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7화
“다시 이곳에 돌아왔군.”
청주 진평부.
호격이 선한 홍태주와 함께 방문했을 때는 산동 등주라 불렸던 곳이다.
“오셨습니까, 한.”
호격과 함께 그의 군대가 다다르자, 수령의 복장을 한 사내가 성 밖까지 나와 마중했다.
“진평부사 김경여라고 합니다.”
“뵈어 반갑소.”
“영광입니다.”
김경여는 호격의 뒤로 늘어선 군대를 돌아보았다. 족히 수만은 되어 보였는데, 기세만은 웅장했으나 군사들의 면면은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은 요동에 징발된 한족 장정들.
이역만리 땅에 실효도 거두지 못하고 거듭 원정을 나온 게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격과 금나라의 사정.
김경여가 신경 써줄 바는 아니었고, 그는 열린 성문의 안쪽을 향해서 팔을 뻗었다.
“들어오시지요. 소관이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지.”
“군사는…, 송구하오나 밖에서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백성들이 상처가 있어 많이 놀란 상태입니다.”
홍태주와 금나라의 군사는 지난 원정에서 등주를 청소에 가깝게 쓸어버렸으니까.
얼마 없는 생존자들과 그들의 경험담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진평부였기에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안에서는 금나라의 군사들이 온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문과 창문을 모두 닫고 틀어박힌 상태.
“……흐음.”
그것을 성문 너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호격은,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군사들을 물리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쥐 같은 종자들을 다스리느라 부사가 고생이 많군. 그게 어떤 고생인지는, 나도 잘 알지.”
“하하…….”
김경여는 멋쩍게 웃곤 아전들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따르는 호격 및 그의 수하들과 함께,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아 바람 소리만 들리는 대로를 한참 나아갔다.
호격이 말했다.
“나는 하루속히 순나라를 평정하고 싶고, 그게 귀방에도 이로울 텐데 굳이 초청하여 잡아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조가 준비한 협력은 한과 군사들을 순나라의 배후로 이송시키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귀인貴人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게 전쟁과 긴말한 연관이 있다?”
“간접적인 연관은 있습니다. 공공연히 말할 이야기는 아니니, 내밀한 장소를 마련하려는 것뿐이지요.”
“그런 거라면 바깥에서 장소를 구했어도 될 텐데 말이지.”
호격은 괜히 딴생각이 드는지, 입구와 창문이 꾹 닫힌 주변을 돌아보았다.
“설마, 이 거리에 우리 외에도 나와 있는 사람이 있나?”
“눈치채셨습니까.”
“…….
“나쁜 오해는 하지 마시지요. 말씀드렸듯이, 이곳의 백성들은 잃은 게 많고 한께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감시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흠.”
호격은 허리춤의 칼 손잡이에 손을 얹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듯 일행은 별 탈 없이 동헌에 도착했고 김경여는 또 한 번 열린 대문 너머로 팔을 펼쳤다.
“듭시지요.”
* * *
호격의 친위대가 동헌의 주변을 시위하는 동안, 김경여는 차를 내놓고 호격과 마주했다.
“입맛에 아니 맞습니까?”
“이건……. 내가 평소에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서. 마음만 받도록 하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나누던 말이 있지 않나? 무슨 꿍꿍이인지 이제는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김경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호쾌하게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
“대순에 황제를 참칭하는 이자성이 가장 신용하는 수하가 있습니다.”
“그놈을 어떻게 해버리겠다?”
“하하. 마음이 급하십니다. ……예, 맞습니다. 드릴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놈이 죽으면 내게 어떤 이익이 있지?”
“이자성이 제일 신용한다는 건, 군무軍務를 맡고 있음과 동시에 오랫동안 실력을 입증해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이 죽는다면 순나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될 테지요.”
“이미 놈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거늘.”
“아무리 맛있는 밥을 먹어도 배에 밀어넣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순나라의 오합지졸은 그 수효가 한둘이 아닙니다. 밥알에 목구멍이 막혀 죽는다면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럴 일이 없도록, 순나라의 몇 없는 유능한 지휘관을 없애 그들의 군대를 더욱 약체화하겠다는 말이었다.
“흠.”
호격은 팔짱을 끼고서 침음했다.
“뭐, 그대들의 뜻대로만 된다면 내가 마다할 일은 아니로군.”
“다 전하와 조선이 한의 승리를 위하고자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질 생각이 없고, 다만 이 일의 성사에 따라서 쉽게 이기느냐, 아니면 더 쉽게 이기느냐만 갈릴 따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일이 오래 지체된다면 상륙을 알아챈 순나라 놈들에게 방비할 여유만 더 주는 꼴 아니겠나?”
호격이 자신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조선 국왕 전하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되는 꼴인데?”
이에 김경여가 여유롭게 답했다.
“어떻게 될는지, 어디 한 번 보지요.”
* * *
“대인께서 출정하시면,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으시고도 대승을 거두실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오랑캐 놈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살려달라 애걸할 테니 말이지요!”
늦은 밤.
사방이 왁자한 가운데 상석인 정자亭子에서 비단옷 차려입은 사내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얼굴이 불콰하게 취한 채 손바닥을 모아놓고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 대장군님! 하늘과 같은 대장군님! 살려만 주십쇼! 우리 못난 오랑캐 개종자들의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앞으로 대장군님의 발 깔개가 되어 살겠사옵니다! 아이구우…….”
과장된 연기에 순나라의 대장군 유종민劉宗敏이 파안대소했다.
“으하하! 이거. 아주 웃기는 사람이구먼, 그래?!”
유종민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술잔을 끼워놓은 채 사람을 가리키며 웃었고, 동석한 이들은 동감한다는 듯 왁자하게 대소했다.
“대장군…….”
“어?”
“마음 깊이 사모합니다!”
“갑자기?”
“한 번만 모시게 해주십시오!”
“그럼, 지금 나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아부를 떨었다는 말인가?”
유종민이 실망스럽다는 투로 묻자, 우스꽝스러웠다가 이제는 절박해진 사내가 또 안색을 진지하게 바꾸어서 말했다.
“대장군!”
“…말하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장군께서 나아가 요동으로 나아가 호령 한 번 내리시면, 온 오랑캐들이 복속하고 충성을 바칠 터인데……. 그 곁에서 군기만 들어도 입을 공이 미약하겠습니까?”
“하하, 허. 이것 참.”
“출세하게 해주십시요! 견마지로를 다하여 모시겠습니다!”
사내가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외치며 허리까지 숙였다.
주변에서는 눈치만을 가운데, 유종민만이 어처구니없어 실없는 웃음을 흘릴 뿐.
그러다가 마음이 정해졌는지, 유종민은 안주를 집다가 말고 젓가락 끝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그래!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기회를 구걸하는데 응해주지 않으면 내가 미안하지. 어디, 자네가 전쟁에 일조할 구석이 있는지 알아보겠네.”
“대인! 망극합니다!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귀청 떨어지겠네, 이 인간아.”
유종민이 질렸다는 듯이 이르자, 사내가 곧바로 쉭쉭 속삭였다.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어르신.”
“흐흐. 허허허! 이놈 참 아주 걸물일세.”
그렇게 사내가 한자리 얻어내는 모습에 제법 인상적이었을까.
눈치만 보면서 유종민의 반응을 살피던 상석 주변의 다른 사내들도 앞다투어 허리를 숙이고, 무릎도 꿇고, 아예 옷까지 벗어버리며 충성과 굴종을 맹세했다.
그렇게 좌중이 시끄러워지자 유종민은 질린 기색으로 젓가락을 휘저었다.
“다들 아주 못된 것만 배워서 소란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만. 이 사람은, 잠시 측간에서 소피나 보고 와야겠어!”
“아이고, 어르신!”
몇 사람이 함께 일어서고, 또 그중 몇 사람이 부축하고, 그중 또 몇 사람이 먼저 정자를 내려가 한 쌍 신발을 두고 서로 신겨드리겠다 다퉜다.
유종민은 그런 구차한 아부를 굳이 마다하지는 않고서, 한 발씩 내밀어 신을 신고는 측간으로 향했다.
연회장의 불빛과 소란이 점차 멀어졌다.
측간에 다다르자, 유종민은 뒤따르는 아부꾼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끝까지 따라와서 내 대물을 구경이라도 할 생각인가? 마음들은 잘 알겠으니 그만 따라오게.”
“예!”
한자리 얻은 사내가 벌써 군직이라도 얻은 듯 당차게 답하며 섰다.
유종민은 치, 하고 실소하곤 마저 측간으로 향했고 좌우의 다른 두 아부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한자리 얻었으면 만족하고 돌아갈 법도 하지 않나?”
“그래! 자네는 아주 탐욕스러운 인간이로군!”
“여기부터는 우리에게 양보하고 자네는 맛 좋은 술이나 마저 드시러 돌아가게!”
“맞아! 양심이란 게 아주 없지는 않다면 말이지!”
두 아부꾼이 주거니 받거니, 강적을 상대로 오월동주를 펼치자 사내는 측간을 흘겨보고는 말했다.
“그건 어렵겠는데…. 여기서부터는 진짜 내가 맡아야 하거든.”
그러자 두 아부꾼의 인상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봐,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그 순간이었다.
사내는 손으로 반대편 소매 안쪽을 뒤지더니, 작달막한 단도를 꺼내 마주한 아부꾼의 가슴을 찔렀다.
“……!”
이어 반대편의 아부꾼도, 당혹한 사이 멱살을 잡아끌어 눈 깜짝할 사이에 찔렀다.
모두 즉사했기에 아부꾼들은 단말마 한 번 내뱉지 못한 채 허망한 얼굴로 쓰러졌고,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채 앞섬만 붉게 물들였다.
사내는 그런 두 아부꾼을 뒤에 남겨놓고서 측간으로 향했다.
막 유종민이 볼일을 바치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응?”
유종민은 사내가 다가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거어, 참. 내가 일부러라도 잘 대해주려고 해도 자네가 이렇게 선을 넘어버리면 계속 좋게 봐줄 순 없어!”
이에, 사내가 대답 대신 들이민 건 작달막한 쇠뭉치였다.
시커먼 쇠막대에 손잡이가 달린 형상이었는데 유종민은 그 기물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한 인상만은 확실히 전해져, 두 팔을 교차하려는 순간이었다.
펑!
총성과 함께 유종민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커헉!”
거대한 몸뚱이가 나무토막처럼 기울었고, 사내는 쓰러지는 유종민을 쫓아 단검으로 목을 찔렀다.
피로 젖어 드는 앞섬 안쪽으로, 먹빛의 사슬천이 드러났다.
쇄자갑鎖子甲.
유종민이 만일을 대비해 차고 다니는 호신구였다. 그러나, 사슬이 칼은 막을지라도 총탄을 막지는 못하는 법.
사내는 유종민의 목을 마저 그어 확실하게 끝낸 뒤 멱살을 잡아끌어다가 측간 변소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러면 대장군의 신변과 생사의 확인을 위해 추격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터.
다시 밖으로 나선 사내는 웅성거리며 몰려드는 인기척을 피해 담장을 넘었다.
* * *
성을 빠져나온 사내는, 때마침 성문 앞을 지나던 이의 말 뒤에 올라탔다.
모르는 사람이 대뜸 자신과 함께 말을 탄다면 깜짝 놀라는 게 당연지사일 텐데, 그는 동요 하나 없이 곧바로 박차를 가해 내달렸다.
그리고는 물었다.
“어떻게 됐냐?”
“확실하게 처치했습니다.”
“오……. 덕순이 많이 컸네. 대장군 모가지도 따고.”
빈손으로 집을 나와, 우연히 알게 된 상인 형장을 쫓아 조선유상에 가입했던 덕순이다.
그때의 과거는, 철없던 호시절이 되어버린 덕순이 형장에게 능글맞게 답했다.
“이제 누구 멱을 따드릴까요. 자기가 황제인 줄 아는 머저리?”
“흐흐. 행수 어른께 물어보자고.”
두 사람이 밤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