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67화
여름이 되자 경기감사에게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른 목민관들이 듣는다면 배가 불렀다고 코웃음 칠, 그런 걱정거리.
-감사 영감.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말이외까?
-올해 작황이 너무 좋습니다.
-……나를 놀리는 게요?
감사는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작황이 좋으면 좋은 것이지, ‘너무’ 좋은 게 어디 있겠으며 무슨 큰일이란 말인가.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뜻이라면 이해는 되겠지만,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구려.
-아닙니다. 진짜로 큰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작황이 좋은 게 큰일이란 말이요?
-작황은 예년에도 좋았습니다만, 그때는 추수와 탈곡, 도정에 필요한 일손을 외지에서 끌어와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앙법의 효과가 워낙 강력했던 나머지, 그해 안주목에서는 타지에서 날품팔이를 구해 필요한 일손을 겨우 충당했다.
그리고 그게 문제가 되었다.
안주목에서 일손을 보태며 이앙법의 효과를 목도하고 체감한 날품팔이들이, 올해 고향에서 똑같이 이앙법을 시도하며 경기 동남부 전체에서 소출이 폭증한 것이다.
-고을에서는 벌써 마을마다 사람을 바깥으로 보내, 외지의 날품팔이들을 미리 구한다며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삭이 대강 영근 것만 보아도 올해 소출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대에서는 다 똑같이 이앙법을 시도했으니, 일손이 씨가 마를 건 명약관화하였으므로 미리 날품팔이를 수배하려는 것이다.
-어쩐지 거리에 날품팔이를 구하는 사람이 늘었다더니!
-올해 당장 필요한 일손은, 어떻게 향촌마다 알아서 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내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많은 날품팔이가 이앙법의 효험을 목도하게 체감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 그다음 해에는…….
-일손이 훨씬 더 부족해지겠군!
-예, 고을마다 한겨울이 되어서도 이삭을 다 털어내지 못한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미래로 치면, 복권에 일등 당첨되었는데 당첨금을 천 원짜리 지폐로 수령하게 된 꼴.
좋은 일은 좋은 일이되, 이래서야 이다음이 처치 곤란인 것이다.
-안 그래도 경기에서 많은 사람이 해외海外로 빠져나가 곤란하던 참인데…….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없는 일손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하늘에 발원한다고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거늘?
-……아무튼, 소관은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뭐요?
-소관으로선 지혜와 학문이 부족하여 차마 상책을 낼 수 없으니, 감사께 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는 대책이 없으니까 상관인 네가 어떻게 해보라는 소리였다.
-…….
관찰사, 약칭 감사는 지방 목민관들의 고과를 평정할 수 있다.
그러니 보통의 경우라면 목민관들이 다 설설 기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목민관이 감사를 핍박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년이면, 어쩌면 당장 올해 가을부터 경기도 전체가 일손 부족이라는 중대한 위기에 처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목민관들만 아니라, 감사 또한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백성들의 소출을 기반으로 세금을 매기는데, 소출이 늦게까지 불투명해지면 정산도 수취도 늦어지고 불투명해지니까.
그게 경기도 전체에서 발생하면 감사의 감투부터 가장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누가 위에서 바람 한 번 후, 불어주면 감투가 날아가는 것이다.
이는 목민관들도 마찬가지.
다 죽기 전에 대장인 네가 뭐라도 해보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전 안내해드렸으니 가보겠습니다.
-뭐? 이봐! 이보게! 야!
경기감사가 난처해진 연유였다.
휘하라는 목민관은 고민거리만 던져주고 도망, 자신이라고 뚜렷한 방도는 떠오르지 않으니…….
며칠을 끙끙 앓던 경기감사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안주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상관에게 문제를 떠넘긴 뒤 나 몰라라 하는 것.
“왜 나 혼자 고민해야 하지?”
실행은 쉬워도, 결정은 쉽지 않았다.
경기도의 책임자는 경기감사 본인.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상부에 역류시킨 건 고과에 전혀 이롭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 살벌하게 엄습해 오는 위기를 쉬쉬했다간 고과 이전에 자신의 생명부터 이롭지 않게 된다.
혹 책임을 물어 파면 이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대로도 심각하게 곤란한 일.
“어차피 상부에서도 방법은 없을 테고.”
아무리 의정부와 육조의 재상들이 날고 긴다고 하여도, 없는 일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하삼도에서 인력을 끌어 온다?
그래 봐야 미봉책이다.
당장 내년까지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을 박박 긁어모아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다음 해는?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할 일이야. ……나라님도 어쩌지 못할 일이고.”
독박 쓰는 것도 억울하고, 그렇게 독박 쓰고 물러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조정에서도 미리 알아야지 않을까?
“나라에서도, 나라님도 어쩌지 못할 문제라면 내가 책임질 문제는 아니겠지…….”
* * *
며칠 뒤.
한양의 경운궁 깊은 곳에서, 영의정 이원익이 왕을 방문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앉으시지요.”
왕은 서안을 두고 반대편에 놓인 방석을 권했다.
이원익은 예를 올렸고, 뒤이은 왕의 권유에 마지 못하는 척 편하게 앉았다.
다행히도 왕은 노신의 낡은 관절을 걱정해주는 사람.
자세를 고친 이원익이 물었다.
“경기도의 일 때문이옵니까?”
“예. 회의에서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일단락하였지요. 그것을 이 자리에서 해결할까 합니다.”
“송구하오나…….”
이원익도 뾰족한 묘수라곤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의 손 자체가 부족해서 벌어지는 문제이옵니다. 허공에서 사람을 만들어낼 도리는 없지요.”
이앙법을 다시 금지하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연말의 상황을 보아 대책은 여전히 없고 폐해만 심각하다면 정말로 이앙법의 금지도 고려는 해보아야겠지만…….
당장 내릴 결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으랴?
이원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 염두에 두신 방도가 있으시옵니까?”
이외엔 달리 왕이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과연.
“예.”
“……허어.”
“대신, 영의정께서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명하시옵소서. 노신이 무엇을 하면 되겠사옵니까?”
놀라움도 잠시.
이원익은 왕의 계획을 듣기로 했다.
오늘날 벌어진 사태는 민간의 소출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이 심각한 인력 부족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과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부국富國은 곧 강병强兵의 지름길.
이상적인 국가에 성큼 다가가는 셈이다.
왕 바로 아래에서 나라를 경영하는 영의정으로서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대신, 영의정이 궁구窮究해 주어야 합니다.”
“궁구, 말이옵니까?”
“인평대군에게 들었습니다. 천문판과 천문경을 설계하는 데 영의정의 지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지요.”
“두 기물을 고안하고 설계한 건 인평대군이고, 신은 단지 미력하게나마 생각을 보태었을 뿐입니다.”
“하하……. 인평대군이 말하는 분위기를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요.”
왕의 눈에는, 인평대군이 칭찬에도 도리어 실망하고 상실감을 내비치던 모습이 선연했다.
때때로 식음마저 걸러 가며 몰두한 연구였다.
그것만으로도 대견할진대, 결과물인 천문판과 천문경도 모두 보통 비상한 발명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칭찬에 도리어 슬퍼한 연유는 무엇인가.
자존심이 대단히 상해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평대군은 머리가 트이고 나선 오직 천문만을 파고들었고, 인상적인 성과도 두루 세웠다.
천체의 운행을 규명했고 전통적인 우주론을 타파했으며 옛 역법을 재건하고 개정했다.
그런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전문가라 자부할 분야에서 막 깨우친 신입이 발명에 더 일조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이원익이 신입은 아니었다.
조선 지성의 정점을 의미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고, 올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으며, 그동안 관상감의 장관인 영관상감사를 겸임해왔다.
그런 이원익에게 있어 천문이란 자신이 아우르는 지성에서 일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하지만, 인평대군에게는 천문이 자신의 전부였다.
“겸양하지 마시지요. 그러면 인평대군만 불쌍해지지 않습니까.”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다면, 지혜를 빌려주셔야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이원익이 설마 여부야 있겠냐는 듯, 조금은 채근하는 기색으로 답했다.
왕은 희미하게 웃고는 물었다.
“우리가 난처해진 이유는 대풍大? 때문이지만, 대풍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요?”
“그러하옵니다.”
“문제는 일손이 부족한 것이고요.”
“예.”
“하지만, 일손을 만들어내 충당할 방법은 없습니다.”
“예에…….”
이원익은 논의의 흐름을 의심했다. 왕이 삼척동자도 알 이야기를 굳이 하나씩 짚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이원익은 자문한 직후 곧장 자답할 수 있었다.
“일손을 줄여야 한다는 하교이시옵니까.”
“역시……, 예. 그렇습니다.”
이원익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고는 고민했다.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가는 수확은, 일손을 줄일 방법이 쉬이 들지 않사옵니다.”
벼를 추수하는 과정 자체는 단순하고 반복적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방대한 면적의 논을 다 훑어야 했다.
사람의 손을 쓰지 않고는 좀처럼 대체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정은 어떻습니까?”
“도정은…….”
곡식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도정 이전의 쌀알에는 기름기가 있어, 고작 몇 개월만 지나도 산패되어 맛이 변질하기 때문.
반대로 도정이 끝난 낱알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거의 무기한에 가까운 보관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곡식을 도정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되고 수고스럽다.
절구나 디딜방아, 물레 따위를 이용해 일일이 겨를 벗겨내야 했으니까.
그래서 권세가들은 쉬이 힘없는 백성들을 부려 도정하는 고생을 떠넘기곤 했다. 당연히 법적으론 금지된 행위.
“나라에서 물레방아를 대대적으로 설치한 다음, 백성들에게 헐한 값으로 빌려줌은 어떻겠사옵니까?”
무한히 제공되는 수력을 이용한 것이니, 올바른 관리와 공정한 대여가 이뤄진다면 백성들의 도정하는 고생을 크게 덜어줄 수 있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장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건 버겁겠군요. 공조에서는 이미 가용한 역량을 모두 동원해 전라도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으니…….”
따로 명령을 내린다면 물레방아 몇 개는 설치할 수 있겠지만, 수요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터였다.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탈곡은 어떨까요?”
“탈곡 역시 디딜방아나 물레방아가 쓰이기도 하옵니다만, 세간에서는 흔히 도리깨로 타작하옵니다.”
“그 원리는 이삭을 때려 낱알을 털어내는 것이니…… 어쩌면 큰 시설을 동원하지 않고도 작업을 단순화할 수 있겠습니다.”
이원익은 그것이 왕의 안배임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