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68화
한양 한복판, 의정부.
육조직계제의 부활과 비변사 폐지, 국가의 부흥은 폐조 시절 파리만 날렸던 의정부를 어떤 것보다 더 바쁘게 만들었다.
당상들은 제각기 자리에서 켜켜이 쌓인 공문을 논의와 함께 처결해 나갔다.
그리고, 아침에 가져온 권자들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오늘은 일찍 해산하겠구나, 하는 기분 좋은 기류가 흐르는데 사인舍人 여이징이 목판에 권자를 한가득 쌓아놓고서 나타났다.
“또 일감인가?”
좌의정 박홍구가 불만스럽게 묻자, 여이징이 희미하게 웃었다.
“예.”
여이징은 이원익의 자리인 상석 옆에 서, 목판의 권자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감이 돌아가지 않았다.
오직 이원익의 자리에만 권자가 쌓였고, 막 바닥을 보인 서안 위에는 문서의 탑이 생겨났다.
그 애석한 광경에 박홍구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공문들이기에 영상 대감의 자리에만 쌓이는가?”
“예조입니다.”
“……흐음.”
예조라면 바쁠 법했다.
근래 들어서는 더욱 그랬다.
위로는 금나라에서 새 한이 즉위한다고 사신을 요청하고, 서쪽에서는 명나라의 유일해진 수도 남경에 유상의 지부를 세운다고 난리니까.
나라 안에서의 일도 적지 않은데 조선의 위상이 올라가고 대외 활동이 많아진 부작용이다.
“알았네. 가 보게.”
일이 많아서 많을 뿐인데, 애꿎은 사인을 책망할 수도 없는 노릇.
“예.”
여이징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박홍구가 상석을 향해 물었다.
“이 사람이 마침 일을 마쳐 손이 비어 있으니, 덜 심심하게 일감을 나눠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막 펼친 권자에 코를 박고 있던 이원익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하.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니 될 이유는 또 어디 있다고요. 그리고, 영상께선 근래 바쁘지 않습니까?”
전에는 인평대군과 함께 장치를 만든다, 이제는 왕명을 받아서 기물을 개발한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한탄이라도 한다면 위로를 건네겠으되, 본인이 좋다고 하므로 딱히 도울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일감을 덜어주는 것 외에는.
박홍구의 그러한 마음을 아는지, 이원익은 슬며시 미소 짓고는 권자를 손 한가득 쥐어 밀어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에.”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우의정 이상의가 말했다.
“이 사람도 돕겠습니다.”
그러자 박홍구가 곧장 고개를 치켜들고서 말했다.
“우상께선 본인 서안에 놓인 일감들이나 마저 처리하고 말씀하시오.”
이에 긍정하듯 이원익이 웃었고, 이상의는 멋쩍은 듯 헛기침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했다.
잠시 후.
이원익은 박홍구의 도움에 힘입어 늦지 않게 업무를 마쳤다.
그리고 바깥을 확인하니 아직은 낮이었다. 퇴청까지 한두 시진은 남은 시각.
“이만 퇴청들 할까요?”
이원익이 물었다.
이른 퇴근을 마다할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박홍구와 이상의는 기꺼이 응했다.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이만 해산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영상 대감께서도 일정이 있으시니…….”
“하하, 그래요. 퇴청들 합시다.”
이원익은 북촌으로 향할 두 의정과 내일 다시 볼 것을 기약하고, 자신의 거처가 있는 동쪽 천달방泉達坊으로 향했다.
* * *
인평대군이 막 몰두하던 때, 이원익은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다.
연구한 결과를 본인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너저분하게 흩뿌려 놓다니?
하지만, 이원익은 이제 공감할 수 있었다.
이원익은 가칭 ‘탈곡기脫穀機’라는 기물을, 막연한 개념에서 실체로 재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으므로 때때로 이원익은 식음마저 잊어가며 탈곡기의 개발에 몰두했고, 그러다보니 무수한 사고의 파편들이 너지분하게 흩날리게 되었다.
얼핏 지저분한 광경.
그러나 이원익 본인은 흩어진 결과물들에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고안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다 알았다.
사방에 놓인 무수한 파편들이 완성이라는 하나의 점을 향해 수렴하고 조립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이익!”
퇴청하고 돌아온 이원익의 방은 한없이 깔끔했다.
그리고, 그간 몰두해온 무수한 사고의 결과물은 방구석 한쪽에 각이 잡힌 채로 쌓여 있었다.
표면에 불과한 정돈이었다.
전까지 방의 풍경이 얼핏 너저분하긴 했으나, 이원익 본인의 머릿속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들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두서없이 쌓아놓으니 알 수가 없었다. 어질러진 것이다.
“누가 내 방을 치워놓은 것이냐!”
이원익이 사랑방에서 뛰쳐나오며 외치자, 의정의 처소답지 않게 몇 없던 노비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내 방을 치워놓지 않았는데, 그러면 기물들이 알아서 스스로 정리되었다는 말이냐?”
“…….”
연이은 추궁에도 나서서 죄를 자백하는 사람이 없자, 이원익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허. 내 너희를 모나게 보지 않았거늘, 이런 식으로 실망을 안기는구나.”
평판 좋은 주인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범인이 마지 못해서라도 나설 법하건만, 여전히 노비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펴댈 뿐이었다.
이원익은 내심 실망하였다가 이내 신색을 가다듬고서 일렀다.
“……그래, 범인이 너희 중에 없을 수도 있겠구나.”
노복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사랑방에 쳐들어와 기물을 정리하겠느냐만, 짧지 않은 인생 이원익이 배운 건 세상일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왕이라는 작자가 국난을 맞아 나라를 버리고 요동으로 도망가겠다고 할 줄 누가 알았던가?
거듭 견부호자의 고사를 증명하며 다 쓰러져가는 나라에 빛이 될 줄 알았던 세자가, 부왕을 능가하는 암군이 될 줄은 또 누가 짐작했겠는가.
그리고 그다음 즉위한 왕은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나라를 수습해내고, 나아가 삼한의 역사를 통틀어 천 년도 더 된 영화를 재현해냈다.
정말로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법.
무슨 신묘한 작용이 있어 기물이 정말로 스스로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몰래 방에 숨어 들은 도둑에게 우연히 심각한 정리벽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희 중에 범인이 없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다들 다시 일 보거라.”
이원익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놓인 노비들은 주인의 허락에도 곧장 흩어지지 못하고 계속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집에서 가장 오래 일한 수노首奴에게 이목이 모였고, 연배만 치자면 이원익 못지않은 수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모두가 흩어진 마당에서 수노만이 남아 상전을 불렀다.
“주인 대감.”
이원익은 안에서 문서와 도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파악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익숙한 수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원익은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밖을 향해 답했다.
“어인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전할 말이 있다면 밖에서 해도 될 터. 그런데도 굳이 의사를 전달하니, 이원익이 그 뜻을 알고 일렀다.
“들어오게.”
허락과 함께 수노가 방으로 들어왔다.
막 들어선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그는, 상전 앞에 꿇어앉고서 작게 말했다.
“쇤네가 대감의 방을 치운 사람을 알고 있사옵니다.”
“…어찌하여 내가 물어볼 때는 나서지 않았는가?”
“모두의 앞이었기 때문이옵니다.”
“이제는 달리 듣는 사람이 없으니, 개의치 말고 말하게.”
수노는 고개를 끄덕이곤 각오한 얼굴로 말했다.
“대감의 방을 치운 사람…… 아니, 방을 치운 분은 안방마님이십니다.”
이러니 다른 사람들 앞에선 말할 수가 없다.
어떻게 노복이 모두의 앞에서 안방마님이 범인이라고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원익의 체면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이렇게 알려주어 고맙네.”
수노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일어났다.
“쇤네는 다시 물러나겠습니다.”
“그러시게.”
수노가 물러나자 사랑방이 조용해졌다.
이원익은 살피다 말고 내려놓은 문서들을 흘겨봤다.
여전히 많은 문서가 정리되지 않은 채 쌓인 그대로였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안사람이 와서 정리했다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다만,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이원익은 낡은 무릎을 짚으며 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찾아간 뒤편의 안채에, 그의 부인이 있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컬어지는 영의정 집안의 안주인답지 않게, 천을 무릎에 걸쳐놓고서 직접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부인?”
이원익이 가까이 다가가 앉아 부르자, 그제야 정씨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인 일이십니까.”
“오늘, 이 사람이 밖에 있는 동안 방을 정리해주셨습니까?”
“예. 옷을 가지러 갔는데, 방이 너저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이원익은 부인 정씨가 발 디딜 틈 없는 사랑방 내부를 앞두고 당황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자칫, 밟아 망가뜨릴 수 있으니 일단 치워놓은 모양이리라. 그것을 어찌 책망할 수 있으랴.
“폐가 되었는지요?”
“……아니요.”
의원익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다 정리되어 있는데 누구의 수고인지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인께서 고생하셨나 싶었습니다.”
내막을 알게 된 이원익은 앞으로 자신이 조심해야겠다, 그리 결론 내리고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대감은 어인 일로 물레를 연구하십니까?”
“물레요?”
“물레 비슷한 그림을 잔뜩 그려놓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그건 물레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타작하는 데 필요한 기구를 구상하고 있었지요.”
“타작에는 많은 힘이 들 텐데. 물레 돌리듯이 앉아서 타작할 수 있다면 백성들이 크게 편해지겠습니다.”
부인 정씨는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었으나, 이원익은 탈곡기의 단서가 뇌리에 내리치는 듯했다.
“부인, 그대가 이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제가요?”
“예!”
이원익은 부인 정씨의 가느다란 손을 맞잡고 감사를 표했다.
“이 사람은 나랏일을 하러 돌아가보겠습니다.”
“예에…….”
부인 정씨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이원익이 좋아하므로 잘 되었구나 여겼다.
“고생하시지요.”
이원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방을 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사랑방에서 그동안 정리하다 만 문서들을 서안에서 밀어냈다.
옛 사고의 파편이 쓰러지며 다시 방바닥을 어지럽혔지만, 이원익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기치 않게 얻은 탈곡기의 단서만이 가득했다.
* * *
며칠 뒤.
왕에게 입궐을 청한 이원익은, 자신의 역작을 대동하고서 편전을 방문했다.
“신이 고안한 탈곡기이옵니다.”
“호오.”
원리는 단순했다.
“이곳 원통의 위로 이삭을 대고서 아래의 발판을 밟으면, 이렇게 원통이 회전하며 외부에 달린 고리가 이삭을 때리옵니다.”
그렇게 낱알을 분리하는 것이다.
최초의 구상은 물레와 마찬가지로 원통을 손잡이로 직접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모형을 만들어 시험해보니 계속 손잡이를 돌리는 건 참으로 수고스럽고 힘들었다.
그래서 이상의는 천문대의 개폐식 지붕을 만들 때 고안한 동력전달 장치를 이용해 손잡이를 발판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는 훨씬 좋았다.
“이 탈곡기를 이용하면, 도리깨로 직접 이삭을 때리거나, 이삭을 이고서 탯돌이나 개상에 내려치는 수고로움 없이 가만히 서서 발판만 밟는 것으로 타작할 수 있사옵니다.”
이에 왕도 한 마디 거들었다.
“발판을 한 사람이 전담하여 계속 밟는 동안, 다른 사람이 조를 맞춰 이삭도 계속 넣어준다면 쉬지 않고 타작할 수 있겠습니다.”
“예, 그리한다면 이전의 방식보다 족히 수백 배의 효용이 있을 것이옵니다.”
장치가 단순하지 않아 만드는 데는 약간의 비용과 수고로움이 들겠으나 최종적으로 아끼는 시간과 노동을 생각하면 족히 혁신적이었다.
그래서, 이전 역사에서도 등장과 함께 모든 재래식 기구를 도태시켜버린 족답식足踏式 탈곡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