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65화
조선의 영향력은 장강 이남으로 물러난 남명南明에도 파고들었다.
조선유상의 행상이자 예조 속사 실방사悉訪司의 정랑이기도 한 한윤이 의식한 건 붉은 머리의 외부인들이었다.
약칭, 홍모이紅毛夷.
지금까지 조선에 알려진 바로 이들의 역사란 이러했다.
지구 반대편 머나먼 곳에서, 홍모이들은 포도아葡萄牙라는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현재 군주가 폭정을 일삼았고 이에 화란和蘭이라는 지역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시도하는 중이다.
정확한 역사는 다소 달랐다.
포도아 이전에 서반아西班牙라는 더 큰 나라가 있고, 포도아와 화란은 서반아에 복속된 나라라는 것.
그러니 포도아와 화란의 백성들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으나 포도아는 반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화란의 백성들이 이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것과 큰 틀에서는 같지만, 역설적인 내막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홍모이들에게 역사의 비극이 있다고 조선이 그들의 사정을 상량해줄 수는 없었다.
“명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몰아낸 건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니까. 그런데…….”
한윤은 남명 앞바다의 큰 섬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홍모이들이 이 섬에 진을 친 채로 아조가 남명에서 얻고자 한 국익을 모조리 훔쳐 가는 중이다.”
약간은 어폐가 있었다.
홍모이가 대만에 거점을 둔 건 수십 년도 더 되었으니까.
조선의 성과를 강탈하고자 때맞춰 끼어든 게 아니었다.
홍모이들에겐 오히려 조선이 개입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알 바인가?
“전하와 신민, 아조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합심하여 이뤄낸 결과다. 그것을 오랑캐들 따위에게 내어줄 순 없다.”
한윤은 손가락을 바다에서, 남명의 유일한 수도가 되어버린 남경으로 옮겼다.
“우리는 정확히 명나라의 중심에 지부를 만든다.”
이에 간부 하나가 물었다.
“명나라가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그들에게 동창東廠 따위의 우리에게 대항할 수단이 있습니다. 지부의 설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건 남경에서라면 활동이 매우 불리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국의 심장에 지부를 설치한 경력이 있다.”
금나라가 홍태주의 것과 다이곤의 것으로 반분했을 때.
조선유상은 각자의 수도에 지부를 설치했고 공공연히 활동했다.
“그때라고 보는 눈이 없었던가?”
홍태주도, 다이곤도 조선유상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이국의 첩보 활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한윤은 허공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조가 놈들의 아랫도리를 꽉 붙잡고 있어서였지.”
주변에서는 웃음이 터졌지만, 한윤의 말이 농일지라도 허언은 아니었다.
분열한 요동에서 조선과 조선유상이 가지는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홍태주와 다이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국의 첩보 활동을 쉽사리 제지하지 못했다.
“이는 아조의 도움을 받아 겨우 존속하게 된 남명이 처한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명나라이지 않습니까? 놈들은 금나라와는 다릅니다. 금나라는 제국이나 황제 타령이 애들 장난에 불과했지만, 명나라는 아니지요.”
지난 수백 년 동안 중원의 굳건한 제국으로 군림해온 명나라다.
지금 자신의 아랫도리가 조선의 손에 단단히 잡혀 있다는 게 달갑지도 않거니와, 나아가 이러한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을 터.
이러한 명나라의 한복판에 지부를 설치했다간 그들도 이판사판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부분은 나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행수이십니다.”
“그뿐만은 아니지. 또?”
“정랑이십니다.”
“그래. 정랑이다. 예조의 정랑.”
실방사悉訪司를 전담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외교를 맡은 예조의 일원이기도 했다.
“우리는 공식적인 외교 창구를 통해서 얼마든지 명나라를 압박할 수 있다. 음양陰陽과 수면 위아래에서 동시에 공략해나간다면, 명나라도 공허한 자존심을 고수하는 건 쉽지 않겠지. 또한…….”
한윤은 이제 명나라와 지척이 되어버린 대만을 의식했다.
홍모이의 소굴이 되어버린 곳.
“명나라에 다른 선택지는 있을지라도, 최선은 달리 있지 않다.”
조선유상은 홍모이와 경쟁할 예정이다.
이러한 조선유상의 진입을 절대적으로 엄금한다면 남명은 홍모이들의 일방적인 패악에 더욱 무방비하게 노출될 터.
남명은 조율과 타협을 위해서라도 다른 맹수를 안방에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평범한 늑대로 그칠지, 아니면 먼저 들어온 털 붉은 늑대와 집주인까지 다 잡아먹을 호랑이가 될지는 조선유상에 달린 일이고.
* * *
장강 이남에서 은밀하게 조선의 영향이 드리우는 동안.
장강 이북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산동반도 끝자락. 청주淸州 진평부晋平府 동헌을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새해를 맞아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동헌 마당에 모인 방문객들에게 추위에 떠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평부윤 김경여金慶餘의 눈치만 연신 볼뿐.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뭐라고?”
김경여가 확인하듯 묻자 방문객 중 선두에 선 사내가 손을 모았다.
“조선에 귀부하고 싶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대인을 받들고 조선 국왕 전하께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김경여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주변을 향해 팔을 펼쳤다.
“그대들은 이미 조선 땅으로 왔다. 귀부를 원한다면 정착하여 말을 배우고 세금을 내면 될 뿐인데, 이렇게 집단으로 동헌을 찾아와 소란을 벌인단 말인가?”
김경여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유였다.
청주에는 이미 무수한 유민들이 전화戰禍와 혼란을 피해 우르르 몰려와 들어 사는 중이었으며, 십중팔구는 말도 보고도 없이 정착했다.
그러다 하급 관원과 아전들이 조선어 교육을 위해 마을을 방문했다가, 뒤늦게 적발하는 것이다.
청주에서는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
“귀부의 의사를 밝힌 건 분명 가상하지만…….”
흔치 않은 경우였기에, 김경여는 가상하면서도 마냥 가상하게만 볼 수 없는 무리에게 일렀다.
“할 말이 그뿐은 아닌 듯하다.”
김경여의 말에 방문객들은 긴장한 낯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복심이 있었군.”
“…….”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바른대로 고하라. 그대들이 말을 숨겨, 안 될 일을 될 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이에 선두의 방문객이 주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무리 가운데 보따리를 쥔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동헌 마당에는 몇 개의 보자기 포장된 상자가 쌓였다.
“뇌물이냐?”
김경여가 눈살을 찌푸리자 선두의 사내가 급히 답했다.
“대인의 기개가 범인과 다른데, 어찌 알량한 재물로 환심을 사고자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어냐.”
“조선에 귀부하려는 소인들의 절박하고 진실한 마음을 보이고 싶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말장난 같은 소리였다.
김경여 본인은 왕의 과분한 기대를 등에 업고, 또 이에 부응하고자 청주의 목민관으로서 부임한 몸.
이런 같잖은 수작에 어울려주고자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넌 게 아니었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희롱하려 드느냐?!”
김경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조선어였으나 감정이 분명히 실렸으므로, 방문객들이라고 그 뜻을 짐작 못 하지는 않았다.
“이건 다르옵니다!”
선두의 사내가 또 하나의 보자기를 내밀었다.
“끝까지 건방을 떠는군! 산더미 같은 재물을 더한들 나를 희롱하고도 고이 돌아갈 성싶으냐?!”
김경여가 일갈하여 병사들을 부르자, 선두의 사내는 허둥지둥 보자기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보십시오!”
드러난 내용물은 금은도, 패물도 아니었다.
“……그게 무어냐?”
사내는 주변에 깔린 채 당장이라도 개입할 기세인 병사들을 의식하며 상자의 내용물을 꺼냈다.
“관인官印이옵니다!”
“관인?”
“산동포정사사山東布政使司 내주부萊州府의 관인입니다.”
“…….”
그제야 김경여는 그림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단순히 귀부만을 희망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내주에 터를 잡은 유지들이 분명했다.
내주는 현재 등래대원수를 자칭했던 진광부가 죽고 그의 군사들은 와해하며 무주공산이 되었다.
내주에 기반을 둔 유지들은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청주로 도망하기도, 창궐하는 도적과 엄습하는 반란군을 상대하여 내주를 지키는 것도 모두 벅찰 터.
‘그래서 내주를 조선령에 편입해주길 바라는 것이군…….’
대대로 토착하여 축적한 막대한 재산과 막강한 영향력을, 조선이라는 장막 뒤에서 보호받기 위해 말이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선령의 확장은 분명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왕은 가까스로 개척한 바다 건너의 거점을 단단히 구축하길 바랐다.
삼한의 역사가 쓰인 이래 근 천 년이 지난 시점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때가 올지 알 수 없다던 왕의 하교에는 김경여 역시 백 번 공감했다.
자신의 생애에 두 번은 없을 이 영광스러운 시기에, 어렵사리 확보한 청주를 속 빈 강정으로 전락시킬 순 없었다.
‘세월은 꾸준히 흐르지만, 그 방향은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할 수 없고, 가벼운 존재는 환류에 쉽사리 휘말리고 파묻히는 법…….’
그래서 무수한 신민의 여망輿望에도 전하께서는 요동 전체를 무리하게 정토하지 않고 일부만 거두신 것 아닌가.
“먼저 전하께 그대들의 의사를 상주 드린 다음, 비답이 내려오면 알려주겠다.”
“…!”
방문객들은 숨을 삼키며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줄곧 대표처럼 나섰던 선두의 사내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늦습니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버리겠다고 한 게 아니잖나.”
“조선 국왕 전하께 상주를 드리고, 비답을 받는다면 동편의 망망대해를 두 번이나 오가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사이 내주에 어떤 화액이 미칠지 모릅니다, 부디 대인께서는 상량해 주십시오…….”
김경여는 콧김을 내뿜었다.
공문이 오가는 동안 시간이 적잖이 걸리는 건 사실이다.
전하께서 뜻을 더 펼치고자 하시는데 그사이 내주가 적에게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것대로도 곤란한 일.
일단 내주의 유지들이 일제히 조선에 귀부코자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애초에 저들에겐 대안이 없기도 한 만큼, 최대한의 충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터.
놓아버리기엔 분명 아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좋다. 고민해 보지. 물러나라. 다시 부르겠다.”
김경여가 여지를 남겨주자, 방문객들은 벌써 구원받기라도 한 양 안도하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감사와 함께 다급한 기세로 물러나니, 김경여는 방문객들이 떠난 뒤에야 그것이 내주부의 관인과 뇌물을 놓아두고 가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약삭빠른 놈들이로군…….”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 김경여는 자신을 보좌하는 판관判官을 불러 일렀다.
“자네도 같이 들어 알겠지? 주변의 수령들을 불러주게. 공론을 모아봐야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