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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70화 (270/380)

인조, 명군이 되다 270화

내주성.

새벽과 닭 울음소리를 앞두고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는 시점에서, 한 사내가 거나하게 만취한 채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사내는 마주했다.

“…!”

조선의 군사들이, 그들을 쫓아내기로 유지들이 결의한 주朱의 장원을 포위한 모습을 말이다.

사내는 위기를 알리고자 곧장 입을 열었지만, 뚫린 입에서 나오는 건 맥없는 바람 소리뿐.

“헉…….”

쓰러지는 사내 바로 뒤에서, 육모방망이를 든 조선군이 포승을 챙겼다.

“하마터면 소란스러워질 뻔했군.”

구군복을 걸친 내주부사가 말했다.

그는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은 데 안도하며, 마편馬鞭을 들어 주朱의 장원을 가리켰다.

“진입해라.”

평이한 어조의 지시가 있었고, 장원을 포위한 조선군 중 일부가 장원의 반쯤 열린 대문으로 진입했다.

모두가 쓰러져 있진 않았던 걸까.

“조, 조선군?”

“조선군…… 조선군이다!”

그리고 곧장 장원 전체가 시끄러워지더니, 고함과 함께 기물이 부서지고 박살나는 소리가 연이었다.

어떤 유지는 담장을 넘다가 그 너머까지 포진한 조선군을 마주하고는 얼어붙었으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신없이 넘어왔다가 담장 아래에서 그대로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대문으로 왈칵 튀어나왔다가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질렀고, 또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조선군의 대오로 몸을 날리기도 했다.

“승냥이 같은 조선놈들!”

“놔라!”

“이제는 우리를 죽이고 내주를 독차지하겠다는 게냐!”

중국어를 아는 내주부사로선 경악스러운 뻔뻔함이었다. 이미 고발이 있어, 저들이 먼저 배반과 반란을 모의했음을 전해 들었으니까.

“조선이 내주를 독차지한다니!”

내주부사가 헛소리를 곱씹으며 헛웃음을 터뜨리자, 바로 앞에 무릎 꿇려진 사내가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를 통치에서 배제하지 않았느냐?!”

“허! 그대들이 먼저 반란군 무리에게서 보호를 요청했으며, 충성을 약조하지 않았던가?”

“네놈들은 우리를 존중했어야 했다!”

“부탁에 응해 진주하고 변경을 지켜온 아조와 군사들을 상대로 칼을 든 배신자들 주제에 발언이 이상하구나.”

무엇이 존중이란 말인가.

조선이 유지들을 의도적으로 통치 구도에서 배제한 건 맞지만, 이는 내주가 조선에서 이탈하거나 겉돌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으로, 유지들을 탄압하거나 그들을 재산을 강탈하지는 않았다.

풍족한 물질적 사회적 기반을 보전하였으므로 계속 유지로서 군림하거나 과거를 치러 조선의 관료가 되는 데도 부담은 없었을 터.

“네놈들이 이렇게 배신할 수 있음에도 숙청하지 않은 게 존중의 결여였다면, 요청을 받았다고 순순히 보호하는 대신 창칼을 내세워 내주를 장악하고 네놈들을 척살하는 건 무엇이냐?”

그 또한 존중의 결여라면, 마침 인용하기 좋은 속담이 있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취급을 받는다면 가급적 뒷맛이 깔끔한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리해야겠지.”

“……!”

사내가 숨을 삼키는 동안, 주변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번졌다.

외부에서 군중의 무리가 모여든 것이다.

개중에는, 유지들이 괜히 과욕을 꿈꾼 게 아니라는 듯 주변의 장원에서 뛰쳐나온 사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점차, 장원을 포위한 조선군을 밖에서부터 포위해왔고 한 군관은 위압적인 광경을 앞두고 상관을 찾았다.

“부사 영감.”

지시를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사병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지양한다. 이놈들을 숙청해 버리면 알아서 해산할 것들이야.”

내주부사는 유지를 슬쩍 흘겨보았다.

“하지만…….”

사병들은 계속 조선군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병들을 지휘하는 자들은 장원 안에서 병권을 맡을 정도로 제 주인과 가족이거나, 그만큼 가까웠던 자.

유지가 몰락한다면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는 신세들이었다.

그들이 지휘하는 사병이었으므로 양측이 인접하는 순간 벌어질 일이란 너무나도 명약관화했다.

“부사 영감, 지금이라도 방포 명령을…….”

“고을 한복판을 살육장으로 만들 셈인가?”

“서둘러 대응하지 않을수록 우군의 피해만 커집니다!”

군관은 떨리는 시선으로 다가오는 사병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속으로 고뇌했다.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독단으로 방포를 명령해야 하나?

아니면, 저들이 지키고자 하는 유지들의 목을 모조리 쳐 기선제압에 들어가야 할까?

사병들의 얼굴이 지척에 다다른 순간.

군관이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영감!”

그 순간이었다.

몰려들던 사병들이 일순 전진을 멈추더니, 웅성거림과 함께 뒤에서부터 고개와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이야!”

사병과 구경꾼들이 다급히 떠들어대었으나, 그런 소란을 점차 압도해가는 악기 소리가 있었다.

“세악細樂…….”

군관에게는 익숙한 음악이었다.

산동 평정을 위해 창설된 신생 조선군의 진군가였으니까.

피리와 북 소리가 점차 다가오며 주변을 압도하는 가운데, 멀리서부터 저택의 지붕마다 원색의 갑주를 걸친 조선군이 올라왔다.

복잡하고 빽빽한 내주성 내부의 골목 하나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조선군은 진군가와 함께 치밀하게 조여왔고 새롭게 만들어진 포위망에 사병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죽기 싫어!”

“도망치지 마라! 맞서 싸워!”

“너나 싸워! 진광부도 못 이긴 놈들과 어떻게 싸우란 거야?!”

각 장원의 간부들이 언성을 높이고 무기를 휘두르며 독전하였으나, 그럴수록 사병들은 파리채에 쫓기는 날벌레처럼 더욱 필사적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무기가 내던져지고, 군중은 엎드리며 웅크리니, 빼곡하게 조여오는 조선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오직 몇 안 되는 유지들의 수족뿐.

그들을 앞둔 채 대오의 앞에 선 진평부사 김경여가 물었다.

“항전하겠는가? 원한다면 빠르게 끝내주겠다.”

조선군의 기세를 보아 절대로 공허한 협박이 아니었다.

수족으로서 그간 유지들과 생사를 함께 해왔다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유지들과 함께 죽어줄 수는 없는 법.

직전까지 침과 피를 튀겨가며 독전했던 유지의 수족들은 제각기 무기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김경여가 가볍게 박차를 가했고, 선두가 이동하자 진군가가 다시 울렸다.

그리고 진평부사와 내주부사가 만났다.

“조금 늦으셨소.”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봐드리는 겁니다.”

내주부사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실소를 머금자, 김경여가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 장원에 진입했던 조선군 군관이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바쳤다.

“배신자들의 명단이 쓰인 연판장입니다.”

내주부사는 연판장을 받아들곤 조소했다.

“웃기는 놈들이로군. 이렇게 친절히 잡아 죽일 것들의 명단을 만들어놓다니.”

내주부사는 군관에게 연판장을 돌려주며 덧붙였다.

“전부 잡아들여라. ……이 사람을 제하고는.”

내주부사의 눈길이 향한 곳은, 유일하게 결의 직후 동헌을 찾아와 배반을 고발한 유지였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숙였고, 연판장을 받든 군관은 절도 있게 끄덕인 뒤 물러났다.

“내주부사?”

“말씀하시오, 진평부사.”

“일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소?”

“들인 고생이 있는데, 조금만 더 머무르며 보람을 느끼지 않으시외까? 이 사람은 사병들 모인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연한데.”

불안하니 더 있다가 가라는 소리였다.

“같은 부사를 두 번 부린 대가는 기대하겠소이다.”

김경여가 웃었고, 내주부사도 쓰게 웃었다.

* * *

자칫 혈전으로 번질 수 있었던 내주부의 내부 정리는 완만하게 해결했다.

장원을 포위해 반역도당 대부분을 현장에서 잡아들였으며, 먼저 해산했던 일부는 혼란을 틈타 외부로 도망치고자 했으나, 성 외곽은 조선군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연판장에 자신의 이름을 친절히 기입한 이들은 오직 고발자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 붙잡히게 되었다.

남은 일은, 처결뿐.

“각 유지와의 관련자들도 모두 잡아들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판관의 물음에 내주부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붙잡은 유지들의 수도 적지 않은데, 그들과 가까웠던 자들까지 모두 잡아들이게 한다면 처벌의 수고로움과 반감이 배는 늘어날 거야.”

그들이 모의한 건 분명 배반이자 반역이었다. 충성을 약조했으니까.

마땅히 삼족을 멸할 일이나, 유지들이 회담을 가진 장소에서 충동적으로 모의하고 수결했으며 그러다 반나절이 안 되어 모두 잡혔음을 고려해주기로 했다.

물론, 이는 표면적인 이유로 실제 목적은 내주부사의 말대로 유지들을 최대한 적은 반감으로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우습게 되었군요. 겁먹고 부를 때는 언제고, 작당 모의하여 배반을 시도하다니 말입니다.”

판관의 소회에 내주부사가 답했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흔치 않은 일도 아니지.”

역사 속의 무수한 배반이 보통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성공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요, 그렇지 못한다면 사냥개가 주인을 삶아버릴 뿐이다.

“나는, 이제 배신자들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전하께 상주 드려야겠네.”

조선에서 사형의 인가는 오직 국왕만이 가진 권한이었다.

그러니 내주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되었으며, 어떻게 할지를 장계를 통해 왕에게 보고하고 문의해야 했다.

“판관께서는 내부에서 동요가 일지는 않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백성들을 다독여 여론을 진정시키시게.”

“알겠습니다.”

내주부사는 사태를 마무리 지은 뒤 진평부사와 술 한잔 걸칠 것을 내심 기약한 뒤, 문방사우를 펼쳐놓고 자못 장황해질 장계의 작성에 임했다.

* * *

내주에서 멀지 않은, 외부 어딘가에서.

수백 년 묵어 커다랗게 자란 나무 아래에 남루한 차림의 사내 몇이 볕을 피하고 있었다.

그들 이외에는 주변에 행인이 없었는데, 그것을 확인한 사내 하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이에 또 한 사내가 쓰게 침음했다.

“흐음.”

“아군을 세심하게 포섭하지 않고, 모든 유지를 모은 장소에서 공공연히 배반을 모의한 뒤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바보에 멍청이들 같으니! 그렇게 당당하게 반란을 모의한다면 나 같아도 발을 빼겠어.”

“어떻게 할까요.”

사내들이 시선을 교차했다.

“우리 존재가 알려지진 않았겠지?”

아무 행인이나 잡아 온 듯한 차림새와는 다르게, 막 밀어버린 것처럼 수염 한 가닥 없는 자였다.

“인지하지 못한 듯합니다.”

수염 없는 사내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듯하다’면, 기원과 다를 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주부의 긴밀한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내주부 곳곳에 실체가 의심스러운 눈치 빠르고 귀 밝은 자들이 있어, 이들이 섣부르게 모험했다간 제국의 남은 절반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었으니까.

* * *

내주부의 근황에 관심 가지는 무리는 하나가 더 있었다.

“조선군을 끌어들인 토착 유지들이 마음을 바꿔 칼을 거꾸로 잡았는데, 곧바로 발각되어 모조리 붙잡혔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신하의 보고에, 이곳저곳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은 이가 답했다.

“역시, 조선을 상대하는 건 상책이 아니겠어.”

“중원에서 물리쳐야 할 오랑캐는 조선만이 아니옵니다. 동쪽의 고토에서는, 벌판을 호령하던 사나운 오랑캐가 과욕을 드러냈다가 허무하게 죽었는데 후사를 이은 놈은 아직 이렇다 할 업적이 없지요.”

“놈들을 노리자, 이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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