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4화
며칠 뒤.
“아으…….”
의정부 석화당石?堂.
중추부와 육조의 재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이공은 신음과 함께 손목을 주물렀다.
기밀을 다룰 사람이 부족했던지라 예상한 대로 남이공마저 직접 나서야만 했고, 한 손 보탰지만 그래도 인원이 적어 여러 사람이 고생했다.
그 광경에 병조판서 김신국이 턱을 치켜들고서 말했다.
“어이, 남 판서!”
시건방진 부름에 남이공이 반쯤 고개를 들고서 날 선 시선을 주자, 김신국은 도리어 태평하게 의자에 늘어져서는 물었다.
“늙은이 손목이 슬슬 맛이 가려는 모양인데, 오늘은 좀 쉬지 그러나?”
“너는…….”
남이공은 욱하며 터지려는 욕설을 애써 삼키고는, 조금 순화해서 말했다.
“너는 경회지가 아니라 인당수에 빠져서 뒤졌어야 돼!”
“…어라? 남 판서! 중추부 원로들과 다른 육경六卿까지 모신 자리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만!”
김신국이 괜히 주변을 돌아보며 강조하자 몇몇 사람이 헛기침과 함께 멋쩍게 웃었고, 남이공은 늙은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중추부 원로들과 다른 육경까지 모신 자리에서 개처럼 맞아볼 텐가?”
호전적인 반응에 영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가 쓰게 웃었다.
“두 판서분 사이가 각별하다는 건 이 사람도 알고 있지만, 이 중대한 자리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소이다.”
그러자 김신국은 곧장 이정구에게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감. 예조판서가 원래 이렇게 실이 없는 사람인지라…….”
이에 남이공이 끼어들어 호소했다.
“영사 대감, 이래도 과연 제가 저놈과 각별한 사이로 보이십니까?”
“허허허…….”
“필사를 도와달라니 제 일 바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사정 다 알면서 손목 주무르는 걸 보곤, 가서 쉬라? 이게 사람이 할 말입니까?!”
차기 의정을 두고 다투는 사이다.
이런 중대한 자리에서 빠지라는 건, 의정은 내가 해먹겠으니 얌전히 물러나라는 뜻과 같았다.
“허어, 참. 호판이 안 바쁜 자리가 아닌데…….”
“나는 노냐?!”
김신국의 도발에 남이공이 끝내 욱해 폭발하자, 이정구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허. 이보시게들.”
다소 엄한 기색의 중재에, 김신국은 재차 허리를 숙였고 남이공도 한숨을 토하며 진정했다.
바깥에서는 소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는지 때마침 의정부의 말석 사록司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록은 의정부 당하관 사인舍人을 정오품 검상檢詳과 함께 보조하며 하늘 같은 재상들을 보필하는 자리.
품계는 고작 정팔품에 그쳐, 중추부의 재상들과 저마다의 분야에서 실무를 총괄하는 육경의 존재는 또 하나의 하늘과 같았다.
“이, 입장해도 되겠사옵니까?”
당연히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배석한 재상 중 단 한 사람의 눈에만 나더라도 정팔품인 사록은 관직 생활이 오늘로 끝일 수 있었으니까.
“들게.”
“……예에.”
이정구의 허락에 사록은 벌벌 떨면서 자리마다 각기 다른 두 권의 책을 내려놓았고, 남이공은 사록이 자신의 자리에 책을 놓자 물었다.
“안은 보지 않았겠지?”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보지 않았사옵니다!”
“그래…… 그러면 됐네.”
의정부의 관리라고는 해도, 정팔품에 불과한 사록에게 각국의 전력을 조사한 책들은 접근 불가한 기밀.
운반조차 과분한 처사인 게 당연한데, 남이공의 맞은편에서는 김신국이 ‘저거 아주 지랄을 한다!’라는 말을 무언으로 내뱉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남이공은 책을 던져 모서리로 김신국의 면상을 쪼개버리고 싶었으나, 그간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이게 다 김신국의 간악한 술책이었다.
격무로 지친 자신을 살살 긁어 다른 재상들 앞에서 못난 모습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쟁자의 평판을 추락시키고 자신은 의정에 오를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는가?
‘수준에 맞는 술책이다, 배은망덕한 자식아!’
남이공은 아들 부부를 불러다 며느리를 괴롭히고픈 충동이 들었다.
꼴에 유서 깊은 악우라고 사돈지간이기도 한 탓.
하지만, 며늘아가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그저 애비가 못났을 뿐이다.
“크흠!”
남이공의 거친 헛기침에 사록은 벌벌 떨면서 마저 책을 배부했고, 마침내 손이 비자 도망치듯 문간을 넘어가 꾸벅 허리 숙이곤 물러났다.
이러한 석화당 근처에서, 같은 의정부의 청사인 정본당政本堂과 협선당協宣堂에서도 각기 삼의정과 좌우 찬성 참판을 두고 책의 배부가 이뤄졌다.
협선당에서는 곧장 책을 펼쳤지만, 삼의정이 배석한 정본당에서는 사담이 조금 더 이어졌다.
“영상,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좌의정 박홍구였다.
그 물음에, 근처에 앉은 영의정 이원익이 표지를 넘기려다 말고 책 사이 손가락만 넣은 채 답했다.
“이 사람이 골골대던 와중이라지만, 책 좀 보고 몇 마디 한다고 죽지는 않소이다. 안 그래도 그러다가 왔던 참이외다.”
이원익이 실소했고, 박홍구가 침음했다.
“뭐, 거……. 말씀을 하셔도 괜히 그런 식으로.”
“무안하시면 이것부터 봅시다.”
이원익이 슬쩍 표지를 넘겼고, 박홍구와 이상의도 이내 시선을 내렸다.
* * *
의정부 설립 이래 가장 논의가 뜨거운 날이었다.
정본당과 협선당, 석화당 네 청사에서 모두 재상들의 언성이 교차했고 설전이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태양은 순식간에 서산을 넘어, 어둑해가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밤은 찾아왔고 촛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다.
정본당을 방문한 사인舍人 여이징이 불씨를 들고 초에 다가가자 박홍구가 어둠 속에서 손을 들었다.
“……됐네.”
힘에 부치고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종일 난상토론을 이어갔으니 아무리 조심하여도 목이 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초를 붙인다고 더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홍구는 만류로 족하고, 그 뜻을 모두가 이해했으리라 믿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다른 두 의정 이원익과 이상의 모두 공감했는지 말없이 함께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박홍구가 쉰 목소리로 덧붙였다.
“해산합시다.”
그 짧은 한마디조차 벅찼는지, 박홍구는 거칠게 헛기침했고 세 의정은 비틀거리며 정본당을 빠져나갔다.
의정부의 뜰에는 달빛과 함께 싸늘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다른 두 청사인 협선당과 석화당은 불이 켜진 채였으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박홍구는 뒤따라 온 여이징에게 두 청사를 가리키곤 손을 흔들었다. 날이 늦었으니 다른 곳의 노친네들도 해산시키라는 지시였다.
“알겠습니다.”
여이징은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고, 삼의정은 비척거리며 각자의 처소로 향했다.
* * *
다음 날 조회가 열렸지만, 개시와 함께 곧바로 파했다.
재상들이 모두 혼미한 상태였고 억지로 입을 열 때마다 쉬어 갈라지는 목소리만 나왔으며, 곧이어 거칠게 기침하거나 다 죽어가는 것처럼 헐떡댔으니까.
이런 상태에서 억지로 조회를 이어간들 각 관청의 책임자들이 죄 흐어어어, 하며 서로 알아듣지도 못할 언성으로 속삭이는 게 전부일 터.
정상적인 논의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왕은 곧바로 조회를 해산했고, 역사상 가장 짧은 조회가 기록됐다.
“예기치 않게 노인학대가 되어버렸군.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왕은 정전正殿에서 나와 볕에 이르러 말했다.
“재상들이 해줄 일이 많은데 이런 상태로 정상적인 공무가 될지 모르겠군.”
전쟁의 개입 외에도 조선은 바쁜 나라였다.
현재 진행형인 선혜법과 호패법의 확산.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앙법과 화폐의 도입.
비사성과 청주의 개발.
하나하나가 평시에도 제대로 소화해 내기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과제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전쟁 개입까지 고려한다는 건 만용일까, 아니면 조선의 역량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일까.
그것을 왕 본인조차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었기에 독단으로 결정하지 못했다.
재상들은 자신보다 이전부터 오래 나라를 다스려왔고, 각 실무를 전담해온 만큼 내밀한 사정도 알고 있을 터.
그래서 공론을 취합하고자 자리를 만들었는데 결과는 도리어 노인학대의 장이었다는 게 조금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재상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히 갈린다는 뜻이겠지.’
객관적인 자료가 확보되고도 이렇게 의견이 갈린 건, 그만큼 양측의 전력이 크게 치우치는 곳 없이 애매하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수치는 분명 순나라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는 숫자만 많은 도적 떼에 가까웠다. 공성을 앞두고 북경에 진주했던 순나라의 군대 중 과반이 실제 전투원의 가족이었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불가능한 모습.
차라리 걸인과 유민의 무리가 약탈하고 다니는 양상이 이례적으로 확대된 것과 다를 바 없다.
반대로 금나라는 최소한 국가의 체제는 갖추었고 오랜 분쟁 기간 군대의 절대적인 규모는 축소하였으나 살아남은 이들은 분명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리고 이들의 정예는 오합지졸을 깨부수는 데 매우 능했다.
양국이 모두 중요한 부분에서 우열을 하나씩 점하여, 절대적인 우위를 분간할 수 없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신하들의 의견이 갈린 건 이러한 애매함에서 나오는 위험성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자들이 있고, 이런 애매함에서 조선이 무게추로 작용하여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각 측은 주안점이 다르니, 타협도 쉽지 않으므로 난상토론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정은 내가 하는 꼴인가.’
그러지 않고자 준비한 자료였고, 마련한 자리였지만, 신하들이 목이 쉰 채로 헐떡대기만 해서야 다른 수가 없었다.
‘생각해 둔 것이 있긴 하지만…….’
* * *
“결단을 내리는 게 쉽지가 않구나.”
왕의 하교에, 맞은편에 앉은 이가 물었다.
“어찌하여 소자에게 그 같은 말씀을 하시옵니까.”
“나의 뒤를 이어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사람은 세자이니, 세자의 의향도 들어보아야지 않겠느냐?”
“소자는 아바마마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세자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로서는, 부왕의 뒤를 쫓아가는 것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시강侍講에서 매번 나오는 말이 전례 없는 조선의 융성이었다.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이래 수백 년간 오늘날 같은 영화는 없었다는 말을, 주제마다 표현만 달라지고 같은 내용으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것이다.
역사를 배운 세자 또한, 최대한 사심을 제하고 보아도 시강관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므로, 부정은커녕 나올 이견조차 없었다. 마음에 새기는 것 외에 달리 무엇하랴.
“내가 죽은 다음에도 그리할 참이냐?”
“……아바마마.”
세자는 당황한 낯으로 부왕을 불렀지만, 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 만들겠다는 각오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이번에 들어온 자료를 다 검토하고 내린 결론이야.”
“하오시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면 금나라는 북직례로 진출한다. 중원으로 나아가는 길이 뻥 뚫리는 셈이지. 아조는 발해만을 얻게 되겠지만, 호격이 생각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짐승을 다루는 게 어려워질 거다.”
세자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동안 왕이 재차 말했다.
“내가 그동안 바라온 구도가 그것이긴 하다. 장강의 이북은 금나라가 차지하고, 장강의 이남은 명나라가 차지하는 것……. 원래는 그랬지.”
원래는, 청나라와 남명이 중원을 반분한 상황에서 조선이 양강의 분쟁으로 발생하는 이익을 독점하는 양상을 그렸다.
“내가 즉위하고서 영의정 불러 가장 먼저 한 이야기가 그것이기도 했는데.”
왕은 쓰게 웃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구나.”
조선이 강성함을 감당하지 못해, 반도를 빠져나와 바다 건너까지 영토를 확장할 정도니까.
“나로서도 결정이 쉽지 않다. 신하들 역시 한쪽으로 기울지 못하고 분분히 의견만 나누는 중이지. 금나라의 중원 진출을 용인하고 발해만을 획득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의 혼란한 구도를 유지하는 게 나을까.”
어느 쪽이건 처음에 구상했던 그림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서 더 혼란했다.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그릇이 필요해. 세자의 구상은 무엇이냐? 세자는 어떠한 모습의 조선을 다스리길 원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