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1화
불안한 얼굴로, 호격은 처소의 내부를 서성였다.
조선과 달리 금나라는 원정에 실패했다. 등래대원수 진광부와의 접전에서 금한 홍태주가 전사하고 군사도 상당수 상실해버렸으니까.
조선에 교두보와 해안만을 넘겨주고 중원의 내륙을 모두 제패한다는 휘황찬란한 계획은, 그렇게 좌절하고 몰락해버렸다.
오직, 자존심만을 원정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챙겼을 뿐.
등래대원수군을 격파하고 원수인 진광부의 수급을 참획해낸 덕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호격은 조선인들에게 치외법권과 면세 혜택을 명문화明文化해야 했다.
두 특혜는 이전에도 통용되어왔다.
다만 홍태주는 구두로만 약조했고, 굳이 문서로 남기지는 않았다.
자신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격은 진광부를 심문하고자 했던 조선의 의사에도 무단으로 그를 살해했으며, 원정에서 실패하여 물리적인 저항 수단도 상실해버렸고, 비록 표면상일지라도 금나라는 조선에 예속하여 즉위에 조선왕의 재가가 필요했다.
상황에 따라 철회하기 쉬웠던 구두의 약조를 금나라의 법령에 새기게 된 연유였다.
덕분에, 호격은 차질없이 차기 금한으로 즉위했으며 조선의 위세를 등에 업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중대한 특혜를 외부에 양보해준 만큼, 내부에서는 불신과 의심을 받고 있었다.
호격에게는 반전이 필요했다.
‘조선을 상대로 어떻게 해본다……?’
결과가 좋다면 입지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겠으나, 호격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최근 산동의 일은 그도 전해 들었다.
조선은 예나 지금이나 치밀하여 쉬이 당해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선대 한마저 대원의 옥새까지 내어주고 공존을 샀겠는가.
호격 자신이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선대에 떨어져 나간 압록강 변의 작은 무리들도…….’
괘씸하긴 하지만, 조선과의 완충지대라는 유일한 존재의의가 있는 족속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생명줄을 쥔 주인을 알아 절박하게 조선에 의지하고 굴종하므로, 이들을 무리하여 병합했다간 조선의 분노를 사게 될 터.
‘하지만 불령한 동쪽의 무리는 다르지.’
동쪽의 야인여진은 대청이 몰락하고 분열하는 과정에서 일찍 감지 이탈했다.
접경지대의 군소한 무리들과는 달리, 이들은 금나라나 조선 어디에도 표면적인 굴종조차 하지 않고 세태世態를 외면하고 있었다.
‘야만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짙기 때문이겠지.’
전성기의 대청과 같은 위력이 없는 한,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더욱 야만적인 이들 무리를 평정하고 계도한다는 건 꽤 까다로운 일.
하물며 그들 족속이 살아가는 땅에 무언가 대단한 이익이 잠재된 것도 아니었다.
미개발된 숲과 산에 과연 무수한 피땀을 흘릴 가치가 있을까?
군사적 성과를 거두어도 도리어 손해였다.
이는 금나라의 북쪽 변두리에서 완전히 야만인들로 퇴락해버린 몽골 부족들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결국 노릴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군…….’
선대 한이 평정하고자 꿈꾸었으나, 불운한 사고에 치졸한 술책이 겹쳐 원대한 야망은 좌초해버렸고 또다시 막연한 숙원이 되어버린 그 땅.
산해관 너머의 중원 말이다.
* * *
호격은 신하들을 불러 대금의 향방을 물었고, 그들은 호격의 제안을 긍정했다.
“과연 대금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중원을 평정하여 선한께서 못다 한 유지를 완수하고, 그 땅과 백성들을 지배해야 합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을 이룩하면, 지금의 일방적인 예속 관계도 해소할 수 있을 터.
이는 호격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금의 소생과 연명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에 다른 신하가 말했다.
“대금이 독자적으로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면 참으로 이롭겠으나, 안타깝게도 땅으로 중원으로 향하는 길은 야만인과 산해관으로 막혀 있으며, 또 바다로는 조선이 교두보를 독점하고 있사옵니다.”
“무리할 수 없다면 조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군.”
“송구하옵게도, 그렇사옵니다.”
원정의 실패로 군사력이 크게 축소한 금나라였다.
중원 평정 이전에 몽골 부족들을 복속시킨다거나, 선한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금성탕지의 철옹성을 공략한다는 건 무리보다는 무모에 가까웠다.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옵니다.”
“어째서 말인가? 기껏 나선들, 가만히 앉아 길만 빌려준 조선만 덕을 보게 되거늘.”
“선한께서는 이미 조선과 약조하여 중원을 평정하게 된다면 바다에서 100리까지의 땅을 내어주기로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내주도 포함되어 있었고, 실패한 원정의 결과로 덕을 본 건 오직 조선뿐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롭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예에. 이미 이러한 약조가 되어 있으므로, 대금이 중원으로 진출코자 한다면 조선도 내심 응원할 것이며, 이제 와 더 요구하는 바가 있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군.”
호격도 조선이 발해渤海를 저들만의 바다로 만들고자 했음은 알고 있었다.
발을 디디지도 못하며, 건질 것이라곤 오직 생선뿐인 바다에 집착하는 이유를 호격으로선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이 땅보다는 바다에 집착하며, 그 야욕이 여전하다면 호격과 대금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해변을 조금 내어주는 것만으로 중원 정벌에 조선의 협조를 구할 수 있으니까.
신하가 마저 조언했다.
“북직예는 대금의 중원 정벌에 발판이 될 곳이면서도, 요동과 연결되어 육로로 소통하기 편하고, 동시에 사람이 많고 번화해 정복했을 때 이익이 크며, 발해와 인접하여 조선도 관심이 많으니, 그들의 원조도 기대할 수 있사옵니다.”
조선의 도움을 얻어 산동을 통해 진출하게 된다면, 북진하여 이러한 이익을 꾀하자는 제안이었다.
“정론正論이다. 달리 의견 있는 사람 있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달리 북진 외에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서진하여 내륙만을 정복할 경우 본토와의 소통이 어렵고 조선 또한 취할 것이 없어 화를 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북직례는 정론. 이견이 나올 수가 없다.
“좋다. 최명길을 불러라. 그를 통해서 조선과 대금의 향방을 논해야겠다.”
* * *
한양에서.
“금나라의 한이 북직예를 함께 정토하자고 제안해 왔사옵니다.”
예조판서 남이공이 보고했고, 어전에 좌우로 시립한 신하들은 저마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가운데 좌의정 박홍구가 말했다.
“금나라는 지난 원정에서 선한과 군사를 잃었지만 정작 실효는 크게 거두지 못했사옵니다. 저들이 이 같은 제안을 한 건, 후계를 이은 호격 본인과 금나라의 위신을 회복하고 못 다한 이익을 달성하기 위함일 것이옵니다.”
이에 우의정 이상의가 우려했다.
“아조가 금나라의 무리한 야욕을 이용해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고, 더 많은 생명에게 선정을 펼친다면 이는 천하에 매우 이로운 일이겠으나, 당장 비사성이나 청주 모두 개화와 발전이 미진하고, 국내에서도 벌이는 사업이 많아 바쁜데 재차 원정에 가담하는 건 무리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의정은 각기 금나라의 저의와 조선의 현황을 뚜렷하게 분석했으나, 드러나는 분위기는 달랐다.
박홍구는 금나라가 야욕을 펼치고자 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투였고, 이상의는 당장 이렇게 바쁜데 무슨 일을 더 벌이겠냐는 투였다.
보통 두 의정의 이견이 판이하게 갈리면 영의정 이원익이 나서서 중재하곤 했다.
그러나 이원익은 근래에 머리를 많이 쓴 탓인지 급가給暇를 청하고 처소에서 요양하는 중.
덕분에 중신들의 이목은 곧장 용상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아조가 안팎으로 사정이 바쁜 건 맞지만, 금나라의 원정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저들은 속으로 반감을 품을 것이며, 혹 성취가 있다면 아조가 이익을 공유하기도 어렵겠지요.”
이에 박홍구가 즉각 찬동했다.
“금나라가 단독으로 북직예를 공략하지 않고 아조에 협력을 요청한 것은 저들이 산해관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선한이 아조와 맺은 옛 약조를 수용할 의사 또한 있기 때문이옵니다.”
바닷길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발해의 해안가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왕에게는 산동 진출에 이은 전략 목표, ‘마레 조선트룸’ 계획의 실현과도 직결된 문제.
이에 이상의가 반박했다.
“금나라는 지난 원정의 참패로 군사력이 급감했으며, 전쟁에 재능이 있던 선한도 사망하고 뚜렷한 공적이 없는 호격이 후계를 이었는데, 재차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다면 도리어 기세를 탄 순나라의 대병에 압도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주면 되지 않소?”
“고작 해변을 얻기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까지 해야겠습니까?”
“기여한 만큼 더 많은 땅을 요구하면 되고, 그건 금한도 거부할 명분이 없소이다!”
“이미 비사성과 청주의 경영만으로 아조는 벅찬 지경입니다! 막 편입한 내주부에서 반란을 진압한 것이 엊그제인데, 외지를 더 확장한다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조정의 정치세력이 정正당과 도道당으로 재편된 이래, 두 의정은 직접 정쟁에 개입하지는 않으면서도 암묵적으로 정正당을 긍정해왔다.
원숙한 재상과 당상들을 위주로 이루어진 정正당의 당색이 삼의정과도 공통분모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의정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사세를 관망해 오던 도道당의 젊은 관리들이 박홍구의 의견에 편승했다.
“아조에는 걸출한 인재가 많아 오직 등용만을 기다리는 재야가 끊임이 없는데, 어찌 새로 점령할 땅을 다스리는 것을 우려하며, 혼란한 천하에 고통받는 생령들의 고난과 염원을 외면한단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아조 대조선은, 대대로 중원을 지배해온 제국의 증거를 입수하였고 이는 천명天命과 다를 바 없는데, 이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과연 하늘이 좌시하겠습니까?”
“난립하는 도적과 군벌을 처단하고 고통받는 중원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게 아조의 사명이고, 그래야만이 오늘날의 성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당 당여들이 앞다투어 확장론을 펼치자, 재상에 당상들로서 세밀하고 냉엄한 현실을 의식하던 정당 당여들도 나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전은 시장통 한가운데처럼 시끄러워졌다.
이럴 때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매양 나서 중재하고 진정시켰으나, 당장 그는 부재중이었고, 왕조차도 나서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은 채 오가는 소란 속에서 의견과 근거들을 경청할 뿐.
여기에 대조선의 향방이 걸려 있었다.
* * *
조정에서 각축을 벌이기를 며칠째.
그동안 당상들은 목구멍이나 혹사하고자 언성을 높인 게 아니라는 듯, 격려했던 의론에도 진전이 있었고 조정의 의견은 점차 하나로 좁혀졌다.
-성공을 전제했을 경우 금나라의 원정 자체는 긍정한다. 하지만, 금나라가 원정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
신중론을 뒷받침하는 두 근거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이 이 이상 팽창할 경우 감당할 수 있겠냐는 우려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금나라가 원정에 실패할 경우 순나라가 원정을 도와준 조선에 부정적인 인상을 받은 채로 요동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전자는 극단적으로나마 해결책이 있었다.
조선이 양도받을 해변 지역의 인간들을 금나라의 영토로 모두 소개해 버리는 것.
아예 그들에게 순찰과 체포할 권한까지 제공하여, 조선은 점령지의 통제를 맡기고 금나라는 인력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상부상조의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나라가 유감을 가진 채 요동까지 진출한다면, 여기서 최후의 해결책이란 결국 물리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으로서는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
조정이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이러했다.
-금나라가 실제로 북직례를 정토할 수 있는지부터 검증해야 한다.
검증의 행위가 금나라나 금한으로서는 불쾌할 수 있겠으나, 이는 조선도 협력을 제공하기 위함.
조정에서는 예조를 통해 양해를 구한 뒤 금나라의 군사적 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이것이 원정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데 외에도 참고할 부분이 많음을 생각해본다면, 수용될 경우 여러모로 이익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어느 정도 진전된 상황에서 누구도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순나라에서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