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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66화 (26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66화

청주靑州는 면적이 방대하고, 유입된 인구도 많으며, 군사·경제적 가치도 높았다.

이런 곳을 수령 한 사람이 전담한다는 건 무리수.

청주의 핵심인 진평부晋平府를 중심으로 주변을 분할하여 여타 목민관들에게 맡겨졌고, 그중 하나가 말했다.

“원칙대로라면 절대 불가한 일입니다.”

이에 진평부윤 김경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요. 문제는 당장 주어진 조건이 아주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군사적 행위도 정치적 타협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주의 유지들이 귀부의 의사와 함께 내주부 관인을 바쳤어요.”

“그래서, 부윤께서는 우리가 독단으로 내주부를 점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공들의 의견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김경여의 말에 다른 목민관이 쓰게 말했다.

“송구스러운 말입니다만, 이렇게 우리를 불러모으신 걸 보아 부윤께서는 이미 정해둔 마음이 있으신 듯합니다.”

다른 목민관들도 말없이 끄덕였다.

원칙대로 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면 될 따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목민관들을 불러 모은 건, 원칙대로 하고 싶지 않기 때문 아닌가?

“이 사람이 마음이 이미 기울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공의 의견도 듣지 않고 독단으로 내주부를 점령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건 애초에 옳은 논의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저희를 제수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닷길도 끊기지 않은 상황에서 부윤께선 저희를 불러 왕명을 기다리다간 늦는다며 함께 무단無斷하자 말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이 제공을 불러 모은 건 독단을 피하기 위해서였지, 무단無斷을 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김경여의 말에 목민관들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장난이냐는 투였다.

“이미 전하께 인가를 받은 부분입니다.”

“……인가요? 내주를 점령하는 것 말입니까?”

“내주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이 응급하거나 중대한 경우에는 조처부터 취한 다음 보고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다 건너의 땅이다.

가까운 비사성마저 명령이 오가는 데 한참 걸림이 확인되었는데, 하물며 더 먼 청주다.

더 불안정하기도 했고.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일이 재가裁可를 기다려서야 대업을 이루겠는가.

“그리고 내가 보기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택이 전하께서 하교하신 ‘중대한 경우’입니다. 불러모은 건 제공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이 안건의 찬반은 어떤지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예요.”

김경여가 해명하자 추궁하던 목민관이 사죄했다.

“경솔했습니다.”

“아닙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기회만 보다 보니 안내가 늦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까딱여 사소한 잡음은 일단락했다.

이에 다른 목민관이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들의 제안이 실로 ‘중대한 경우’에 해당하냐는 것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힘으로 내주부를 통제할 수 있냐는 의문입니다.”

“음…….”

“청주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말없이 주변으로 오가는 사람이 많아 각 고을에서는 매일 벌어지는 사건 사고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에요.”

목민관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막 복속시킨 땅이고, 다스려야 할 백성들이라곤 모조리 외지인들.

혼란을 피해서 왔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들이라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불씨 같은 무리다.

몸에 잔뜩 불을 붙인 채 청주로 몰려든 것이다.

덕분에 목민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따름.

큰 건수라도 하나 터졌다 치면, 대충이라도 수습하고 나니까 내일이 되었더라, 하기 부지기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평부晋平府와 맞먹는,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 모르는 내주까지 점령한다는 건 자칫 무책임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동료 목민관의 지적에 김경여는 부정하지 못했다.

이에 다른 목민관이 물었다.

“유지들을 이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흐음.”

“저들이 관인까지 바쳐가며 귀부를 요청한 건, 그만큼 절실하면서도 내주에서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의 근간이 죄 내주에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아조와 우리만 내주를 보호한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예쁘다고,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을 지키고자 은근슬쩍 의탁해 오는 외부인들을 무상으로 보호해 준단 말인가.

“마침, 저들에게도 내주를 보호해야 할 명분과 필요성이 있으니 우리가 적절한 협조를 요청한다면 따르지 않겠습니까?”

“…적절한 협조라면요?”

“당연히 인력과 재물의 징발이지요.”

일순 참석자들이 흠칫할 정도로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돌려서 말한들 협조의 결과는 그렇게 될 터.

때마침 토착하며 내주에서 재물과 영향력을 쌓아온 유지들이니 손을 뻗는다면 많은 협조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자칫 협조가 과해져 의지하게 된다면, 유지들의 입지가 커질 거예요.”

“현실적인 다른 방안이 없다면 최후의 선택지가 유일한 선택지가 되겠지요. 소관은 그저,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음…….”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편입이라면, 역시 유지들에게 활약할 기회를 원천 차단하여 내주를 온전히 조선령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마냥 협조를 구하지 않기는 어렵다.

당장 청주의 목민관들은 임지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만도 벅찬 상태.

이때 청주의 핵심인 진평부와 버금가는 내주를 탈 없이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유지들에게 입지를 보장하는 형태의 팽창이, 차마 나라에 못 할 짓이라도 되는 건 아니다.

단지 이상적이지 않을 뿐.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유지들의 협조는 필요했으니, 보통은 그들의 존재와 입지를 인정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당장 본토의 양계兩界도 그러했으니까.

그런데도 김경여가 우려하는 건 마찬가지로 양계의 사례 때문이었다.

평안도 남부와 함경도 최남단에는 고려 시절 동녕부東寧府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됐다.

이들 지역은 본디 고려 태조의 북진으로 개척되어 장장 300년가량 고려의 지배를 받다가, 원나라의 침임으로 설치되어 각기 20년, 80년가량을 원나라에 빼앗겼다가 회복됐다.

‘짧지 않지만, 장대하다고도 못 할 간극이지.’

이미 300년 동안 고려가 지배했으니까.

하지만,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고려는 고토인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에 유지들을 우대하는 토관土官을 설치해야 했다.

‘그리고 이 토관직은 3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는 쌍성총관부와 비슷한 시기 원나라로 넘어가, 같은 시기 회복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도 마찬가지.

그리고 이보다 더 후대에 편입된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는 이러한 기조가 더욱 심했다.

천지에 토관인 것이다.

이러한 내력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토관은 한 번 만들면 없애기 힘들다…….’

그리고 남발된 토관의 해악은 가까운 곳에서 확실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명나라를 서쪽에서부터 망하게 한 토사土司들.

이들은 무려 1500년 전 전한前漢 세종世宗 무황제武皇에게 복속되고도 현재까지 지역의 호족으로서 특권을 향유하며 반란과 표면적인 복종을 반복해 왔다.

장대한 세월 우여곡절 많은 역사에도 씻겨 내려가긴커녕, 도리어 안에서부터 자라는 종기가 되어 끝내는 제국까지 몰락시킨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지들에게 입지를 허락하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내주를 쉽게 얻지 못하니 문제로구나.’

김경여의 굳은 얼굴에 한 목민관이 말했다.

“예로부터 성현들께선 항상 중용中庸을 강조하셨지요. 이 순간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했다.

사대부라면 누구나 배우는 사서삼경 중 하나의 이름이 중용이기도 했다.

김경여는 실소했다.

그리고 끄덕였다.

“옳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중용을 생각해야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중용인가.

김경여는 한평생 유학을 배워왔음에도 이렇다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학문이 부족해서는 아니리라.

스승 김장생金長生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에게 동시에 수학한 현인.

김장생 본인은 그런 스승 밑에 들어가기 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고, 스승 밑에 들어간 다음에는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했다.

아홉 번 시험을 치르고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이명을 얻은 사조師祖의 학문에 비하지는 못하겠으나, 자신이라고 백 번 겸양한들 빈말로도 재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중용中庸이 여전히 난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현들이 거듭 강조한 이유가 있었다.

‘어렵군…….’

다른 목민관들도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은지, 중용이 중요하다는 데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일지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김장생은 재차 실소했다.

“이 사람은 이 문제에서 무엇이 중용인지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직접 더듬어보지 않고는 가늠하기가 힘든데, 제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타협점을 뚜렷히 제시할 수 없으니 일단 내주를 점령하고 난 뒤에 더듬어가며 알아보자는 소리였다.

“음…….”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왔으나 탐구를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 이상 고민은 소용없다는 것.

내주를 점령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결국 해봐야 알 수 있다.

목민관들로선 막연한 어림짐작으로 찬반을 던지려니 참으로 곤혹스러웠으나, 우유優柔에 부단不斷이 상책일 리는 없었다.

* * *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김경여의 말에 내주부 유지들이 환하게 반색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부탁이라기보단 고압적인 발언이었다.

이에 유지들은 그때 바친 뇌물로는 부족했냐는 듯, 은근히 불만스러운 태도로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아조는 본디 청주만을 보호하기로 계획했으며, 내주부에서 관인을 바쳐가며 귀부를 요청하는 건 예정이 없던 일이다.”

김경여는 너희들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냐며 상기하곤 일렀다.

“내주는 작지 않은 땅이다. 통제해야 할 사람도 많지. 그대들은 귀부와 함께 복종을 약속했으니, 마땅히 사람과 곡식을 내어 일조해야 할 것이다.”

유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펴대자 김경여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응하지 못하겠다면, 그 의사를 기억해두고 있지.”

이미 북경과 그 일대를 장악한 순나라에 의해 풍전등화에 놓인 산동이다.

여기에 배후의 조선령 청주까지 잠재적인 적으로 만든다면, 내주에 구원이란 없다.

김경여는 유지들과의 첫 단추를 강强으로 끼우기로 했다.

뒷간을 다녀온 다음에는 쉽사리 건방져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김경여가 제안에 응해준 즉시 기고만장해진 유지들의 태도로 증명됐다.

그렇다면 유지들이 뒷간을 다녀오기 전 시급할 때 압박해 최대한의 이익을 취한 다음, 소외하여 그들이 내주 통치에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김경여의 내주 개입에 응한 목민관들이 다 함께 도출해낸 중용中庸이었다.

그 결과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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