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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1화 (281/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1화

남이공이 세자를 쫓아 도착한 곳은 동궁전의 반 층 높은 전각이었다.

전각은 지상에서 조금 떠 있을 뿐이나 주변이 훨씬 잘 보였고, 지상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풍광을 즐기는 것도 잠시.

세자가 안쪽 상석에 자리하자 남이공도 뒤따라 앉았다.

“들이시게.”

세자가 난간 너머로 마당을 지키는 내시에게 일렀다.

남이공으로선 무엇을 들이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곧 알게 될 터였으므로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저하께서는 어인 일로 노관을 찾으셨습니까?”

“이번에 우의정으로 내정되셨다지요.”

“과분하게도, 성상의 후의를 입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바마마께 예조판서를 추천해 드린 게 나입니다.”

“……?”

세자의 말에 남이공의 눈살이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자신을 추천했다 함은, 전하께서 의정의 후보를 세자와 함께 논의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자가 먼저 추천했다는 뜻일까.

전자의 경우 추천을 해주었다면 백번 고마운 일이나 후자라면 수혜를 입었더라도 용납 못 할 일이었다.

그야, 대신의 임명은 전적으로 전하의 역할이니까.

세자가 감히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세자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아바마마께서 먼저 소자를 불러 뜻을 물어보셨습니다.”

“음.”

“물론, 의정의 선발에 있어 어찌 일개 세자에 불과한 내가 아바마마께 왈가왈부했겠습니까?”

남이공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부왕의 의향을 물어보았다고 해도, 기꺼이 답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거듭 강권하셨습니다. 세자는 후왕後王이니, 의정을 선발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대왕의 성정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왕은 세자의 교육에 무척이나 진심이었고, 또 뛰어난 왕이 되어주기를 바랐으므로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으니까.

이번 일도 그 일환이라 본다면 이상하지 않았다.

세자 역시, 인사에 개입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우려부터 들었지만 본디 가벼운 마음으로 대왕의 일에 개입할 인물이 아니었다.

“성상께서는 저하의 간언을 듣고 노관을 내정하셨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남이공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세자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

때마침 들어온 입시가 두 사람 앞에 각기 다과상을 놓았다.

두 다과상에는 남이공으로선 의외의 차이가 있었는데, 자신의 상에는 과자가 있었으나 세자의 상에는 없었다.

“저하, 상이 바뀐 듯하옵니다.”

“아닙니다. 이게 맞습니다.”

“저하께서는 과자를 아니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하, 아니 좋아하지는 않고 제법 좋아하지요.”

“……?”

그런데 왜 아니 들인단 말인가.

세자가 의문에 답했다.

“다만 아바마마께서 소자에게 거듭 우려하시기를, 소자가 몸이 좋지 않아 단 것과 술, 고기를 지양하고 계속 몸을 풀어야 대업을 오래 지탱할 수 있다 분부하셨으므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자를 제법 좋아하심에도 대왕의 분부를 쫓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마다하시니, 심성이 참으로 굳건하십니다.”

“……그냥 당부하시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세자가 멋쩍은 미소를 머금은 채 판이한 분위기로 답했다.

남이공은 화제의 변화를 곧바로 따라잡지 못하여 주저하는데, 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무언가를 알고 계시는 듯하십니다. 나나, 다른 분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음.”

남이공이 곧장 침음을 토해냈다.

“노관 역시,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성상께서는 항상 범부들보다 멀리 보고 높게 생각하시지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쫓지 못하여 방황하였습니다. 노관 역시 마냥 당당하다고는 못 할 과거지요.”

“나라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세자는 손끝으로 찻잔을 돌리다가, 천천히 비워내고는 말했다.

“내가 예조판서를 부른 건, 대감의 의정 내정에 기여했음을 알리기 위함은 아닙니다. 어차피 대감께서도 성지는 짐작하셨겠지요?”

“아뢰옵기 저어되오나, 노관이 감히 짐작하자면 신이 사정을 전해 듣고 후왕이 되실 저하를 잘 보필해주기를 바라는 듯하옵니다.”

“후후.”

세자는 쓰게 웃었다.

“이번 전쟁에도 나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음은 아십니까?”

“……예. 전하께서 군신의 공의를 거론하시며 세자도 함께 언급하였지요.”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보통, 이런 중대사에는 세자의 의향은 물어보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다시 돌이켜보니 과연 그러했다.

더욱이 세자에게 의정을 추천받은 내막을 생각해본다면, 가볍게 의사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을 터.

“그때도 아바마마께서는 이렇게 하교하셨습니다. 세자는 장차 후왕이 될 몸이니, 물려받을 나라 또한 선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위험한 개입을 통해 조선만의 바다를 추구하되, 가까스로 성취한 중원과의 교두보를 상실할 위험을 감수할 것이냐.

혹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중원과의 교두보를 온전히 보전할 것이냐.

“이제는 아바마마께서 소자의 의견을…… 세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의견을 물어보시는 듯해 두려울 따름입니다.”

세자의 하소연에 남이공도 잔을 들어 차를 비웠다. 떫고 시원한 특유의 감각이 목에 걸려있던 것을 내려주는 듯했다.

“노관 역시 자칫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될까 저어되옵니다만…….”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전하께서는 항상 최선을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저하도 아실 것입니다.”

“예.”

“그렇다면, 지금의 이 같은 전하의 뜻 또한 최선이 아닐까 하옵니다.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과연 그렇겠습니까?”

세자가 기운 없이 물어보았기에, 남이공은 일부러라도 기운을 차려 답했다.

“과연 아닌들 저하께서 어찌하실 수 있겠으며, 노관 또한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고한 뜻을 물살로 삼아 타고 떠내려갈 따름이지요.”

“그것은…….”

세자는 고민 끝에 하하,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아바마마의 성지가 있으시다면 자식이 되어 어떻게 거스르겠습니까.”

여전히 무기력한 대답이었으므로 남이공은 자신의 답이 충분치 않았음을 알았으나, 더 말할 수도 없었다.

대왕이 이처럼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데 저변이 무엇이건, 이런 쪽에서 섣부른 추측은 정녕 분수에 넘치는 짓이었다.

“노관은 저하께서 속히 기운 차리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세자는 대답과 함께 잔을 들었으나, 쉬이 입에 대지는 못하고 시선만 바깥으로 돌렸다.

남이공 역시 세자를 쫓아 하늘과 풍광을 마주했다.

* * *

북경의 함락에 이어 순나라와 금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지며, 전화戰禍의 악명이 극단으로 들끓자 일대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고향과 땅을 버릴 각오를 세우고도 찾아갈 곳은 많지 않았다.

북쪽은 땅이 척박하고 몽골 부족이 난립하여 찾아갔다간 노예로 사로잡히기에 십상이었다.

이는 만주족이 지배하는 동쪽의 금나라도 마찬가지.

서쪽은 순나라가 발원하고 서나라가 궐기한 땅인데, 두 집단이 모두 나라를 자칭하나 무리가 본디 행정이나 제도와는 거리가 멀어 반쯤은 엉성하고 반쯤은 야생인 세상이었다.

외부인이 정착하는 것도, 정착해 살아가는 것도 모두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러니, 북직예의 피난민들이 일단 짐을 챙겨 나섰다면 갈 곳은 남쪽밖에 없었다.

유일한 선택지이나 제법 합리적인 길이기도 했다.

남쪽은 그간 중원을 지배해온 명나라의 남은 절반이 있으며, 또한 가는 길에는 조선의 영토가 있어 사나운 오랑캐나 도적들에게 해 당할 염려가 적었다.

다만 문제는, 이 같은 결과를 도출한 피난민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주부의 동헌.

이곳과 진평부의 두 부사가 마주했다.

“공사가 다망하셨을 텐데,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주부사가 먼저 감사를 표하자 진평부사 김경여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우리 모두 바다 건너 이역만리 땅에서 함께 고생하는 처지들인데, 공사야 다망치 아니한 건 아닙니다만, 진평부사께서도 가벼운 일로 부르신 건 아니실 테지요.”

“하하.”

“사정은 이 사람 또한 짐작가는 바가 있는데, 말씀을 드려봐도 되겠습니까?”

“하시지요! 꺼리실 것 전혀 없습니다.”

내주부사가 호쾌하게 권했고, 김경여는 기꺼이 말했다.

“피난민들 때문이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이 상황에 다른 이유야 있겠냐며, 내주부사는 자신이 앉은 자리를 손끝으로 탁탁 찌르고는 말했다.

“북직예에서 한 바가지로 내려온 이놈들이 말입니다. 피난민이라면 얌전히 피난만 할 것이지,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동네마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는 판국입니다.”

“내주 내부는 어떻습니까?”

“에이. 사고뭉치들 겨우 정리한 게 엊그제인데 또 사고뭉치를 들일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 안 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지랄하는 건 이 사람이 용납 못 하지요.”

대도시인 내주 그 자체와 가까운 주변 지역은 내주부사의 관할권이었다.

피난민들이 소란을 일으켜대는 건 권외의 지역들.

엄밀하게는, 내주부사가 신경 써줄 필요가 없었다.

최근까지는.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깥의 무주공산의 마을들이 말입니다.”

“예.”

“거지 떼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지쳤는지, 이번에 이 사람에게 대표와 늙은이들을 보내 단체로 귀부를 요청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이것을 받아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는데 이 사람 혼자 결정한 일은 아닌 듯하여 진평부사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내주가 귀부한 뒤, 조선은 두 부사의 합의에 따라 선조치 후보고를 허락했다.

배편이 왕복을 다 기다렸다간 호기를 놓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건 좋지만, 반대로 그 판단력이 의심받는 결과가 나온다면 뒤이을 불이익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김경여도 주안상이 식어가거나 말거나, 일단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어째…… 진평부사께서도 확신이 아니 서십니까?”

“아조의 영토가 넓어지고, 그것을 온전히 나라와 백성의 영광으로 삼을 수 있다면 어찌 확신이 아니 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역량이 부족한데 자칫 과욕을 부리는 건 아닐지 걱정할 따름이지요.”

“이 사람 생각도 그렇습니다.”

김경여가 마저 고민한 끝에 답했다.

“귀부를 요청한 마을들은, 그만큼 처지가 절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아니 그랬겠습니까. 아예 이 사람에게 생살여탈권이 있기라도 한 양 절박하게 귀부를 간청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마을의 장정들을 부려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보태도 되지 않겠습니까?”

“모양새가 썩 좋지 않을 듯한데…….”

“아니지요.”

김경여가 단언했다.

그간 나라의 비호를 받지 못했으므로 자경단쯤은 존재했을 터.

이제는 그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까운 조선령에 의탁하려는 것뿐이다.

“조선에 진심으로 감화되어 귀부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당장의 생사를 어찌하기 위해서 귀부를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래는 정당해야지요. 사례가 보여주지 않습니까?”

무상의 후의는 시건방진 변심을 불러오기 쉽다. 내주의 유지들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이제이! 그것만 잘 해낸다면, 가까운 곳이야 얼마든 지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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