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64화
삼 형제 중 막내인 인평대군은, 사가私家 대신 천문대로 독립한 것처럼 그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도, 신하들도 우려 이상으론 간섭하지 못했다.
인평대군이 진지하게 연구에 몰두했으니까.
사박
종이 밟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지만, 인평대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따로 식사라도 하셨습니까.”
노회한 목소리가 물었다.
“상조차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자, 영의정 겸 영관상감사 이원익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바닥에 흩뿌려진 작업의 무수한 결과물을 집었다.
사락
일순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고, 종이 들어 올리는 소리에 목석 같았던 인평대군이 반응했다.
“그대로 두세요. 어지럽히시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헷갈립니다.”
“노관이 보기엔,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이 상태가 더 헷갈릴 듯하옵니다만.”
“영의정…….”
인평대군이 굳은 목소리로 호명하자, 이원익은 막 들어 올렸던 종이를 원래 자리에 내려 놓았다.
무수한 도형과 도면, 글자가 중구난방으로 쓰여 있었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아서는 천문 및 그와 관련한 기구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 이상으론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다지 의미는 없는 정보.
인평대군이 천문 이외에 무엇을 연구하겠는가.
“무엇을 연구하고 계시는지, 가서 봐도 되겠습니까?”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보는 걸 막을 생각까진 없는 것이리라.
‘허락보다는 완곡한 거절에 가깝겠으나.’
이원익도 왕명을 받고 천문대를 방문한 참이었다.
대군이 식음마저 걸러가며 몰두하고 있으니, 무엇이 그리 몰두하게 만드는지는 확인해야지 않겠는가.
이원익은 최대한 종이를 피해가며 나아갔다.
하지만 인평대군에게 다가갈수록 디딜 바닥은 줄어들어, 끝내는 발가락 하나 얹을 틈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종이를 밟지 않고는 도저히 나아갈 수조차 없을 정도.
한계에 다다른 이원익은 신발을 벗으며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는, 최대한 조용히 발을 옮기며 나아갔다.
인평대군의 바로 주변은 켜켜이 쌓인 종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잘못 밟았다간 미끄러질 정도.
그래서 이원익은 더 무리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몸만 기울였다.
“무엇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이에 종이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평대군이 몸을 돌렸다.
“천문판과 천문경입니다.”
인평대군이 가리고 있던 종이에는 원판형 물체의 도면과 천리경과 만리경의 사이쯤 되는 물체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명칭이 솔직했으므로, 무엇이 천문판이고 천문경인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밤하늘을 관측하는 기구입니까?”
“예. 하지만 단순히 보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인평대군은 근처에 있던 모형 지구본을 가져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관상감원들에게는 적잖이 충격을 주었던 물건이었다.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 네 글자로 요약된다.
서적 『주비산경周?算經』의 한 구절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 모서리를 가진 납작한 형태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학설에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무엇이 옳은지 증명할 수 없었기에 이론으로만 여겨졌을 뿐.
그러다 비교적 최근인 30여 년 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를 방문하고 서양식 지도를 소개함으로써, 지상의 형태를 둔 갑론을박이 생겨났다.
그리고 인평대군은 조사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지상이 구 형태라고 확정했다.
만리경을 통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지동설을 증명하고,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수금화목토 오성五星과 일월日月이 모두 둥근데 마찬가지로 같은 우주상의 천체인 지상만 다르게 생길 리가 없다고 유추한 것이다.
그래서 지상地은 둥근 구球의 형태, 말 그대로 지구地球인 것이다.
인평대군은 자신의 주장을 근거로 제작한 지구본을 들고 말했다.
“지상이 이렇게 생겼다면 꼭대기, 그러니까 극점에서부터 반대편 극점으로 이동할수록 보이는 밤하늘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시야가 지평선에 의해 가려지니, 자신이 선 지표면 바로 위의 우주만 보이니까.
“계절에 따른 밤하늘의 변화를 제하면, 지표면 위치에 따른 밤하늘의 변화만이 남게 됩니다. 그것을 역으로 적용하면 밤하늘을 보고 지구상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천문판과 천문경은 이를 위한 장치였다.
밤하늘을 관측하고, 대조함으로써 말이다.
두 장치가 의도대로 기능한다면 지구설은 확신이 아닌 사실로 증명되는 셈.
그리고 인평대군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만 앞서고 구상이 쉽지 않습니다.”
천문판은 구 형태의 우주를 평면에 담으면서도 계절과 위도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달라지는 밤하늘의 영역을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천문경은 장소를 옮기면서 사용해야 하므로 이동과 운반이 편해야 하는데, 만리경을 그런 형태로 축소하려니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
이원익은 쉬이 반응하지 못했다.
아직은 어린 인평대군이 여러 괄목할 성과를 내고도 더 높은 성취에 목말라 있다는 데서 놀라고, 관상감 영사인 자신보다 더 관상감의 주인 자리에 어울리는 대군을 앞두고 부끄러울 뿐.
“대감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노관도 같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영의정께선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관은 영의정일 뿐만 아니라, 영관상감사이기도 하지요. 관상감의 일은 노관이 본디 맡은 업무인데, 어떻게 경중을 굳이 가려 이것은 취하며 저것은 내치겠습니까?”
인평대군은 공사다망한 영의정의 일정 외에도 달리 걸리는 게 있다는 듯 확답을 꺼렸다.
“노관이 천문에 대한 배움은 대군에 미치지 못하겠으나, 아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천문대의 열리는 천장을 누가 고안했는지는 잊지 않으셨겠지요?”
단지 배우지 못해 지식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지혜가 부족한 이원익은 아니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를 일도 없거니와, 유별난 지성이 여전히 건재함은 천문대의 지붕으로 검증해냈다.
왕이 광학光學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자, 이에 고양되어 만리경의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창조해 낸 것이다.
“……알겠습니다.”
인평대군도 이원익의 지성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는 허락과 함께 자신의 도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금세 옮겨놓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에 이미 넣어두었으니까…….”
인평대군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이원익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모름지기 지성인이라면 될성부른 떡잎 앞에서 그 잠재력과 미래 가치에 기뻐질 수밖에 없는 법.
“배움이란 내가 가르치고, 네가 가르칠 때 가장 즐겁다지요?”
그 들뜬 모습에 인평대군이 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하루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배움이 아닙니다.”
“대군의 기대를 저버려 보이겠습니다.”
노인은 웃었고, 아이는 찌푸렸다.
* * *
연구에 조선 최고의 지성이 합류하자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막연하기만 했던 진전도,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문판의 구상은 합리적으로 변했다.
구 형태의 우주 전체를 평면에 담는 대신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우주의 절반만 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문제는 단순해졌다.
구를 절반으로 딱 잘라 안에서 올려다보면 원 형태의 평면이 되니까.
여기에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밤하늘의 변화를 반영하는 건 쉬웠다. 이미 무수한 기록이 있었으니까.
인평대군은 질세라 여기에 또 하나의 원판을 추가했다.
절반의 우주 위에 지평선을 의미하는 가림판을 덧대어, 이것을 회전시킴으로써 계절에 따른 밤하늘의 변화를 연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위도緯度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원판만 추가하면 되겠군요.”
이원익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인평대군은 이원익이 일부러 자신이 활약할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확신했다.
천문경은 출발점을 전환하기로 했다.
광학에 정교한 기술 및 부품을 집약하여 만든 만리경을 축소하는 대신,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가진 천리경에다 천문경에 필요한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은 빠르게 진전으로 이어졌다.
천문경에 필요한 기능이 무엇인지 사료하고, 그것을 어떻게 천리경에 보탤지만 구상하면 됐으니까.
그 결과 천문경은 천리경에 이런저런 부속이 달린 형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정도면 원했던 천문판과 천문경 그대로라고는 못 할지라도 천문판과 천문경의 모형이라고는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인평대군과 이원익은 실물 모형까지 만들어냈다.
그 형상은 이전 역사에서 각기 성반星盤과 육분의六分儀라 불렸던 기구와 무척 흡사했다.
* * *
망망대해 어딘가.
범선 한 척이 작은 무인도에 의지해 몸을 가리고 있었다.
선원들은 갑판을 서성이며 주변을 주시하는 중.
돛대 끄트머리에서 경계하던 견시병이 갑판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뭐가 접근하는 모양입니다.”
신호를 확인한 선원이 사관에게 보고했고,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견시병이 어딘가로 가리켰다.
사관은 곧장 목에 걸어놓은 천리경을 펼쳐 수평선을 확인했다.
천리경의 좁은 원통으로 보이는 건, 뭍 방향에서 섬으로 정확히 다가오는 쪽배였다.
“…아군이다.”
잠시 후.
쪽배는 선측에 이르렀고, 손님은 늘어진 그물을 붙잡아 갑판에 올랐다.
“다녀왔습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좋아.”
사관은 배 후미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행수가 기다린다.”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곤 갑판을 가로질렀다.
주변의 선원들이 지나가는 손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손님은 손을 들어 받아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선장실 안쪽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조선유상의 행수이자 예조 속사 실방사悉訪司의 정랑.
한윤.
최근 그에게는 감정이 복잡해질 계기가 있었다. 원수가, 답지 않게 허망히 죽어버린 것이다.
곧이곧대로 내면의 혼란에 잠길 수도 있었으나 한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때마침 왕의 지시가 배려처럼 주어졌고, 한윤은 기꺼이 남경의 인근 해역까지 친히 행차했다.
그가 물었다.
“남경南京의 분위기는 어떻던가?”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행수.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혼란과 다가올 변화를 기뻐하는 자들은 있었지요.”
“어디에나 혼란과 변화에 기생하는 자들이 있지.”
야심가. 상인. 범죄자, 사기꾼. 그리고 이국에서 온 간자들.
남경에는 이 다섯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자들이 있었다.
“홍모이紅毛夷들은 어떻던가?”
“가장 신났습니다. 이변한 물가를 이용해 사치품은 헐값에 사들이고, 생필품은 비싸게 팔지요. 사람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천주天主라는 괴론을 설파합니다.”
“……당사자들에게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족속들이로군.”
“그들은 해악으로 가득합니다.”
한윤은 짧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강력한 경쟁자들이야. 지부 설치를 서둘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