모든 목격자의 일관된 증언에도 필사적으로 원균을 옹호해온 선조가 그리 단정했기 때문이다.
‘딴에는 속으로 원균이 뒈졌건, 살았건 다시는 양지로 튀어나오지 말아 달라고 아주 기도까지 올렸겠지.’
그래서, 원균에게는 파헤쳐질 무덤조차 없는 상태다.
대신 흙만 대충 모아다 봉분 하나 만들어 가묘假墓 삼은 채, 석물과 사당까지 주변에 둘러놓고서 제발 뒈진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가라고 용을 쓰고 있을 뿐.
“군율과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신상필벌信賞必罰부터 확실해야 하듯, 나라의 기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선 논공행상論功行賞 또한 확실해야겠지요.”
종양 하나를 잘못된 위치에서 솎아낸 신하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죄인을, 놈이 멋대로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쫓아냈으니 남은 건 그 자리가 정당한 이들을 우대하는 것뿐입니다. 호조와 병조에서는 긴밀히 연계하여 공 있는 사람들이 지체 없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세요.”
호조판서 김신국과 병조판서 김세렴이 꾸벅 허리 숙였다.
* * *
바다 너머의 영토가 늘어나자 수운의 수요가 폭증했다.
본토에서는 정착을 위한 인구와 상품이 해외 영토로 빠져나가야 했고, 해외 영토에서는 헐값에 사들인 자원을 들여와야 했으니까.
하지만, 범선의 숫자는 몇 되지 않았고 화물칸에도 한계는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더 태워달라니까?”
부두에서.
“안 되오.”
“아, 이 사람 참……!”
두 사람이 어색한 조선어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유난히 화려한 복장의 사내는, 상단의 행수였다.
본래는 만주 출신이었으며, 수 해 전 귀화했는데 상인들이 만주 땅을 횡행하며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문의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만주는 본인이 나고 자란 땅이며, 한때는 만주의 절반을 지배했던 다이곤의 금나라에서 섭정까지 지냈던 그다.
조선에서는 자신이 외지인일지 몰라도, 만주 땅에서는 정반대.
그는 성공할 확신이 있었고 결과로 입증해냈다.
최근에는 손아랫동생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지만, 나오는 반응이라곤 폭소뿐이었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강한 놈이 강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하다고 하는 거야!
이런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자였으므로, 이어지는 행수의 발언은 꽤 역설적이었다.
“자네 아직 조선물이 덜 들었구만?”
행수는 그 말과 함께 품에서 슬쩍 상평통보 꾸러미를 꺼냈다.
“…….”
맞은편에 선 붉은 머리의 함장은, 슬쩍 시선을 내려 꾸러미를 확인하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응에도 행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말했다.
“원래 조선 땅에서는 오고 가는 정이란 게 있어. 서로 조금씩 배려해 주면, 그거야말로 세상이 화목해지는 지름길 아니겠나?”
행수가 상평통보 꾸러미를 들이밀었다.
붉은 머리의 함장은 정색한 채 미동도 없이 답했다.
“안돼.”
“쓰읍……! 받고 좋은 데 쓰시게.”
행수는 재물의 위력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본디 만주 출신에 조선과는 적대 관계였던 금나라에서 섭정까지 지냈던 그다. 조선 땅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들판의 백골로 전락하지 않은 비결은, 조선 조정에 막대한 재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돈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여곡절 많았던 행수의 지론이었다.
“성의가 부족해서 그러나? 자, 한 꾸러미 더 줄 테니…….”
행수가 품에서 마술처럼 상평통보 꾸러미를 하나 더 꺼내서 밀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함장의 가슴께를 꾹꾹 밀어대자, 붉은 머리의 함장은 와락 팔을 휘둘러 꾸러미를 쳐냈다.
“……!”
금빛 반짝이는 꾸러미가 일순 하늘로 날았다가, 물속으로 퐁당 떨어졌다.
“끄악!”
“말하는 꼬라지 보니 똑같이 외지 출신인 것 같은데 무슨 조선의 오고 가는 정이야. 뒈질라고.”
붉은 머리의 함장은 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홱 몸을 돌려 배에 올랐고, 풀썩 쓰러진 행수는 부두 가장자리까지 기어가 상평통보 꾸러미가 퐁당 빠진 곳을 쳐다보았다.
“어흐흑…….”
제법 꼴사나운 광경이었으나, 상황이 일단락하자 선원과 승객들은 금세 시선을 돌렸다.
부두에서는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일이었으니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와 화물의 용적량에는 한계가 분명했으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한 상단들의 몸부림이란 처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조정과 내수사 역시 독특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들 집단은 범선 건조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 체계와 조직은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자본까지 충분했다면 직접 범선을 대량으로 건조해 수요와 이익을 과점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조정과 내수사는 원정을 위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한 참이었다.
값비싼 범선을 새로 건조하기엔 벅찬 상황.
상단들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힘이 있었다.
요동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개인에서 집단으로 성장한 이들 세력에게 부富란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목적이었다.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상단들은 수단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단지 계기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때 가장 발 빠르게 나선 집단은 조정도, 내수사도, 상단들도 아니었다.
“한양의 여러 상단이 부족한 해상 물동량을 두고 서로 차지하고자 연합과 반목을 거듭하는 중인데, 그 여파가 내수사까지 퍼지고 있사옵니다.”
차기 은행장으로 사실상 확정된 최 상선이었다.
그는 편전에서 집무에 몰두하던 왕을 보좌하다가, 왕이 휴식을 취하자 눈치껏 입을 연 참이었다.
“…흠?”
“내수사 소속의 여러 선원과 조선공들에게 상단의 접촉이 있었습니다. 조정 쪽도 예외는 아닐 것이옵니다.”
“괘씸한 일이군요.”
“이문에 눈먼 상단들이라고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다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최 상선은 이 상황에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다는 티를 내었고, 왕은 발언을 허락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하세요.”
“망극하옵니다…… 신이 감히 전하께 상주 드리고자 하는 건, 상단들에게 자금을 조달하여 범선을 건조하자는 것이옵니다.”
“그, ‘이문에 눈먼’ 상단들이 그냥 거금을 쾌척하지는 않겠지요?”
“예. 대신, 출자한 비중대로 해마다 특정 기간 범선을 빌려준다면 상단들도 만족할 것이옵니다.”
최 상선의 제안에 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숙고해보건대, 내수사의 성격이나 범선이 시대상 가지는 입지를 고려해보면 이는 미래의 민간투자와 컨소시엄의 사이쯤 되는 발상이었다.
왕은 그 미래적인 발상 자체에 놀랐다.
유사한 전례가 자체가 없지는 않았다.
육주비전六注比廛부터 관민의 협력이었으니까.
시전의 특정 상인이 중앙의 수요를 충족해주는 대가로, 각 영역에서 독점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참고할 전례 자체가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 쳐도, 최 상선의 제안은 무척 진보적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대될 정도로.
사고를 갈무리한 왕이 물었다.
“내시부 상선으로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예비 은행장으로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둘 다이옵니다. 내수사는 인재를 지키고 범선을 가질 수 있어 좋고, 은행은 신뢰도 높은 사업에 대출을 끼워 이문을 공유하여 좋지요. 그리고 두 조직은 모두 전하의 재산에서 기원한 것이니, 이는 전하께 돌아가는 이익이기도 하옵니다.”
“말씀은 청산유수로군요.”
왕이 꼬집자, 최 상선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연발했다.
“…좋습니다. 진행해보세요.”
“망극하옵니다.”
왕은 범선 몇 척보다도, 최 상선의 구상이 어디까지 진척할지 궁금했다.
민간투자나 컨소시엄의 실현은 어렴풋한 구상만으론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육주비전처럼 대가성으로 일정 영역을 떼어주는 것과는 달랐다.
범선 몇 척이라는 국소적인 재화를 두고 여러 세력의 투자와 이권이 한데 엮였다. 각 세력이 범선 건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권리를 합리적으로 분배해야 했다.
왕은 그런 논의가 필요할 정도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심화하였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자신이 사례를 만들어주면, 민간에서는 참고하여 이같이 고도화된 상업 활동이 촉진되지 않을까?
고작 범선 몇 척보다도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일할 기분이 드는군요.”
“승전색을 불러오겠사옵니다.”
그리고 그 시각.
경복궁 터 천문대에서는, 해양 산업에 일조할 세기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