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78화
청주 진평부.
이곳의 목민관 김경여는 오래간만에 다시 방문해준 손님과 마주했다.
기껏 차를 내었으나 손님은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 뒤로는 시종 본론만이 이어졌다.
그 끝에 김경여가 여유롭게 답했다.
“어떻게 될는지, 어디 한 번 보지요.”
자신만만한 발언이었다.
이에 호격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염소수염의 아전이 경박한 잰걸음으로 동헌 마당을 가로질러왔고, 요란한 인기척에 김경여와 호격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아전이 아뢨다.
“부사 영감.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김경여가 호격을 바라보며 무언으로 양해를 구하자, 호격은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손을 들어 보이며 양보했다.
“말씀 나누시오. 급한 소식 같은데.”
김경여가 미안한 얼굴로 쓰게 웃었고, 아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전이 경박한 잰걸음 그대로 섬돌에 올라, 무릎으로 대청을 지르며 김경여에게 가까이 들러붙었다.
“예조 정랑에게서 온 소식입니다.”
아전은 입을 김경여의 귀에 가져간 채, 그것을 손으로 가리고서 마저 보고했다.
“순나라 대장군 유종민을 처치했다고 합니다.”
“…….
김경여는 무언으로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아전은 대청을 지르던 그대로, 다시 무릎을 옮겨 물러났다.
그 우스꽝스럽고 경박한 모습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호격이 다시 나섰다.
“뭐, 얼마나 중요한 소식이기에 저런 호들갑까지 떨면서 전한단 말이오?”
딴에는 은근히 떠보겠다고 건넨 말이었다.
“순나라 대장군 유종민이가 죽었다고 합니다.”
“…….”
김경여는 비어버린 자신의 찻잔을 채우며 느긋하게 덧붙였다.
“소관이 한까지 불러다 놓고 일이 성사될 때까지 며칠을 벌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래서야 기우가 되어버렸습니다.”
“……허.”
“재주와 신임을 가지고 순나라의 군권을 통솔하던 인물이 죽었으니, 이때 배후를 친다면 한께서 큰 이익을 거두실 것입니다. 어째, 다시 출발하시겠습니까?”
김경여가 묻자, 호격은 그간 손대지도 않았던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답했다.
“인상적이구려.”
“차 맛이 말입니까?”
“귀방의 재주가. 이거 맛은 별로고.”
호격은 젖은 찻잔의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두드리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공이 이미 손질을 다 해놨다는데 가라면 가야지.”
호격은 내려놓았던 투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경여가 뒤따라 일어서거나 말거나, 마당으로 나와 주변을 지키는 수하들을 불러 모으고는 일렀다.
“조선에서 막 순나라의 대장군이라는 놈을 쳤다고 한다. 이것들이 일부러 이걸 알려주려고 나를 붙들었군.”
유종민의 암살은 단순히 조선의 협력만이 아니었다.
꼴에 대장군으로 군림하던 일국의 요인마저 여차하면 죽여 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실력 행사이기도 한 것이다.
원정의 성사와는 별개로 호격에게는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자신도 그렇게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니.
하지만, 정면으로 내색할 수는 없다. 조선의 의도대로 휘말리는 것.
그런 겁박에는 꿀리지 않는다는 걸 결과로서 증명해야 했다.
“출발하자!”
호격이 떠나간 뒤.
“바로 출병하였습니다.”
경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아전이 멀쩡한 상태로 보고했다.
호격 앞에서는 일부러 얕잡아 보이고자 그런 연기를 했던 것.
이에 김경여가 답했다.
“실방사에서는 금나라 군대를 추적하시오. 전황이 아조의 기대와 달라지면 즉각 개입해야 하니.”
“예에.”
실방사 소속의 아전이 예와 함께 물러났고, 호격이 멀어진 방향을 주시하던 김경여 역시 이내 발을 돌렸다.
* * *
“어젯밤까지 스물한 곳의 마을이 전소되었고, 순나라는 어떠한 방위 시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장군 죽고 정신 못 차리고 있다, 그거지.”
“대량 발생한 유민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수가 산동, 특히 조선령에 유입될 것으로 추측됩니다.”
“덕분에 우리도 개판이고.”
“각 읍 관청에서는 현지인들까지 군사로 징발하여 치안 확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징병에 대한 반발은 전무한 수준입니다.”
“자기네들 스스로 지키는 일인데 당연하지.”
“이제는 자기도 박힌 돌이다, 이거야?”
“덕분에 우리는 편하죠?”
내주의 실방사 지부.
지난 유지들의 집단 반란 시도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원 몇 곳이 폐허로 전락했다.
이때 실방사에서는 폐허를 차명으로 매입해 지하를 개조했고, 회의실로 쓰고 있었다.
보고가 잡담이 되어가자 회의실 상석에 앉은 한윤이 나섰다.
“오랑캐와 도적이 서로 싸운다고 노가 났구나.”
“어찌하시겠습니까?”
“둘 다 딱 망하지 않을 만큼만 싸우다가 죽었으면 좋겠군.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아직은 금나라가 상당한 우세에 놓여 있습니다.”
“그건 순나라의 군대가 머리를 잃었고, 엄청난 떼거지를 소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당장 마을 몇 곳 불살라졌다고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건 아니지.”
이상적인 결과는 금나라가 원정에 성공하되, 지느니만 못한 승리를 거두어 중원에 더 진출하지 못하고 교두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찬 지경에 놓이는 것이다.
아직은 그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
미리 순나라를 흔들어놓은 건, 금나라의 승리는 용인할 수 있어도 순나라의 승리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
“계속 주시해라. 금나라가 생각보다 대처를 심각하게 못 하면, 그때는 나서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자성의 거취도 놓치지 마라. 달아난다면 이쪽에서 손을 써야 하니.”
“예.”
어수선했던 회의가 파하고, 일원들이 사방으로 연결된 통로로 흩어졌다.
한윤 역시 뒤이어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 일어난 뒤, 유일하게 공간을 밝히던 불을 불어 껐다.
암흑 속에서 한 쌍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 * *
밤을 밝히는 화마를 병풍처럼 펼쳐놓고서.
호격은 말 고삐를 움켜쥔 채 흩날리는 불씨와 잿가루를 마주했다.
조선이 다스리지 않는 중원의 영역으로 발을 디딘 지도 닷새째.
금나라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순나라의 영토를 종횡무진했으며, 산더미와 같은 전리품을 손쉽게 끌어모았다.
오죽하면 전리품 때문에 군대의 거동조차 불편해질 정도.
조선의 상인들이 따라붙어 전리품을 매입하고, 이외에 필요한 물건과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군대는 지금 이상의 고충을 겪었으리라.
오죽하면 수하 몇몇은 이미 수확에 배가 불러 회군을 조심스럽게 제안할 정도였으니.
‘나약하고 한심한 발상이지. 지금 순나라를 마저 끝내지 않으면, 조선까지 적으로 돌리게 된다.’
조선은 호격과 그의 군사들을 순나라의 취약한 배후로 이송해주었다.
순나라가 연명하게 된다면, 이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조선령 산동을 평정하려 들 터.
그러면 원정을 일으킨 금나라는 뒤로 빠지고 협조해준 조선군이 대신 싸우게 되는 꼴인데, 이것을 조선이 용납할 리 없었다.
‘애초에 성과 없이는 본토로의 귀환을 허락하지도 않을 테지.’
그래야 호격 본인과 금나라의 주공은 바다 건너 이역만리에 격리해둔 채,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금나라의 본토를 보복 삼아 유린할 수 있으니까.
금나라는 선한 홍태주의 마지 못한 타협들과 비교적 온건한 통치의 결과로 제법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조선이 과거 요동을 직접 지배하지 않은 이유는, 혼란하기 짝이 없어 평정에 수고로움이 크게 들기 때문이었다.
군사를 빼낸 지금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 이로울 게 하나 없었다.
‘하지만 북직례를 정토하고 이곳을 본토와 연결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중원의 교두보와 육로로 연결되면서, 자신의 현재 우려는 재발하지 않게 되니까.
또한 금나라는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북직례를 거느리게 되면서 다시 도약하게 될 터.
이는 기고만장한 조선도 흉내 내지 못할 위업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구분 없이 다스리고자 하기에 영토의 비대함과 인구의 과도함을 우려하지만, 금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
대금의 영토에서 만주의 적통 종족을 제한 나머지는 노예일 뿐이다. 노예의 목숨과 재물을 이용하는 데 거리낄 건 조금도 없다.
그리하여 더 많은 노예를 거두게 된다면…….
‘금나라는 다시 대청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겠지.’
원정을 무조건 승리로 귀결시켜야 할 이유다.
“한이시여.”
일단의 기병들이 친위대를 헤치고 다가와 인사했다.
호격은 그들에게 피와 불의 냄새가 나지 않음을 느꼈고, 동시에 은근히 다급한 태도에서 위급함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냐?”
“적입니다. 순나라의 군대가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호격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하며, 불안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었다.
“이동 중인가?”
“아닙니다. 목책을 탄탄히 세우고 사방에 화등을 피웠으며, 입구마다 거마작拒馬?을 켜켜이 설치해놓았습니다.”
“야습은 제대로 방비한 모양이군…….”
호격은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강력한 기병 전력을 앞세워 지친 적군을 몰아친다면 쉬이 승리를 취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저들의 철저하고도 조심스러운 방비를 보아 약탈로 지친 기병들을 동원해 야습을 거는 건 위태로울 듯했다.
“적들의 수효는 얼마나 되더냐?”
“…….”
정찰병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호격이 채근했다.
“대답하라! 아니면, 진을 세우고 휴식을 취하는 적들에게 놀라 살펴볼 새도 없이 내게 달려온 것이냐?”
“아니옵니다. 다만, 야간에 포착하여 적의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을 따름입니다.”
“대략이라도 말할 수는 있을 터이다.”
“폐하…….”
정찰병을 꼴깍 침을 삼키고는, 어렵사리 답했다.
“족히 십만은 되는 듯했사옵니다.”
호격은 일순 허황되다고 생각했다. 금나라의 모든 한족 장정을 다 징발하여도, 십만은 만들어내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상대는 중원의 절반 가까이 평정한 순나라다. 하물며 이곳 북직례는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
정찰병이 마저 보고했다.
“적의 군대가 대로大路와 그 좌우를 폭 넓게 점거하였는데, 소관이 처음 적을 발견했을 때는 지도에 없는 새로운 마을을 발견한 줄로 혼동할 정도였습니다.”
십만 대군이 사방에 화등을 펼쳐놓은 것을, 멀리서 봤을 때는 집마다 불을 켜둔 것으로 혼동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마을을 살펴보니, 주변에 목책을 세워놓고 입구에는 거마작을 켜켜이 둔 채 군사까지 세워놓았으므로 마을이 아니라 적이 주둔한 것임을 알았는데, 수효를 파악하고자 숲의 경계를 타고 한참을 나아가도 불빛들이 계속 연이어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
“소관은 저들의 규모를 더 상세히 파악하고 싶었으나, 군중에서 나온 적들이 숲을 배회하였고, 또 중대한 보고를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급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정찰병의 부연에 호격이 손바닥으로 턱을 감쌌다.
“네 말대로라면 대략이 십만이나,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만.”
“…그렇습니다.”
“알았다. 물러나서 쉬어라.”
“예.”
호격은 수하들을 불러 약탈을 중지시킨 뒤, 군대를 집결시켜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소수의 기병을 파견하여 적의 군영 외곽에서 유격전을 벌이게 했다. 큰 효과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대군大軍의 휴식을 방관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호격은 기대보다 커진 불안감 속에서 침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