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80화
“자존심은 더럽게 상하게 하는군…….”
이전에 순나라의 대장군을 암살한 일에 더불어, 이번 원호까지 돌이켜보면 일군의 군주이자 전사로서 무척이나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도움을 입지 않았다면 오늘의 승전도 불가능했다.
분명 전략은 유효했으나, 금세 적의 수적 우위에 압도되어 열세에 놓이지 않았던가.
덕분에 살아났는데 자존심 때문에 걸고넘어지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애초에, 위험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는 조선 상대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호격이 주변에 물었으나, 수하들도 난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침묵이 이어지자 친위대 대장인 라이무부가 나섰다.
“한이시여. 조선이 우리를 돕기는 하였으므로, 항의하기는 어려우나 원조를 숨긴 건 그 방식이 떳떳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순나라의 대장군도 뒤에서 몰래 암살해버리지 않았던가.
전장에서 적의 장수들이 픽픽 죽어 나간 것 또한 똑같이 음흉한 수법을 동원한 것이리라.
라이무부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수법을 저지른 자들에게 나아가 당당히 이르면 될뿐입니다. 도움은 받았으나, 이런 식으론 불쾌하다고 말입니다.”
“흐음.”
“저들이 음흉한 수법을 거듭 과시하는 건 한과 우리를 겁박하기 위해서니, 그런 수법이 소용없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하지만, 어디로 가서 나의 불쾌함을 드러낸단 말인가?”
조선령인 청주와 내주는 전장에서 멀었다. 그렇다고, 수하를 보내 대신 전달하는 건 무게가 없었다.
이에 라이무부가 전장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조선의 상인들이 태평하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저놈들이 벌인 일이란 말이냐?”
“저들 외에는 달리 조선인이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라이무부에 호격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저들을 까마귀들과 같이, 전쟁을 쫓아다니며 부스러기만 주워먹는 종자들로만 알았더니 훨씬 더 음흉하고 위험한 무리였었다.
만약 저들이 흑심을 품었다면 자신과 금나라의 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음에는 무슨 수법으로 자신을 위협할까.
호격은 괜히 성질까지 났으니 드러내진 않기로 했다.
저들이 거듭 과시해오는 음험함을 상기해볼 때, 역시나 강대강으로 맞서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호격은 가볍게 박차를 가해 상인들에게로 나아갔다.
“……?”
상인들은 그러한 모습을 태평하게 바라보다가, 호격이 가까이 오자 일어나서 예를 올렸다.
“전하.”
“어인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몇몇 상인이 눈을 반짝이며 의사를 물어오자, 호격은 질린 낯으로 팔을 저었다.
“내가 필요한 게 있어 방문한 게 아니요!”
“그렇다면…….”
“그대들이 어떻게든 나의 전쟁에 개입했다는 걸 알고 있소!”
“…….
“원호에 도움을 입은 건 분명한 사실이오. 그 점은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이렇게 거론조차 없이 음험한 방식이라면 진의가 어떻든 내가 오해하기 쉽다는 건 그대들도 알아야 할 것이오!”
호격의 당찬 발언에 상인들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일어났다.
“그대인가?”
곧장 눈에 띄었으므로 호격이 검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상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저희가 전하의 군대를 쫓아다니며 입은 은혜가 많으니, 싸움에 있어 약소한 도움을 드린 것뿐이지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
“실례가 되었다면 다음에는 나서지 않겠습니다.”
상인의 말에 호격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알고는 있었다. 저들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싸움에서 패했으리라. 적의 수적 우위가 압도적이었으니까.
더욱이 호격과 그의 군사들은 이역만리에서 싸우는 중.
자칫 한 번의 패전을 감당하지 못하여 군사가 조선령까지 퇴각하고, 그래서 순나라의 군대마저 조선령까지 진입했다간 크게 곤란해진다.
그래서 호격도 원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언급조차 없이 음흉한 수법을 동원하여 오해를 사지 말라는 뜻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상인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호격은 썩 개운치 못한 심정으로 기수를 돌렸다. 계속 상대했다간 더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재수가 없는 놈들이야. 계속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군.”
“모두의 앞에서 음흉한 개입을 긍정할 수는 없었을 테지요. 대신, 저들도 폐하의 뜻을 알았으니 조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흥, 그러는 척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호격과 라이무부, 친위대는 전리품을 처분하고자 조선 상인들에게 몰려가는 부하들을 거스르며 자신의 군영으로 향했다.
* * *
“호격이 꽤 자존심이 상한 듯했습니다. 대놓고 불만을 호소하는 건 지양했지만, 언성이 거칠고 발언은 단호하더군요.”
“우리 도움을 딱 잘라 거부하지는 않았겠지?”
“예.”
“그만하면 됐다.”
그래야 나중에 도움을 줘도, 주지 않아도 둘러댈 말이 생기니까.
실방사에서는 호격이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패퇴한 순나라 군대는?”
“완전히 와해하지는 않았으나 패잔병 수습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주로 지휘관들이 죽었기 때문이겠지요.”
“빈자리 채워지고 나면 호격도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준이 되겠지?”
“그럴 것입니다.”
큰 패전으로 사기도 추락했고, 급하게 충원한 지휘관들은 전보다 수적으로든 질적으로든 크게 떨어질 터.
“계속 주시하자고.”
“예.”
보고가 일단락하고, 자리에 남은 실방사 일원은 문방사우를 펼친 뒤 그간 오고 간 내용과 전장에서의 일을 써내렸다.
장계는 탈취되거나 분실할 위험이 있으므로 당연히 암호문.
워낙 많이 쓴지라 이제는 천자문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었다.
* * *
암호문을 읽어 내려가던 남이공이, 허공에 허 한숨을 토해냈다.
“이겼네.”
조선에서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있었다.
순나라를 정벌하겠다, 호언장담하던 호격이 개같이 대패하고 순나라의 대군이 어렵사리 개척한 조선령 산동으로 진군하는 것.
그러나, 이렇게 순나라의 대군이 일차적으로 패배하여 수습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지금 조선이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졌다.
호격이 패하고 순나라가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면 달라지겠으나…….
조선이 그것을 허용해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혹여 호격이 패퇴하고 구제가 불가능해진다면 바로 어부지리에 들어갈 조선이다.
“좋은 소식은 모두가 알아야지.”
남이공은 암호문을 해석해 의정부로 보낼 수본手本으로 만들고, 아래로는 지시를 위한 또 하나의 암호문을 작성했다.
현장에서도 충분히 자체적으로 내렸을 수준의 지시였으나, 상부의 명확한 지침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 차이.
막 완성된 공문들을 밀어낸 남이공은 의자 등받이에 여유롭게 늘어졌다.
“이 생활도 조만간 끝이구만.”
이원익의 요양을 위한 사직이 마침내 가납되었다.
아직은 전쟁 중인 만큼, 당장은 아니고 순나라가 패망하여 조선령의 위협이 사라지는 순간 사직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인사이동 또한 예정되었다.
좌의정 박홍구가 영의정으로, 우의정 이상의가 좌의정으로 옮기게 됐다. 구관이 명관인지라 의정도 하던 사람이 잘한다던가.
업무상 차이 있는 거 아니냐고 내심 불만도 들었지만 남이공은 관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공석이 된 우의정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게 됐으니까.
“김신구기, 이 셰끼…….”
발표가 있던 날 김신국은 달리 발언하지 않았으나, 인연 깊은 남이공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속으로 매우 배알이 꼴리는 것을 말이다.
꼴에 의정 한 번 되어보겠다고 추하게 안 하던 술수까지 벌이더니, 하늘의 벌을 받은 게 아니겠는가.
“물에도 위아래가 있는데 말이야……. 어딜 건방지게 형님보다 먼저 의정 자리를 노리기나 하고. 어?”
내정의 결과는 도의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매우 당연했다.
이제, 남이공에게는 한 가지 행복한 고민만이 남았다.
“스읍……. 그런데 후임은 누구로 세우지?”
실방사의 일이 매우 민감한지라, 대왕은 예외적으로 후임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당시에는 미리 염두에 둔 후보가 있기는 있었는데, 거론하지는 못했다.
후보가 김신국이었기 때문.
이놈도 자기 자리에서 고생다운 고생을 해보아야, 늦게라도 철이 들지 않겠냐는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김신국이 당장 맞은 호조판서 자리가 꼴에 천직인지 성과가 좋아서 왕이 윤허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래서 선뜻 말하지 못했던 것.
매우 당연하게 반려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다른 후보도 생각해둬야 했다.
“흐음…….”
그러나 남이공의 행복한 고민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감?”
밖에서 심부름을 하는 아전이 찾았고, 남이공은 곧장 관복을 정돈한 뒤 목소리를 깔고서 답했다.
“무슨 일인가?”
“궐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궐? 알았다.”
남이공은 곧장 막 완성한 공문을 말았다. 먹 마를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그리고 두 권자卷子를 챙겨 밖으로 나와 아전에게 말했다.
“이 빨간 포장은, 펼치지 말고 곧장 의정부에 전달하거라. 이쪽 포장은 실방사에 전하고.”
빨간색 비단 포장은 실방사와 관련된 특급 기밀이라는 뜻. 몇 번이고 일렀던 말이지만, 누차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공문을 떠넘긴 남이공이 예조를 나서자, 과연 문밖에는 구부정하게 선 채 손을 모은 내시가 있었다.
“바로 입궐하겠다.”
“예에.”
내시는 긴말 않고 몸을 돌려 앞장섰다.
남이공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별생각 없이 나아갔는데, 이상하게 가는 길이 자신이 아는 빠른 길과 달랐다.
“지금 궐로 가는 길이 맞느냐?”
“맞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길은 아닌데. 경운궁은 바로 지척에 있지 않으냐?”
과장 아주 조금 보태, 육조거리에서 엎어지면 있는 게 경운궁이었다.
“경운궁이 아니라 서궐로 가는 길이옵니다.”
“서궐? 서궐에는 어인 일로.”
“저하께서 찾으십니다.”
“허.”
남이공은 자신의 오해에 짧게 탄식했다. 서궐도 궐은 궐이었다. 대신 아전이 똑바로 안내하지 않은 게 못마땅해졌을 뿐.
아무튼, 남이공에게 서궐은 정녕 오래간만이었다.
까마득한 오래전 관문에 들어 녹을 먹은 지가 꽤 되었으므로, 그동안 느낀 교훈을 세자에게 전하라는 왕명을 받는 적이 제법 되었으나 근자에는 그럴 일도 없었다.
그 뒤로는, 육조의 장관으로서 동궁과 만남은 일부러라도 지양해왔는데 이렇게 부름이 온 것이다.
‘어인 일이실까.’
제법 고민을 해보았으나 추측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동궁과의 접점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방문한 서궐은, 역시나 잊을 수 없는 장관으로 남이공을 맞이해주었다.
푸른 하늘에 청기와 지붕들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광경이다.
볼 때마다 감탄할 따름.
이와는 대조적인 경운궁의 풍경을 생각하면, 감상은 더더욱 종잡기 힘들어진다. 때로는 죄짓는 기분마저 들 정도.
“이곳으로…….”
더욱 조심스러워진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도달한 곳은, 동궁 권역이었다.
청기와 지붕은 물론이고, 반 층 높은 전각까지 갖춰진 풍경은 단 한 채만으로도 압도적인 위광을 과시했다.
세자는 그곳에 있었다.
“……저하.”
길을 안내한 내시는 어느새 사라진 채.
남이공은 그것을 의식할 새도 없이, 홀리듯 손짓하는 세자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