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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82화 (28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2화

“진평부사의 혜안을 따라야겠습니다.”

내주부사의 말에 진평부사 김경여가 미소지었다.

“혜안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요. 모쪼록 내주부사께서 살펴 행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어 김경여는 분위기를 바꾸어 물었다.

“본론은 이것으로 마무리겠습니까?”

“바쁘신지요.”

“중차대한 논의와 함께 지혜를 빌려드린다고, 이거. 소박한 주안상이 다 식어버렸습니다.”

김경여의 능청스러운 불만에, 내주부사는 짧게 웃곤 제대로 된 주안상을 준비시켰다.

* * *

김경여가 떠나고 며칠 뒤, 내주부사는 내주를 방문한 마을마다 인편을 보내 다시 대표를 소집했다.

일전에 미뤄진 대답을 이번에 들이리라 예상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결과는 이미 정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대표들은 이전보다 더욱 절박하게 호소했다.

“대인, 저희의 귀부를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십시오!”

각 마을의 대표와 원로들이 호소와 함께 엎드려 절을 올렸고, 그중 가장 앞에 선 이가 아뢨다.

“소인들이 내주를 방문한 뒤에도, 북에서 내려온 간악한 도적들은 여전히 거리낌이 없어 떼로 몰려다니며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고 아녀자를 희롱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선 되려 쫓아내고자 위협하니, 단 며칠 사이에 겪은 수모가 이처럼 가혹합니다. 부디 대인께서는 헤아려 주십시오!”

“헤아려 주십시오!”

마을들은 오래전부터 자경단을 결성해 도적을 방비해왔지만, 피난민의 수는 한 줌 자경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도였다.

자칫 충돌이라도 발생한다면 자경단은 몰살당하고 마을은 그대로 유린당할 터.

그러나 인내의 대가는 오로지 수모뿐인지라, 안에서는 피난민들을 다 족쳐야 하니 말아야 하니 다툼이 많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 쪽도 궁극적인 대안은 될 수 없었다.

계속 당하는 것과 분노를 분출하고 보복당하는 것이 상책이지는 않으니까.

사정이 이러할 때, 때마침 인접한 조선령은 기대기 너무나도 좋은 언덕이었다.

나라에 다시 귀속되어 세금과 역을 지게는 되겠지만, 이것을 아까워하기엔 잃을 생명이 아까웠고 겪는 고통이 뼈아팠다.

내주를 방문했던 며칠 전부터 최근까지는 그것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귀부만 받아주신다면, 저희는 대인게서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따르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십시오, 대인! 살려주십시오!”

이러한 대표들의 절박함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은 내주부사에게 제법 흡족한 것이었다.

조선이 영토의 과도한 팽창을 지양해온 건 그간 좁은 반도에 속박되어 온 국가로서 대영토와 방대한 인구의 통제 및 교화가 모두 어렵기 때문.

하지만 저들이 순종적이고 절박할수록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었다.

“조선에 귀부할지 말지는 그대들 자유이나, 한 번 귀부하게 되면 무를 수 없어 항구히 조선의 신민으로 복종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들로서는 바라는 바이옵니다.”

“또한 조선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조선말을 배우고, 세금과 역을 져야 하며, 배반과 불복종은 엄정하게 처벌되는데 그래도 귀부할 것이냐?”

“저희는 오로지 대인께서 받아주시기만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좋다. 그 마음 변치 않도록 하라.”

내주부사가 경고하듯 엄히 일렀으나, 마을의 각 대표와 원로들은 두 팔까지 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그간 조선의 신료로서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만세萬世다.

과거 명나라가 주도하는 질서에 편입한 뒤로,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만세는 거론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조선의 신료로서 만세를 듣게 되었으니 감상만은 신선했다.

“그대들이 위급한 지경에 놓인 건 알고 있다. 이미 마을마다 교육과 보호를 위한 인원을 마련해두었으니, 그대들이 가는 길을 안내해라.”

“예에!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각 마을의 대표와 원로들이 손을 비비며 거듭 고마움을 드러내는 동안, 내주부사는 아전을 불러 나머지를 맡겼다.

* * *

내주부가 주변의 옛 행정구역을 회복해나가고, 경계와 방비를 탄탄히 하자 주변을 지나가는 피난민들도 행동거지를 조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조선의 존재를 의식해서만은 아니었다.

목숨만 남은 처지라는 건 달리 말해서 생명 외엔 잃을 게 없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그 하나가 전부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피난민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문이 돌았다.

어떤 피난민 무리가 조선령에서 깽판을 치다가 모조리 참수되었다, 생매장을 당했다, 본보기로 고문을 받다가 처형됐다.

결말이 다 자극적이었으므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엔 충분했다.

고통을 피하고 생명을 보전하고자 이외의 모든 걸 포기한 피난민들이었으니까.

이러한 소문의 진위는 조선에 있어선 중요하지 않았다.

효과만은 확실했으니까.

그리고, 조선의 이러한 조처에 감화된 자들이 있었다.

“명나라는 천명과 대의를 잃어 중원의 절반을 잃었는데, 반대로 해동성국은 오랑캐의 무리를 사냥개로 부리고 중원으로 나와 혼란한 천하를 안정시켰습니다!”

명분과 세력에 죽고 못 사는 이들.

“새로운 시대의 주인은 바로 조선이니,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남은 평생을 조선에 봉사하며 천하의 안녕에 이바지하고자 하옵니다! 대인께서는 부디 상량해 주십시오!”

북경과 북직예에서 탈출한 식자들이었다.

때마침 산동의 조선령은 행정업무와 현황 파악에 필요한 말단 인력이 절실한 참이었다.

원정을 온 군사들이 남아서 치안 확보와 교육에 힘써주고는 있지만, 헌신에도 한계는 존재했고 귀국을 바라는 이가 많았으니까.

그 공석을 채워줄 적절한 인력이 필요했는데 잘 배웠으며 순종하는 지식인은 마다할 게 아니었다.

꼭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배우고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부족한 법.

그래도, 내주부사가 식자들에게 해줄 말은 다른 이들과 동일했다.

“그대들의 발상과 말은 무척 가상하지만, 아조의 신민이라면 모두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이제는 없는 내주부의 여러 실력자가 그 점을 망각했지.”

“저희는 오로지 순종할 기회만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행동이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약속도 공허할 뿐이다. 그대들의 약조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드러나 봐야 알겠지.”

“하오시면…….”

식자들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지켜보겠다는 건, 일단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내주부사는 끄덕이며 지겹도록 외워온 질문을 했다.

“조선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조선말을 배우고, 세금과 역을 져야 하며, 배반과 불복종은 엄하게 처벌되는데 그래도 귀부하겠는가?”

이에 식자들은 무릎이 부서져라, 땅바닥에 꿇고는 절을 올렸다.

“저희는 비록 명나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뼈는 조선 땅에서 묻고자 하옵니다!”

“그 마음 변치 않도록 하라.”

내주부사가 해줄 말은 그뿐이었다.

* * *

북직예 한복판, 북경 앞에서.

순나라의 대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끝내 격파한 호격의 금나라군은, 가까스로 북경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 선 북경성은 12m 높이의 내성과 6m 높이의 외성을 갖추었으며, 내성은 길이만 23km에 달하는 거성이었다.

북경성의 구조는 독특했다.

외성이 자금 부족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축소 축조되어 내성을 완전히 감싸지 못하고, 남쪽에만 둘려 내성을 직접 타격할 수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외성의 존재의의가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지만, 내성을 직접 타격하더라도 12m 높이에 성곽 상부마저 12m 두께에 달하는 거성을 공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호격의 금나라 군대는 거듭된 교전으로 전투병이 축소하고 또 지쳐 만신창이인 상태.

“큰일 났군요.”

호격의 친위대 대장인 라이무부의 솔직한 감상이 당장 금나라 군대가 처한 현실을 축약해 주었다.

“재수 없는 소리 마라, 라이무부. 이미 충분히 기분 나쁘니까.”

“예.”

호격은 애꿎은 라이무부를 질책하며 약간의 화풀이는 했지만,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고 북경성 성곽에 금이라도 가는 건 아니었다.

“도적 떼에 불과한 순나라 놈들은 어떻게 저 성벽을 넘어간 걸까.”

“순나라는 항상 대병을 앞세워 몰아붙였으니, 북경성을 함락할 때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드높은 성벽일지라도 그 아래 시체를 잔뜩 쌓는다면 올라서기 쉬울 테지요.”

“그것이라면 참으로 순나라 놈들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용하기에는 힘든 전략이군.”

시체의 수가 부족하다면 주변의 한족을 잡아다가 내몰아도 그만이겠지만, 순나라 군대와 교전을 반복하는 동안 일대의 마을들은 모두 텅 비어버렸다.

대개는 북경성으로 피신했을 테고, 나머지는 먼지처럼 흩어졌으리라.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간들을 잡아다 내몰 수는 없었다.

“폐하, 조선인들에게 지혜를 빌려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대가를 원할 텐데.”

“그들은 평범한 상인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위장한 조선의 눈과 귀이지요. 그리고 조선이 발해를 얻기 위해서는 폐하의 원정이 성공해야 하며, 원정의 성패는 북경성의 함락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조선이 발해를 얻으려면 군대가 북경성을 함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으로 저들에게는 충분한 대가가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대의 말이 옳아. 인내심은 시험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시건방진 조선인들에게 지혜를 빌리는 것도 방법이겠군.”

“불러올까요.”

“그래.”

잠시 후 라이무부가 조선인 주보상인을 데려왔다.

일전에 일어나서 자신의 이중적인 소속을 드러냈던 인물로, 라이무부 역시 얼굴을 익혀두었게 곧바로 ‘머리 좋은’ 조선인을 데려올 수 있었다.

“한이시여.”

조선인 상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호격은 맞은편의 성곽을 가리켰다.

“조선이 발해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북경성을 함락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도 알겠지.”

“예.”

“하지만 나의 군대는 당장 지치고 피로하여, 거성을 공략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물리적인 방법이 통하기 어렵다면, 비물리적인 방법을 시도해야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이 이상은 무료로 해드리지 못합니다.”

“…뭐?”

호격이 어처구니가 없어 묻자, 상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한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저는 근본적으로 상인입니다. 조선의 신민으로서 국익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쁜 일이나, 사사로운 이익도 놓칠 수 없지요.”

“자네의 뻔뻔함은 당혹스러울 정도군!”

“한을 향한 존경심의 의미로 값싸게 모시겠습니다. 금 열 관이면 충분하겠군요.”

“돌아버리겠군!”

호격은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마음 같아서는 뻔뻔한 낯짝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조선 쪽의 내밀한 인물에게 해라도 입혔다간 어떤 후폭풍이 몰려올지 몰랐다.

그렇게 가까스로 자신을 설득한 호격이 물었다.

“만약 너의 방법으로 북경성이 함락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엇을 감수할 것이냐?!”

“저는 북경성과 북직예의 가치가 고작 금 열 관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열 관은 단지 지혜를 빌려드리는 대가일 뿐이지요. 천 관을 마련해주신다면 어떻게든 성문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이……!”

호격이 욱하는 마음에 칼을 쥐었으나, 조선인 상인은 놀라긴커녕 뭐 어쩔 거냐는 투의 빤한 낯짝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제기랄!”

호격은 욕지거리를 토하며 칼을 뽑았고, 라이무부와 친위대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그러나 그들이 제지할 새도 없이, 호격은 뽑아 든 칼을 상인 앞에 내던졌다.

탱그랑!

뒤이어 호격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까지 뽑아 상인의 가슴께 내던지고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것이라면 반 관쯤의 가치는 될 것이다! 라이무부!”

“…예에.”

“저 거머리 독사 같은 놈에게 나머지 셈을 치러줘라!”

“알겠습니다.”

라이무부가 눈치를 보며 친위대 일부를 이끌고 물러나자, 호격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이제 지껄여봐라, 사갈 같은 조선놈아! 얼마나 대단한 지혜를 가졌기에 나를 이토록 능멸했는지 알아야겠다!”

상인은 기꺼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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