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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73화 (273/380)

인조, 명군이 되다 273화

내주를 방문한 손님들이 있었다.

근래의 내주는 오가는 사람이 많아 그들의 흔한 차림과 흔한 생김새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한 아전과 함께 동헌을 당당히 방문하기 전까지는.

“예조의 정랑입니다.”

실방사의 일원이기도 한 아전의 소개에 내주부사는 놀란 얼굴로 손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뇌리에 남길 거리를 찾아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정랑은 손님은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고서 말했다.

“소관의 안면을 익혀두는 게 정녕 부사께 이롭겠습니까?”

“……크흠!”

내주부사는 헛기침과 함께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예조의 정랑이란, 사실이기도 하지만 최대한 에둘러 말한 것이기도 했다. 매일 바쁜 육조의 실무진이 왜 산동에 있을까.

정체를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실방사의 일원임을 알지도 못했던 아전과 동행하고서 말이다.

실방사가 혹 부사 자신에게 적의를 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당했으리라. 그것이 가능한 집단의 수장에게 과도한 호기심을 가져 이로울 건 없었다.

내주부사는 고개를 돌린 채 이따금 흘낏거리며 물었다.

“정랑께선 내주에 어인 일로 직접 행차까지 하신 게요?”

“반란 모의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 사람이 이미 마무리를 지었고, 또 꽤 지난 일이오만……?”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순나라의 정탐이라는 주된 목적이 따로 있었지만, 아직은 부사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으음…….”

내주부사는 침음과 함께 아전에게 턱짓했다.

“정랑이 조사를 원한다니, 자네가 도와주시게.”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아전은 정랑에게 발끝을 돌리고서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 * *

내주의 교외.

인적 드문 어딘가.

아전은 연신 주변을 의식하며 내주의 교외, 인적 드문 곳을 헤치며 산기슭으로 나아갔다.

그의 안내를 받아 동행한 한윤은 마침내 한 동굴 앞에 섰다.

입구는 두꺼운 나무문과 함께 쇠사슬 및 자물쇠로 봉인되어, 얼핏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이건 무언가?”

“지난 모반 사건의 주범 중 하나를 구속해둔 곳입니다. 행수께서 접하신 정보의 원천이지요.”

“죽이진 않았군.”

“그건 행수의 의사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아전이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잘그락대기를 잠깐, 하나를 집어 자물쇠에 넣어 돌리자 덜컹, 하는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봉인이 풀렸다.

이어서 문손잡이를 묶어놓은 쇠사슬까지 풀어내고 정문을 밀어내니, 차가운 바람과 함께 퀴퀴한 악취가 물씬 풍겨왔다.

“좋은 대접은 해주지 않는군.”

“역적입니다. 좋게 대접해줄 이유가 없지요.”

개문과 함께 동굴의 안쪽까지 볕이 비치면서, 한윤의 눈에는 앙상한 몰골을 한 채 웅크린 사내를 마주했다.

반란 모의를 주도했으며, 그것이 이루어진 장소의 주인이기도 한 주朱 진사였다.

한윤은 능숙한 한어로 말했다.

“진사까지 된 좋은 머리로 한다는 게 반역 모의라니 놀랍군. 그래도, 그 정도 머리라면 아직 자신이 죽지 않은 이유쯤은 알겠지.”

웅크린 사내의 눈 한 쌍이 물기로 번들거렸다.

한윤이 마저 일렀다.

“나는 공사가 다망한 사람이라 여길 두 번은 방문하지 않을 생각인데, 내게 구걸할 게 있다면 최대한 성의를 보이시게.”

* * *

그로부터 며칠 뒤.

한양.

“전하.”

예조판서 남이공이 편전을 방문했다.

보통, 대신이라면 조회 외에도 왕과 대면할 일이 많으나 남이공은 독대를 요청했다.

사소한 용무는 아니라는 뜻.

왕은 기꺼이 응했고, 남이공은 용상의 맞은편에서 방석을 권해 받고 착석했다.

“예판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중대한 보고사항이 있사옵니다.”

남이공은 품에서 봉인된 권자를 꺼낸 뒤, 꿇은 무릎을 교차해 서안까지 나아가 바쳤다.

왕은 그것을 받아들곤 봉인을 풀어 장계를 펼쳤다.

“……이건 오래간만이군요.”

과거 남이공이 북경에서 활동할 때나, 한윤이 올린 기밀을 직접 전해받을 때 사용한 양식의 암호문이었다.

남이공은 한참 전에 복귀하여 예조판서를 맡게 되고, 한윤과 조선유상 역시 예조판서가 전담하게 되며 좀처럼 볼 일이 없었는데 다시 등장한 것이다.

“너무 오래간만이라 읽기 어려우시다면 신이 대신 읽어드리겠사옵니다.”

“아닙니다. 어디, 내 머리가 아직은 쓸만한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해당 암호문의 양식은 천자문을 이용한 것으로, 100x100으로 배열한 천자문에서 정해진 숫자만큼 좌우와 위아래로 움직여 해당하는 글자를 대신 기입했다.

원문이 천天이라는 글자일 때,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하는 게 원칙이라면 지地라고 쓰는 셈.

여기에 아래쪽으로도 한 칸 움직인다면 102번째 글자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수월한 해독을 위해서는 머릿속에 천자문을 100x100으로 배열하여 띄워놓아야 했다. 왕으로서는 실로 오래간만인 해독이었다.

“……흐음.”

왕의 침음이 길어지자 남이공은 슬쩍 고개를 들어 왕의 시선을 확인했다.

혹여, 자신하는 것과 달리 해독을 어려워한다면 자신이 억지를 부려서라도 나서는 게 맞았으니까.

그래서 남이공이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한참 고민하는데 왕이 입을 열었다.

“이건 꽤 놀랍군요.”

왕은 암호문을 서안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정녕 내주에서 발생한 반란이 동창東廠과 관련되어 있다면, 금나라나 순나라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골칫거리가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우리가 남경에 조선유상의 지부를 심은 것의 보복일까요?”

“실제로 동창이 벌인 일이라면, 보복이라기보단 위협에 대한 견제가 아닐까 사료하옵니다.”

조선의 성장세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이제는 중원에 발판까지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금나라의 군사들까지 끌어들였으니, 장강 이남으로 쫓겨난 명나라로선 자신의 수도에 조선유상 지부까지 박히는 걸 보고서 두려워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에 대한 견제로서 조선의 영향력을 산동에서 축소하고자 반란을 사주했다는 추측이다.

“적의라기보단,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한 격이라는 말이로군요.”

“당장 명나라가 처한 상황을 상고해볼 때, 아조와 정면으로 맞설 의사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사옵니다.”

왕은 남이공이 조용히 찾아와 암호문을 전달한 이유를 깨달았다.

남명까지 조선의 잠재적인 위협이라는 점이 알려지면 조정에서는 또 한 번 파란이 불 터.

호전적인 인사들이라면 배은망덕하고 괘씸한 명나라를 징벌해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고도 남았다.

“당장은 금나라의 원정과 순나라 사신의 처우를 두고 왈가왈부가 많은 시점입니다. 과도한 소란은 이로울 게 없지요.”

“그러하옵니다.”

왕은 암호문을 말아 끈으로 다시 봉인한 다음 남이공에게 건넸다.

“그래도 괘씸하군요. 예의주시해야겠습니다.”

남이공이 암호문을 받들며 고개 숙였다.

* * *

산동 원정이 종결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또다시 전쟁에 관여하는 건 부정하지 못할 중대사였고, 조선은 외교자산과 첩보자산을 총동원해 금나라와 순나라의 전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오래지 않아 각국에 관해 책이 한 권씩 만들어졌다.

금나라 쪽이 더 개방적이고 공개된 방식으로 진행된 만큼 자료는 더 구체적이고 많았다.

반대로 순나라의 경우에는 오로지 첩보에 의존한 만큼 자료가 대개 피상적이고 분량도 적었다.

“조선이 무력만 아니라 눈과 귀에도 이만한 저력이 있을 줄은, 나조차도 처음 알았습니다.”

왕은 탐독하던 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예조판서가 고생이 많았어요.”

“아니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남이공의 겸양에 왕은 작게 웃어주고는 서안에 놓인 책을 짚었다.

“자료는 객관적이지만, 이것으로 내리게 될 판단은 주관적입니다. 정답을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예요.”

“하오나…….”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물론, 염두에 둔 생각은 있지만 내가 왕이라고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지요.”

“하오시면?”

남이공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의정부 정본당政本堂에서 삼의정. 협선당協宣堂에서 좌우 찬성과 참찬을. 석화당石?堂에서 중추부와 육조 재상을 불러모아 이것과 똑같은 자료 나눠주고, 그들의 의견부터 들어본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재상들의 의견도 반영하겠다는 건 신하로서 마다할 일이 아니었지만, 각국의 전력을 조사한 결과물은 극비였다.

예조에서는 당상을 포함해 과반이 존재조차 모르는 책인 것이다.

하지만 당상들에게 모두 나눠주어야 한다면 그만큼 복사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여간 곤란한 주문이 아니었다.

‘서리書吏들도 학을 떼는 게 복사인데 판서 직책 달고 직접 복사하게 생겼네……. 김신국이한테도 밥 한 번 사줘야 하나?’

남이공이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동안, 용상에서 말했다.

“어렵겠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남이공은 일단 상념을 접어두고서 황급히 부인했다.

“전혀 어렵지 않사옵니다.”

“…그래요?”

“예!”

김신국과는 물론, 여느 재상들과 마찬가지로 의정의 자리를 다투는 남이공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고생이, 비원을 실현하기 위해서인데 고작 책 몇 권 복사하지 못해 마지막에 재를 뿌릴쏘냐.

때마침 영의정 이원익이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풍문이 한양에 자자했다.

급가를 연이어 청하면서 질환을 이유로 사직소도 냈고, 아들인 이의전李儀傳은 아예 부친 병구완을 위해 직을 내려놓았기 때문.

이러다가 영의정이 은퇴하면 의정에 자리 하나가 비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자리에는 재상 중 하나가 들어간다.’

그리고, 중추부나 의정부에서 삼의정을 제한 재상들은 거의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중추부야 아예 반쯤 기로소나 다름없고, 의정부에서도 삼의정을 제한 좌우 찬성과 참판은 우대직에 가까운지라 실적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렇다면, 빈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육조의 재상 중 누군가가 들어가지 않을까?

기왕이면 그 ‘누군가’가 자신이어야 했다.

막연한 기대는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가장 고생하고 공적도 많은 사람을 꼽자면 지난 원정에서 병무兵務를 전담한 병조판서나, 외교와 함께 첩보를 도맡아온 자신, 그리고 그 모든 게 가능하게 한 호조판서 이렇게 셋 정도일까.

그런데 현 병조판서 김세렴은 비교적 최근에 판서가 된 신참이다.

오늘날 그가 세울 수 있었던 공적의 적잖은 토대는 전임 병조판서인 이광정에게 있었다.

부정하지 못할 이러한 사실이 인사에 잘 반영된다면, 기실 의정 후보라곤 자신과 김신국뿐.

그런데 김신국은 환국 때 끈 떨어진 연, 꼴에 친우랍시고 재능이 아깝다, 어떻게 재활용할 수 없을까 구상해주었더니 의정 자리를 두고 경쟁하려 드는 아주 못된 놈이었다.

‘뒤통수나 치는 놈에게 의정 자리를 내어줄 순 없는 법…….’

김신국 같은 배은망덕한 인간이 의정에 오른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까?

대조선의 국익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의정 공석에는 자신이 올라가야 했다.

남이공은 늙은 손목이 아릴 때까지 필사筆寫할 각오를 되새기며 예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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