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5화
“삼의정 중 과반이 개입에 찬성하고,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이 찬동하며, 중추부와 육조의 판서 중 과반이 지지했고, 결정적으로 세자가 바라니, 이에 따라서 아조는 금나라를 도와 순나라를 치고, 발해를 우리의 바다로 삼아 조상의 옛 이름을 영화롭게 하겠다. 군신君臣의 공의가 이러하니 백관百官은 받들라.”
* * *
경기감영.
“됐쓰……! 됐쓰, 됐쓰, 됐쓰……!”
전언을 받은 경기감사는 주먹을 쥔 채로 연신 중얼거렸다.
막 그에게 소식을 전한 이는 한양 사는 친척 소유의 노복이었다.
감사는 친척에게 조정의 동향을 주시해달라고 부탁하고, 변동이 있으면 알려달라 요청했는데 때마침 노복이 와 조선이 금나라 원정에 개입한다는 소식을 알린 것이다.
경기감사에게는 기사회생할 기회였다.
이앙법의 도입으로 폭증한 양곡의 소출은 분명 이로운 일이었으나, 제한된 노동력으로는 탈곡과 도정이 제때 완수되기 어려워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경기감사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조정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자신의 역량이 의심받게 되었다고 전전긍긍해왔다.
그러다 이원익이 발명한 족답식 탈곡기를 양산하는 임무를 맡았고, 장인들에게 많이 양보하여 어떻게든 완수해냈으며, 제때 각 고을에 배분하고 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고도 불안하던 참이었는데…….
‘전쟁이 터지면 가장 필요한 게 군량이다. 해도의 소출이 아주 압도적이니까, 이건 무조건 공적이 된다.’
나아가 탈곡기 대여로 각 관청에서는 상당한 수입까지 올리고 있었다.
일손을 더 쓰는 비용보다, 기계를 빌려 돌리는 게 훨씬 싸고 빠르기까지 하니 삯을 제법 세게 불러도 대여를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일석이조다, 일석이조. 이제는 세곡만 잘 받으면 된다. 안 그래도 인부들 시켜서 창고는 미리 지어놨지…….’
경기감사는 죽다가 살아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별 게 있으랴. 추락할 때도 있고 비상할 때도 있는 법 아닌가. 한동안 가슴 졸여왔으니 이제는 비상할 때였다.
* * *
끝내 왕명이 내려지자 지지부진했던 전쟁 개입이 순식간에 진전했다.
병조에서는 미리 준비해 둔 병적兵籍을 활용해 옛 정예들을 다시 소집했고, 호조에서는 지방의 각 관창에 비축해둔 세곡을 일시에 한양으로 불러모았으며, 예조에서는 금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뜻을 전달하는 한편 실방사를 시켜 예상되는 전장의 일대를 밝혔다.
“다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았어도 어찌 될 줄은 알았다는 거겠지!”
좌의정 박홍구가 무더기로 올라온 수본手本 앞에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반대편에서, 신중론을 고수해온 이상의가 쓰게 침음했다.
“군신君臣의 공의가 이러한 데 따라야지요.”
“이 사람이 언제, 따르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의상의는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영의정 이원익이 자리해 있었다.
“영의정께서는 분명 전쟁에 회의적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삼의정 과반이 찬성했다고 하셨는가.
전하께서는 빈말을 입에 담으실 분이 아니고, 본인은 반대하는 의사를 거둔 적이 없으니, 달라질 게 있다면 오직 이원익뿐이었다.
이러한 의문에 이원익이 답했다.
“며칠 전 간밤에 저하께서 들르셨소이다.”
“……저하께서요?”
이상의가 깜짝 놀랐고, 박홍구도 일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하께서 노관에게 지혜를 물어보시기에 내가 있는 대로 짜내어 답을 드렸는데, 그리 말씀을 드리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 데가 있어 전하께 상주 드렸소이다.”
“저하께서 무슨 지혜를 물어보셨기에 말입니까?”
“하하…….”
이상의의 물음에 이원익이 멋쩍게 웃었다.
“전하와 저하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거론하여도 될는지…….”
“아니, 영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눈치 없는 사람 되는 거지, 뭐…….”
박홍구가 웃으며 작게 말하자, 이상의는 빤하게 쳐다보고는 재차 이원익을 바라보았다.
지난 자리에서는 전쟁 자체를 마다하였던 이원익이다.
그러한 이상의의 의문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을까. 이원익이 담담하게 일렀다.
“전하께서는 저하가 원하는 나라를 물려주고 싶었고, 저하는 전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물려받고 싶었다. 그 정도는 말씀드려도 되지 싶습니다.”
나름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다른 두 의정에게는 충분히 직설적으로 들렸다.
“으음…….”
“일합시다.”
“그러지요.”
박홍구와 이상의 사이에서 몇 번 잡담이 오갔고, 두 사람은 다시 각 관청에서 실시간으로 몰려드는 장계들을 상대했다.
그날 오후.
준전시로 접어든 조선이었기에, 의정부에는 간만에 재상급 당직이 남았다.
삼의정은 아니었다.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정점들이자 각자 도맡은 육조가 있는 만큼, 다른 기관들의 업무 시간에는 심신이 멀쩡해야 했으니까.
퇴청 시각이 되자 삼의정은 각자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곧바로 뜰을 가로질러 육조거리로 나섰다.
“이 사람은 이만 들어가겠소이다. 두 분께서도, 살펴 들어가시오.”
이원익의 인사에 박홍구와 의상의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살펴 들어가겠습니다. 영상께서도 살펴 들어가십시오.”
“푹 쉬시고요.”
“맞습니다. 요즘 같은 때 영상께서 쓰러지면 나라에 재앙입니다, 재앙.”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걱정하자 이원익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주 정화수도 떠놓고 발원하지 그러시오? 아무튼, 말씀은 고맙소이다. 내일 봅시다.”
“예에.”
“예.”
삼의정이 각자의 처소로 향해 해산했다.
박홍구와 이상의는 역시나 북촌으로 향했고, 여전히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소박한 처소를 고수하는 이원익은 동쪽 천달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원익이 미리 마중 나온 노복과 대동하여 비척비척 퇴근하는데,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예판 대감?”
남이공이었다.
“영의정 대감…….”
남이공은 멋쩍게 웃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직접 보시지요.”
남이공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고, 단순해 보이는 목함 안에는 켜켜이 쌓아놓은 이끼 위로 굵직한 뿌리가 놓여 있었다.
그 광경에 이원익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도라지를 이렇게 잘 포장해 두지는 않으셨을 테고.”
“삼입니다.”
“허어.”
“근래 영의정 대감께서 기체氣體 강녕치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국가가 중대사를 맞아 쉬지 못하시고 격무에 시달리시니, 염려하는 마음이 케 이렇게 약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이원익이 웃기만 하자, 남이공은 이원익의 곁에서 주저하는 노복에게 상자를 떠넘기고는 물었다.
“혹시, 근래에는 기체가 많이 호전되셨는…… 지?”
어색한 물음에 이원익이 웃으며 답했다.
“내, 예조판서께서 보이신 염려를 의식해서라도 반드시.”
이원익은 말을 이어가다 말고, 가늘고 쪼그라든 손을 들어 상자에 올려놓고서 덧붙였다.
“이거 잘 달여 먹고 쾌차하여 걱정을 덜어드려야겠습니다.”
“……아유, 예. 모쪼록 강녕하셔야지요. 대감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 나라에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감사합니다.”
“아유! 아닙니다. 살펴 가시옵소서! 실례했습니다.”
“예, 예판께서도 살펴 가십시오.”
이원익은 연신 고개 숙이는 남이공에게서 먼저 발을 돌리고는,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은데 느낌이 다르다’ 하고 중얼거리고는 나아갔다.
그 모습에 남이공은 푸후, 쓰게 날숨을 토해내고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 * *
비사성, 여문.
한 사내가 말 안장 위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채.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용단을 내리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시기에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가 고민이 많았는데.”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 때문인지 이제는 알겠소!”
호격의 앞에 펼쳐진 발해의 입구에는 지난 원정보다 배의 배로 늘어난 범선이 늘어서 있었다.
내수사와 은행, 저명한 각 상단의 합작이었다.
“만약 저 배들이 뭍에도 올라 북경의 못된 도적들에게도 포격을 날릴 수 있다면 아주 반가울 텐데.”
“그건 불가능하지요.”
동행한 조선 무관의 말에 호격이 실소했다.
“귀방 속담에는 사공이 많은 배도 산으로 간다는데, 누가 알겠소? 조선에서는 정말로 여차하면 배를 산에도 올릴지.”
들뜬 마음에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호격은 조선이 도와주건, 말건 순나라와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중원의 정벌은 금나라가 개국한 이래 역대 한들의 숙원이자 유지이기도 했으나, 당장 호격 본인과 금나라의 존속 및 유지를 위해서라도 성과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금성탕지의 철옹성으로 유명한 산해관과 정면승부를 해야 하느냐, 혹은 바다를 건너 북직예의 배후를 칠 수 있느냐는 천지 차이의 문제였다.
그런데 마침내 조선이 협조에 응해주었으니 호격은 벌써 북경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정복한 듯했다.
“병력의 운송 방식은 이전과 같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몸만 따로 타라?”
“그렇습니다.”
“지난 원정으로 우리는 조선과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양해해 주시지요.”
지난 원정에서, 홍태주는 비무장한 병사들을 조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익사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당시 호격도 마냥 기우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이번에 운송에 동원된 선박들은 조선의 최신예 군함들이었다.
물귀신 작전을 위한 대가로는 과도했다.
그것이 조선이 신용을 주고자 한 나름의 노력이 아닐까.
“좋다.”
“거리끼신다면, 귀환할 때는 말을 타고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조선의 말은 바다를 건너나 보는군…….”
호격은 이내 이해하고는 웃었다.
북직예를 온전히 평정해, 본토와 점령지를 육로로 연결하여 귀환하라는 뜻이었다.
“응원 참 어렵게 하는군. 조선 사람들은 말이 곧지 못한 데가 있어. 선한께서는 그게 만주 벌판처럼 마음 놓고 내달릴 땅이 없어서라고 하셨지.”
반대로 조선은 지형이 산으로 굴곡져, 그 위에 딛고 사는 사람 또한 심성이 굴곡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호격은 그 부분은 굳이 말하진 않았다.
“조선은 벌판 대신 바다를 내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아조와 금나라의 우정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겠지요.”
“말은…….”
호격은 피식 실소하곤, 수하를 불러 지시를 전달했다.
때가 되었다면 계속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만주의 족속은 내달릴 수 있을 땐 내달려야 했다. 그것이 만주인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북경을 점령하고 제가 황제라는 웃긴 놈의 모가지를 자르게 되면, 그때는 내가 옛날 일을 사과한다는 의미로 모가지는 국왕께 선물해드리리다!”
뒤쪽에서 군사들이 무장을 내려놓는 동안, 호격은 가볍게 박차를 가하여 배들이 늘어선 부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