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2화
“소관, 전견수田見秀가 조선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신이 한양을 방문했다.
자신을 순나라 황제의 특사로 소개한 전견수.
그는 조정 대신들에게 분명한 인상을 주었다.
의복은 대명의 양식으로 지극히 화려했으나 얼굴은 까무잡잡하게 탔고, 교양을 드러내고자 하나 깊이가 없었다.
마치 호박에 억지로 줄만 그려놓은 모양새.
‘영락없이, 출세한 반란군 간부의 몰골이로군.’
그런 감정이 담긴 회의적인 시선들이 전견수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전견수는 도리어 당당히 가슴을 내세우고서 말했다.
“대순大順은 중원의 환란을 평정하고 북경을 안방으로 삼아 천하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그런 나라의 사신을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마주하십니까?”
이래 보여도 명나라를 몰아낸 차기 제국이라는 항변 겸 위세였다.
대순의 실체가 폭도에 거지 떼에 불과할지라도, 그 수효가 수십만이 되어 무기를 들고 떼거리로 뭉쳐 다닌다면 조선이라도 마냥 괄시할 수준은 아닌바.
그 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전견수의 지적에, 좌의정 박홍구가 빤한 눈빛으로 맞섰다.
“사신으로서 방문했다는 자가 이국의 대신들 앞에서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하니, 우리가 진심으로 존중하기 어려운 것이요.”
똥을 피하는 이유는 무서워서가 아닌, 더러워서이기 때문.
대순이 중원의 핵심 지역을 장악했다곤 하나, 이제 창건하여 근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대뜸 보낸 사신이 당당히 무례하기까지 했다.
또한 조선이 중원과 동떨어진 동쪽 변방 반도에 자리 잡고 있다곤 하나 오늘날의 조선이 과연 과거의 조선과 같은가.
수백 년 단잠에서 일어나 사나운 오랑캐를 깨뜨리고 복속시키며, 대명에도 없는 전국옥새를 보유하고, 명나라 황제의 간청을 받아 중원으로 진출해 교두보까지 마련했다.
이제 중원을 막 차지했을 뿐인 폭도 무리에게 예의를 다해줄 입장이 아니었다.
괄시하는 시선에, 기고만장한 시선이 교차했다. 무거워지는 적막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전견수였다.
“폐하께서는 잔학한 오랑캐들에게 빼앗긴 요동 고토를 수복하고자 하십니다.”
“요동 고토라…….”
박홍구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폐하가 누구인지도 나로선 알지 못하겠지만, 그동안 요동을 점한 적 없는 순나라가 어찌하여 금나라의 땅을 고토라 칭한단 말인가?”
“순나라는 천명天命을 상실하고 퇴락한 명나라를 대체하는 제국이므로, 마땅히 대순 황제시야말로 천하의 유일하며 적법한 폐하시고, 명나라가 똑바로 다스리지 못하여 오랑캐들의 손에 넘어간 요동과 그 땅의 백성들은 본디 순나라의 것입니다.”
그 기고만장한 답변에, 어처구니를 상실한 어전의 중신들은 서로를 황당한 낯으로 돌아보았다.
그때 용상의 주인이 말했다.
“순나라의 뜻은 잘 알겠다. 그런데, 사신까지 보내어 요동을 평정할 뜻을 아조에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견수는 박홍구를 상대하느라 그쪽을 향했던 발끝을 고쳤다.
“폐하께서는 조선이, 요동을 무단으로 점령한 오랑캐 무리를 이미 무릎 꿇리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
“따지자면 오랑캐들은 이미 조선에 귀부한 족속들인데, 대순은 명나라가 상실한 천명을 이어받아 고토를 점거한 오랑캐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만큼, 먼저 못된 짐승들의 목줄을 쥔 조선에 양해를 구하려는 것입니다.”
“남의 집 짐승을 통보와 함께 함부로 도살함은 대순이 새롭게 내세운 법도인가?”
“비록 주인이 따로 있더라도, 마당에 쳐들어온 사나운 짐승을 쫓아내지 않을 순 없습니다.”
“아조가 도살을 허락한다면 대순의 보답은 무엇이오?”
“귀방에서 무단으로 점거한 산동의 땅을 인정하겠습니다.”
전견수의 대답에 중신들의 낯이 일그러졌다.
특히 박홍구나 이귀는 누군가 쥐고 찌그러뜨린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허리에 칼이라도 차고 있었다면 곧장 빼들고 달려들 기색이었다.
그때 왕이 답했다.
“귀국의 의사는 알았으니, 물러나도 좋소.”
“간단한 문제입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신중한 편이 더 좋겠지.”
전견수는 다소 내키지 못한 표정이 되었다. 황제국이 통보하였는데, 고민할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냐는 투였다.
“그편이, 사신에게도 이로울 것이오.”
왕이 지긋하게 바라보았고, 전견수는 마지못하여 답했다.
“……예.”
* * *
“참으로 오만방자한 놈이었습니다!”
박홍구가 성토했다.
본디, 조선의 조정에서는 금나라의 순나라 원정을 두고 왈가왈부를 나누던 참이었다.
그러니 순나라 사신이 저들을 살려달라 애걸하여도 모자를 판국이거늘,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사신은 대조선의 궁성 한복판에서 제국에 황제를 참칭했고 이미 복종한 금나라를 토벌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그 같은 놈을 사신이랍시고 보낸 것은, 필경 도적의 무리가 아조를 업신여기며, 나아가 도발할 용의까지 있기 때문 아니겠사옵니까?”
이제는 순나라를 순나라라 불러주지도 않는 박홍구였다.
금나라의 원정을 두고 조정이 한창 시끄러울 때 앞장서서 협력을 주장한 그다.
전견수의 무례는 주장에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너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맙시다.”
우의정 이상의였다.
“순나라의 사신이 지극히 무례했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과연 그들에게 학식과 예절이 있겠습니까?”
성난 농민 무리가 그저 다 죽어가는 명나라를 강 너머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한 것뿐이다.
저들 딴에는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국이니, 황제이니 염병을 떨어대곤 있으나 실속 없는 무리가 거창한 간판을 내세우는 건 역사를 통틀어 발에 챌 정도로 흔한 일.
“의도적으로 무례를 범하기 위해서라기보단, 그저 예법을 차린다는 게 불가능할 뿐이겠지요.”
“그게 무례라는 거외다! 덜떨어진 저능아 무리에서, 감히 예법도 갖추지 않은 채 대뜸 아조를 찾아와선 광대 짓이나 보이다니!”
박홍구는 분을 이기지 못해, 이것이 무례가 아니면 무엇이 무례겠냐며 성토했다.
“아예, 놈의 목을 베어버려야 하오!”
주먹을 움켜쥔 채 한술 더 뜨고 나선 건 병조참판 이귀였다.
“건방지게 사신을 사칭하는 광대의 목을 잘라, 놈들의 수괴에게 보내 대조선은 같잖은 능멸에는 응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하외다!”
이어진 이귀의 말에는, 박홍구조차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호전적인 태도에 압도되었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귀는 원래 이랬던 사람.
다만 조정의 분위기가 달라진 뒤로는 누구 목을 잘라버리겠단 소리를 할 일이 없었는데, 전견수의 놀라운 무례에 간만에 흥겹기까지 한 기색이었다.
“전하! 윤허만 해주신다면, 신이 직접 칼을 차고 찾아가 건방진 광대의 목을 베어버리겠사옵니다!”
이귀는 이미 칼을 쥐기라도 한 양, 움켜쥔 주먹으로 허공을 베었다.
“…….”
덕분에 조신朝臣들은 물론이고, 박홍구와 이상의마저도 난처한 얼굴로 용상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흥이 오른 이귀를 제압할 사람은 왕밖에 없으니.
용상에서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다면, 참판께 맡기지요.”
“전하!”
이상의가 즉각 경악하고 나섰다.
“아무리 저들 무리가 무례하다 한들, 일단 사신으로 표방하여 온 만큼 함부로 죽이는 건 지극히 지양해야 할 일이옵니다. 천하에 문명으로 강성한 나라라곤 아조밖에 없는데, 어찌 도적이 무례하였다고 같은 수준의 일을 벌이겠습니까?”
이에 이귀가 호통쳤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에겐 성현의 말씀도 귓전을 지나치는 바람 소리만 못한 법이요! 짐승을 다루는 방법은 오직 매밖에 없소!”
“참판은 자중하시게! 그대 한 사람의 경거輕擧를 위해 금자탑 같은 아조의 국격을 추락시켜야겠는가?!”
“나는 성현이 짐승과 소통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이귀에 이어 이상의도 간만에 언성을 높이고, 두 사람이 각자 상석과 하석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중신들은 놀란 표정으로 굳었고,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데 때마침 용상에서 일렀다.
“두 분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좌중에 휘몰아치던 긴장감의 흐름이 일순 뒤바뀌고.
“내가 참판께 드린 말씀은, 그럴 필요가 있다면 맡기겠다고 했지, 무작정 사신의 목을 베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왕이 덧붙인 말에 이상의가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여름도 막바지라며, 이상의가 이때다 하고 겹쳐 입은 초피 갖옷이 흘러내렸다.
“나도, 사신의 태도가 참으로 인상적이긴 합니다. 순나라가 근본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국의 대표로서 아조를 방문한 사람이 그걸 확인해줄 줄은 몰랐지요.”
어전의 몇몇 중신이 미소를 머금으며 긍정했다.
“그러나, 건방지다 하여 무작정 목을 잘라버리는 게 상책일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미 순나라를 위해 금나라의 사정을 알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예조에서는 이미 금나라의 의사를 물었고, 원정을 일으키길 원하는 그들은 마지 못해서겠으나 제안에 응했다.
또한 산동에도 실방사 일원들이 대거 파견되어 순나라의 내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양측의 전력이 객관적으로 파악된 뒤라면, 결정을 내리는 것도 한껏 쉬워지리라.
그 결정 중에는, 사신을 빙자하여 방문해 오만방자한 도발만을 거듭한 광대의 처형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예조판서?”
왕의 호명에 남이공이 한 발 나섰다.
“전하.”
“여전히, 백성들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데는 차질이 없겠지요?”
“그러하옵니다.”
남이공의 담담한 대답에, 왕이 만족스러우면서도 느긋한 태도로 답했다.
“좋습니다.”
* * *
변화한 역사가 또 한 번의 변주를 준비하는 동안.
한 척의 범선이 등불조차 걸어놓지 않은 채 어느 해안가에 이르렀고, 선원들은 쪽배를 타고 야음을 틈타 뭍으로 잠입했다.
바닷물을 줄줄 흘리며 나무와 잡목이 무성한 숲으로 파고든 선원들은, 숨겨진 의복들을 찾아 자연스럽게 환복했으며 일대에선 흔하디흔한 모습이 되어 소리소문없이 흩어졌다.
그중에는 옛 전장을 향한 무리도 있었다.
내주 근방에서 홍태주의 금군과 진광부의 등래대원수군이 최초로 격돌한 장소였다.
숲 사이로 펼쳐진 방대한 들판은 막 솟아오르는 여명을 받아 밝아져 왔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박힌 인골들은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무리의 선두는 반쯤 묻힌 두개골 앞에 이르러 손을 내렸다.
장갑 낀 손끝에 닿은 두개골이 버석하게 뭉개졌다.
“잘도 이런 데서 죽어버렸군. ……짜증 나게 말이야.”
권유를 받아 압록강을 넘어간 뒤, 그동안 자처한 모든 고생과 고통은 원수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홍태주는 저항 끝에 산화하는 대신 구차하게 연명하기를 선택했으며, 그러고도 뻔뻔하게 살아남는 대신 반란군과의 대면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이런 것보단 더 극적으로 죽어주길 바랐는데 말이지.”
한윤의 회한 섞인 혼잣말에 동행한 수하가 말했다.
“행수께서 거듭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강한 것 자체보다, 살아남는 게 더 강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내가 원수보단 더 강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한윤은 피식 실소했다. 수하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위로해 주려는 모습이 우스웠다.
“좌절한 게 아니다. 원수가 허무하게 죽었다니, 단지 들러보고 싶었을 뿐. 시대가 여전히 나를 부르는데 이곳에서 주저하기라도 하겠느냐?”
왕명이 있었다.
새로운 표적은 순나라였다.
그들은 근본이 없는 폭도 무리에 불과하였으니, 한윤은 오래전부터 충돌을 강하게 점쳐왔다. 예상이 실현된 것이다.
한윤은 손끝에 묻어난 하얀 가루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가자.”
순나라를 조사하는 것 외에도 일정은 많았다. 단지 내주를 가는 길이기에 들렀을 뿐.
내주에 수상한 일이 있었고, 수상한 정황도 있었다.
배후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진 않았으나 기왕이면 증언이라도 받아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