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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69화 (269/380)

인조, 명군이 되다 269화

이원익에 의해 족답식 탈곡기가 개발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경기감사였다.

올가을 대풍으로 인한 인력난은 경기도에서 발생한 사태.

당연히 경기도의 책임자인 경기감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 수습하는 대신 상부도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 여겨 위로 던졌다.

그런데 타개책인 탈곡기가 단숨에 개발되어 버렸으니…….

“이런 제기랄.”

경기감사는 동헌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탈곡기를 마주하고서 탄식했다.

중앙에서는 견본과 함께 명령을 전했다.

탈곡기를 양질로 양산하여, 고을마다 분배하고 사용법 역시 교육하는 것.

이 임무에 실패한다면 뒤이어 벌어질 상황은 명약관화였다.

경기도의 문제를 역류시켰고, 그 해법으로 내려온 지시다. 이마저 이행에 실패한다면 공직생활은 여기까지가 끝인 것이다.

“……경기도의 모든 소목장小木匠을 수배해. 가을이 되기 전에 이백 개는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바다처럼 쌓일 이삭을 제때 탈곡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전에 배분과 교육까지 마쳐야 하므로, 감사에겐 일정이 촉박했다.

‘소목장 하나가 보름에 하나 만든다 치면 가을까지 소목장이 몇이나 필요하지……?’

감사는 고민을 이어가기 전, 당혹한 낯으로 마당에 선 아전과 녹사들에게 일렀다.

“뭣들 하나! 빨리 소목장들 수배하라니까!”

* * *

경기도의 모든 행정력이 집중된 탈곡기 사업은, 세밀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됐다.

소목장들이 하나둘 집결하는 동안 경기감사는 견본을 직접 분해했다.

자신의 관직 생활이 걸린 상황이다. 가장 중요한 견본의 해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었다.

동시에, 경기감사는 화공들을 청하여 탈곡기의 원형과 분해의 각 단계, 그리고 최종 결과와 부품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역순으로 재배열하니 탈곡기를 조립하는 순서가 되었다.

탈곡기를 해체하고 남은 부품 중에는 금속이 많았다.

이들 금속 부품은 탈곡기를 기능하게 하는 핵심 장치이기도 했으므로, 감사는 야장冶匠들에게도 애원해야 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도와주시게…….”

보통, 야장들은 관에 납품해야 할 물목을 충족하면 남는 시간에는 자신의 물건을 만들어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탈곡기 부품을 양산하게 되었으니, 이는 의무를 능가하는 노역이었다.

“공납은 이미 마쳤는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기물을 가져와 만들어달라고 하시니 매우 난처합니다요.”

대표 야장의 말에 감사는 그저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경기에서 최고의 장인들인 자네들이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평소였다면, 관에서 까라는 대로 까라며 핍박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감사의 관직 생활이 걸려 있었고 다종다양한 부품을 양질로 양산하기 위해서는 야장들이 평소 공납품을 만드는 것 이상의 시간과 수고로움이 필요했다.

야장들이 제 일처럼 성심성의껏 협조해주지 않으면 감사로선 답도 없는 상황.

천하에 몇 없는 종이품 당상관이라도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이번에 도와주면 내 남은 임기 동안 자네들 공납은 완전히 제해주겠네.”

“……그게 됩니까요?”

해마다 필요한 물품이 있는데, 공납을 완전히 제해준다면 어떻게 충당한단 말인가.

평생 쇠만 만지고 살아온 야장들이었으나 곧바로 의심이 들었다.

일자무식일지언정 생각이 없진 않아서만이 아니요, 높으신 분이 저 아쉬울 때는 간이라도 떼어줄 것처럼 질러놨다가 변소 다녀온 뒤에는 철판 당당히 깔고 도망치는 꼴을 제법 봐온 탓이었다.

“내가 수결이라도 해줌세!”

“…….

“믿지 못하겠다면, 서류를 남기면 될 것 아닌가?!”

경기감사의 제법 다급한 모습에, 야장들은 서로를 의식했다. 간절한 마음이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두 해 동안 공납품을 반으로 줄여주시면 하겠습니다.”

“으, 응?”

“저희는 감사 영감의 임기가 올해로 마지막일지, 아니면 연임까지 하실지 모르잖습니까?”

당장 올해로 감사가 쫓겨나건, 자리를 옮기건 자리에서 물러나면 임기 동안 공납을 제해주겠다는 약조는 의미가 없었다.

반대로, 너무 길어져도 경기 동헌으로서는 대책이 없어지는 셈.

“……어음.”

경기감사는 3초쯤 고민했다.

명확한 기간을 정해 특혜를 보장했다가, 혹 후임의 임기까지 번지기라도 하면 제법 곤란해지기 때문.

그러나 경기감사는 곧장 자신에겐 주도권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두 해 동안 예년의 공납품을 반만 일하시게!”

“수결도 해주셔야 하옵니다요.”

“그, 그래!”

경기감사는 대답과 함께 동행한 노복을 채근하여 문방사우를 펼쳤고, 야장들은 감사가 먼저 늘어놓은 쇠 부품을을 가져가 살폈다.

* * *

“이렇게 영감의 관인까지 써서 야장들에게 특혜를 약조해버리시면…….”

감사의 귀환과 함께 내막을 알게 된 판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탈곡기를 제때 보급하지 않으면 당장 올가을부터 참사가 벌어질 텐데, 이 정도는 내어주어야지!”

감사가 당당하게 해명했지만, 판관으로선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과연 감사가 공적인 이유만으로 야장들에게 특혜를 약조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관의 권리를 팔았다는 합리적 추측이 들었다.

“부족한 기물은 어떻게 충당하실 계획이십니까?”

“……뭐야, 자네가 내 상관이야?”

“그건 아닙니다만, 감사께서 대책을 세우시고 제공한 혜택인지 아닌지는 알아두어야 미리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감사가 대책도 없이 지른 것이라면, 상부에서도 알아야지 않을까?

감사는 판관의 의도가 눈에 선연히 읽혔다.

“그, 뭐시기냐!”

“…….”

“탈곡기는 추수 때 대여해 주면서 나름의 삯을 받을 예정인데, 그걸 잘 조율하면 부족한 기물은 사들여서 충당할 수 있네!”

막상 말하고 나니 제법 괜찮은 계획이었다.

야장들에겐 특혜를 제공해서 탈곡기를 제때 보급하고, 그래서 상부의 지시도 이행하며, 대여료로 삯을 받아 특혜의 비용을 충당하면, 약조가 끝나는 두 해 뒤에는 오히려 고정 수입이 생겨날 터였다.

“이, 이게 바로…! 어? 감사쯤 하는 사람의 구상이란 말이지!”

감사는 자신이 걸친 구군복의 소매를 두들기면서 호통쳤다.

“내가 이 옷을 노름으로 딴 게 아니야!”

“그…… 으렇군요.”

판관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감사로서는, 이 불온한 판관의 압박을 계속 받아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일단 쫓아내기로 했다.

“어흠! 거! 쓸데없는 소린 그쯤하고 일 보시게! 자네도 바쁠 거 아닌가?!”

보는 사람이 없어지자, 경기감사는 가슴을 쓸어냈다.

* * *

그날 밤.

서쪽 바다 건너 내주에서는.

잘 차려입은 이들이 모인 장원 한복판에서 불온한 기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본디 인간의 습성이란 뒷간을 다녀온 다음에는 쉬이 오만해지는 것.

나아가 어떤 자들은, 수결까지 놓더라도 자신의 못된 습성을 이겨내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가 재물과 함께 내주부의 관인도 바치고, 사람도 구해 군사로 삼도록 도왔거늘! 외지인들은 존중이란 걸 보이지 않는구려!”

“존중만 없다 뿐이겠습니까? 우리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니, 이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그놈들이 오랑캐나 도적들과 다른 게 뭐란 말이요!”

내주의 유지들이었다.

진평부사 김경여와 청주의 관리들은 내주 유지들이 통치에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했다.

내주를 장악하기 전까지만 지원을 받아낸 뒤, 그 뒤에는 소외하여 의도적으로 내주 통치에서 배제한 것이다.

그러나 김경여와 관리들은 이 점을 간과했다.

내주의 유지들이 처우를 문제 삼아 내부의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말이다.

방심이라고 책망하긴 어려운 간과였다.

내주는 반란군과 도적들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였으며, 외부에서 당장이라도 짓쳐들 듯 넘실거리는 병화兵禍에서 내주를 보호한 건 이들이 내건 조선의 보호였으니까.

제국의 수도였던 북경마저 함락시키고 순나라의 황제를 참칭하게 된 이자성마저, 함부로 조선을 적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유지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단지, 그간의 우려가 허탈해질 정도의 안온만을 느낄 뿐.

그리고 방벽이 주는 안전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영역을 넓히겠다며 안에서부터 방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외지인 놈들이 하는 것도 없겠다, 쫓아내고 우리가 직접 내주를 지배합시다!”

“옳소!”

“비천한 오랑캐와 도적들도 하는 걸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뭐겠소?!”

적의로 가득한 웅성거림이 유지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미친 발상이라 여길 법도 하였으나, 내색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불붙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부채질하듯 여론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갈 뿐.

“이참에 연판장連判狀을 씁시다!”

“연판장?”

“우리가 의기를 모아 밖에서 굴러온 늑대 무리를 쫓아내기로 하였으나, 누군가는 간담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내주 만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있지 않소?!”

“그렇지!”

“촉한 소열제昭烈帝가 아우들과 그리했듯, 우리도 이 자리에서 술을 나눠 마시고 함께 살기를 도모합시다!”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렇게, 여론을 몰아간 몇 사람에 의해 유지들은 술기운을 빌려 연판장에 이름을 나눠 쓰고 함께 반역을 일으키자고 약조했다.

그리고 유지들이 고양한 감정 속에서 더 많은 술을 들이켜고,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우며 담장을 향해 도끼를 들이미는 동안.

유지들은 한둘씩 대취에 인사불성하여 장원을 빠져나갔다.

그중 비틀거리며 칠흑을 거닐던 한 사람은 나아갈수록 발걸음이 점차 또렷해지더니, 이내 어딘가로 다급히 향했다.

* * *

유지가 도착한 곳은 조선의 관리가 상주한 내주부 관아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마당에는 화등을 피워놓고 있었는데 오늘 밤만은 사뭇 기색이 달랐다.

마당을 지키는 야간 보초들 외에도 안쪽에서 내주부사가 조선인 아전을 상대하고 있었다.

거리낄 것 없었던 유지는 솟을대문을 넘어 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장 보초가 길을 막아섰고, 안쪽의 두 사람은 인기척을 느끼곤 몸을 돌렸다.

“부사 대인!”

내주부사가 손짓하여 보초를 물렸다.

“급한 일인 모양인데 비켜주지.”

“…예.”

유지는 보초에 고개를 끄덕이곤, 내주부사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내주부사가 상대하던 조선인 아전이 말했다.

“여기 한 사람은 살아남겠습니다.”

강대한 토착 세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해온 내주부다.

당연히 예조의 속사로 백성들의 의견을 남김 없이悉 듣는訪 기관司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러나, 유지는 조선말을 알지 못했다.

“대인, 내주부의 간악한 사람들이 거두어준 은혜를 잊고 이를 원수로 갚고자 합니다!”

“알려 주어 고맙소.”

내주부사는 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사특한 작당 모의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종자들이 감히 난역을 도모하는지 알려주시겠소?”

“모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진사를 지낸 주朱의 장원이고, 정확히 어떤 자들이 가담하였는지는 모두 알지 못하나 연판장을 작성하였으므로…….”

유지가 다소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쏟아내는 동안, 내주부사는 자신을 의식하는 실방사의 아전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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