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6화
이른 시각.
여러 사람에게 첫인상이 좋지 못했던 인물이, 다시 경운궁의 정전을 방문했다.
전견수.
순나라에서 파견된 사신.
새벽의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주변은 어스름했고, 대전의 내부는 특히 어두웠는데 안에서 빼곡하게 시립한 조선 조신朝臣들의 낯빛이라고 밝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범의 아가리 안에 선 이빨들 같은 형상이었으나, 이국의 사신인 전견수가 정전 앞에서 몸을 돌린다고 도망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견수는 침부터 꿀꺽 삼킨 뒤, 마지 못하여 대전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시립한 조신들의 이목만이 그를 쫓았고, 전견수는 한층 강해진 냉기를 느끼며 용상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소관 전견수가 조선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이에 용상의 주인이 답했다.
“사신께서 근래에 항의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의문보다는 타이름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항의가 아니옵니다.”
“항의가 아니라고요?”
“그렇사옵니다.”
“항의가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기세에 질려 있던 전견수마저 일순 욱하게 만드는 태평함이었다.
“……소관이 황제의 사신으로, 황상의 뜻을 받들어 방문하였는데 어찌하여 명쾌한 답은 내려주지 않으시고 억류만 하신단 말입니까?”
전견수는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태도나 선택한 단어가 너무 노골적이고 직설적이었으니까.
그러나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물과 같아서 다시 주워 담지 못하는 법.
전견수는 절망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황제 타령을 하는 걸 보아 주제 파악은 여전히 안 되는 모양이고, 억류니 뭐니 하는 걸 보니 눈치도 없는 듯한데…….”
시립한 조신들이 왕의 말에 실소를 머금었다.
과연 그러했다.
더욱이 조선은 금나라의 원정에 협력하여, 그들 군사를 순나라의 배후인 산동에 내려놓은 참이었다.
일국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면모를 보이는 것도 때로는 맞겠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못 되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더더욱.
“우리, 병조참판께서 잊을만하면 해주시는 말씀이 빈말은 아닌지 확인해 볼까요?”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사람이 단 하나 있다면 영의정 이원익뿐인데, 그는 조회에 불참했다.
“끌어내라.”
왕이 권태롭게 손짓하자, 외부에서 위사들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전견수를 좌우에서 포박했다.
“어? 어어?! 왜 이러는 건가!”
“엎질러진 물 위로 달려들면 씁니까. 그러다 엎어지면 남의 책임은 아니지요. 병조참판?”
왕의 호명에 시립한 신하들 사이에서 이귀가 나섰다.
“사람 목 베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이참에 베어보고자 하옵니다.”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자존심만은 대단히 강한 이귀다. 왕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져본 적 없는 그였기에, 설사 자신이 없더라도 내색할 순 없으리라.
왕은 재차 허공에 손을 저었다.
병조참판 이귀는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두 사람이 물러나고 한 사람이 잡혀간 곳으로 뒤따랐다.
이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공조판서 김류가 나섰다.
“정녕 사신을 베고자 하시옵니까?”
“그놈은 사신이 아니라, 자신이 황제인 줄 아는 정신병자가 보낸 광대이지 않습니까?”
전쟁이 터지면 적성 국가 사신 목숨이란 날파리 목숨과 마찬가지.
살려둔다고 덕 볼 건 없는데 감수할 위험은 있으니 당연했다.
하물며, 전견수처럼 사리판단이 불가능해 눈치도 못 보고 주제 파악도 안 된다면 더더욱 살려주기는 힘들었다.
“병조참판께서 정말로 사람 목을 벨 줄 아는지도 궁금하고요.”
“…….”
농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류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지금 왕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옛날 왕의 모습과는 달랐으니까.
전견수가 살려두기엔 부담스러운 놈인 건 맞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처단하는 건 과거의 왕이 선호했던 방식이 아니었다.
차라리 귀로에 오른 전견수의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말지.
그러나 그것을 당장 모두의 앞에서 지적할 순 없었다. 김류는 그저 고개 숙이고는 물러났다.
* * *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경회루를 찾았다.
그곳에서 왕은, 청소를 앞두고 물을 비워버린 경회루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짐승 하나 잡아 제를 올리고 싶었다고 칩시다.”
왕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아무리 값싼 인명인들 어찌 짐승보다야 가볍겠으며, 또 싸움을 각오하시옵니까.”
“만에 하나라도 호격이 멍청하게 거지 떼를 상대로 진다면, 과연 순나라가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호격의 군대가 혹 패퇴한다면 패잔병들은 우군이 있는 산동의 조선령으로 향할 테고, 순나라 역시 그들을 쫓아가 완전히 전멸시킬 겸 후방의 노출을 차단하기 위해 뒤따를 터였다.
그렇게 되면 조선군 역시 순나라군과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가장 지양해왔지만,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호격이 이기고 말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대사를 마주하신 채로 염려가 크다는 건 알겠으나, 이번 일은 과하셨사옵니다.”
“영상.”
“하교하시옵소서.”
이원익의 대답에 왕이 실소했다.
하교下敎해 달라고는 했지만, 정말로 배움을 구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니까.
어디, 하는 말을 들어나 보자는 기색이었다.
“영상의 말이 맞아요. 나는 염려가 큽니다. 그동안 내가 마주해온 고난이란, 보통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지요.”
그래서 그렇게 했다.
싹수 노란 예비 배신자와 매국노들을 처단하고, 불령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없는 B급 인재들을 어르고 달래서 조정을 채웠다.
껍데기만 남아버린 채 내실이 완전히 망가진 나라를 소생시키고자 강수를, 때로는 유화책도 쓰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 발씩 진전시켜왔다.
그 끝에, 마침내는 이전 역사에서 조선의 역경이 되었던 두 호란을 막아내기까지 했다.
호란이 벌어지는 와중 뭍으로 기어와 백성을 죽이고 납치한 해적들을 미리 소탕해버렸고, 금나라는 청나라로 진화해 잠재력을 다 발휘하기 전 간교한 술책을 동원하여 바람을 빼냈다.
정묘호란과, 그것을 전주곡에 불과하게 만들었던 병자호란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두 침공은 모두 의주를 두고 벌어진 두 차례의 공방으로 변모하여, 이전 역사의 호란들과 달리 주공主攻은 모두 의주에 가로막힌 채 좌절했다.
그뿐이랴.
금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난 다음에는, 지난 천 년 동안 구속과 같았던 좁은 반도 땅에서 탈출하기까지 했다.
한 줌에 불과하나마 요동과 산동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끝내는 발해渤海라는 하나의 바다마저 조선의 전유물로 앞둔 지금…….
“이제는 아닙니다.”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제는 내가 앞둔 문제들을,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실방사라는 전례 없던 첩보 기관까지 설치해 대량의 정보를 입수하고, 일국 지성의 정점들이라 할 수 있는 재상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의견도 취합했다.
하지만 어떤 도움을 받아도, 왕은 원정에서의 향방과 최선을 좀처럼 가려낼 수 없었다.
세자에게 의향을 물어본 것도 관련이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왕 자신이 최선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에, 대신 세자가 생각하는 최선을 실현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다.
새 술도, 새 부대에 담으라지 않던가.
“영의정.”
“예, 전하.”
“복상卜相도 따지자면 특지特旨와 다를 바가 없는데…….”
복상卜相은 의정 선발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삼의정 중 공석이 발생하면, 다른 두 의정이 후보를 제출하고 왕이 그중 한 사람을 낙점하는 식이다.
하지만, 왕이 후보 중 의정으로 올리고픈 이가 없다면 추가 후보를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었다.
왕이 내정해둔 사람이 있다면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더라도, 직접 당상관을 임명하는 특지와 결과는 같은 셈이다.
겉으로 보이는 건 다소 달라질 수 있으나 왕은 이런 일로 눈치는 안 보는 사람.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다 제하고 물어보겠습니다. 차기 의정으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이에 이원익이 고뇌 끝에 답했다.
“남이공이 좋사옵니다.”
“남이공이,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비록 사람됨은 경망스러우나 맡은 바는 최선을 다해 책임지고, 드러나는 경박함과 달리 공사公私와 적아敵我의 구분은 확실해 월권으로 동료를 해쳤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사옵니다.”
“하기야.”
실방사와 가장 가까운 상관으로, 그 힘을 부정하게 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오용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남이공이 그런 쪽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왕 역시 들어보지 못했다.
“김신국은 아닙니까?”
“김신국도 의정 후보로는 적합하나 이번 차례에는 남이공이 더 좋겠사옵니다.”
“이유는요?”
“남이공은 이번에 의정이 되고자 필사적인 데 반하여 김신국은 자신이 의정이 됨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더 절박한 사람에게 미리 떡을 물려주자는 소리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왕은 여전히 빈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원익은 대답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영상의 추천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남이공에게 불쌍해서 의정으로 만들어줬다고 알려주진 맙시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연못 주변에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번졌다.
“후임도 정해졌겠다. 바로 사직하시겠습니까.”
“노쇠한 몸일지언정 아직 죽지 않았고, 마침 중대사를 다루고 있는데 어심御心까지 알게 되었으니 사직은 미뤄두고자 하옵니다.”
“그래요……. 역시 영상밖에 없습니다.”
“망극하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내 치세의 모든 성과는 영상이 함께했으니까. 여차하면 세자에게도 도움을 주면 좋겠는데.”
왕의 무리한 부탁에 이원익이 미소지었다.
“그건 신이 백번 의지意志하여도 쉽지 않겠사옵니다.”
“노력은 해보세요.”
“예.”
“날이 춥습니다. 이만 가서 쉬세요.”
“예에. 저하께서도 옥체 보중하시길 바라겠사옵니다.”
이원익은 잔소리를 남긴 뒤, 꾸벅 물러나는 예를 표하고는 경회지를 빠져나갔다.
왕은 그 자리에 한참을 남아 있었다.
* * *
경회지.
청소를 끝낸 연못에는 다시 물을 채워놓았고, 왕은 경회루가 불타고 남은 기둥에 기댄 채 연못을 감상하고 있었다.
“세자야.”
“예, 아바마마.”
“남이공이 차기 의정이다.”
왕이 툭 던지는 말에 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예.”
달리 답할 수가 없었다. 신하를 임명하는 건 왕의 권한이고, 하물며 의정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것을 자신에게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예?”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차기 의정은 남이공을 세우려 하는데, 세자가 바라는 게 있으면 들어주고자 한다.”
부왕의 하교에 세자는 금세 답했다.
“소자의 추천으로, 남이공을 뽑았다고 해주시겠사옵니까.”
“그러면 김신국이 실망할 텐데.”
“호판은 성격상, 나중에 소자가 남이공에게 점수를 따고자 일부러 빈말을 간청하였다 이실직고하면 유감을 품지 않을 것이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잘 배웠구나.”
“…아직도 부족할 뿐이옵니다.”
세자는 꾸벅, 부왕을 향해 허리 숙였다.
“계속해라.”
“예.”
세자는 미래가 훌쩍 다가왔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