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83화
호격에게 불린 상인은 자신 앞에 보화 상자를 두고서 말했다.
“이자성과 순나라가 북경성을 함락한 방법은 분명 수적 우위도 있으나, 내부에서의 호응이 컸습니다.”
이에 호격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작 도적들 상대로 내응을 했다고?”
“명나라는 안팎으로 혼란하여, 나라가 몰락하는 와중에도 유력자들은 수도에서 정쟁과 패싸움을 벌이며 민생을 도외시했습니다. 유력자들은 나라의 주인이 저들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라의 실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백성들이 아닙니까?”
“…….”
“고통받는 와중 외면까지 당한 백성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지요. 안팎이 모두 도적으로 한패가 되었으니, 내응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상인의 해설에 호격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나는 이용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설마, 한족 나부랭이들이 스스로 우리와 같다고 여기게 할 비법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정녕 그러한 비법이 있다면, 호격은 능멸과 함께 빼앗긴 금 열 관의 미련을 깔끔하게 잊어줄 수 있었다.
상인이 답했다.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점에서만은 동일합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안에서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근본이 상인이라던 자치고는 아는 게 많군. 술법이라도 익힌 건가?”
“장사꾼이라면 돈 냄새를 잘 맡아야지요. 빼앗길 걱정만 없었다면 안으로 들어가 식량을 팔았을 것입니다.”
“허.”
호격은 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뻔뻔한 상인을 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북경성의 주민들을 식량으로 매수하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람을 내부로 잠입시켜서?”
“그것이 쉬웠다면, 군사를 잠입시켜 성문 여는 것을 권해드렸겠지요. 외람되오나, 그 같은 재주는 모두가 공유하는 게 아닙니다.”
“부럽군.”
호격은 영혼 없이 답하고는 일렀다.
“그렇다면, 잠입도 하지 않고 어떻게 북경성의 주민을 매수하라는 거지?”
“쉽습니다. 사로잡은 포로 중 목청 좋은 사람을 잘 구슬려 기병 몇 기와 함께 북경성을 당당히 찾아가 성문을 여는 자는 두둑이 보상해 주겠다고 약조하는 것이지요.”
“경계만 더욱 삼엄해질 텐데.”
“그 경계를 서는 건 지휘관들이 아닙니다. 혹시, 쌀 이백 석 정도는 태워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어찌하여 멀쩡한 쌀을 태우라는 말인가. 언제는 그것으로 매수하라더니.”
호격의 의문에 상인은 답답하다는 투로 답했다.
“딱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오천 개의 자루를 구비해 이백 개만 쌀로 채우고 나머지는 겨와 나무 부스러기 따위로 그득 채우십시오. 그리고 열 개의 더미로 나눈 다음, 쌀을 담은 자루는 첫 두 더미의 가장자리에만 둘러놓으시는 겁니다.”
“허…… 수법이!”
“예, 저들이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곡식더미를 하루에 하나씩 태워 버리겠다고 공표한 뒤 첫 더미부터 가장자리의 쌀자루들을 칼질해 흘러내리는 쌀을 과시하고 불을 질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광경을 보는 병사들로 시작해, 군중과 병사들의 가족을 타고 북경성 전체에 금나라군이 성문 앞에서 수천 섬 쌀을 아깝게 태워 버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 터였다.
“거성에 갇혀 식량은 이미 다 거덜 낸 채 하루하루 굶어가는 수십만 주민 중 최소 수천은 눈깔이 돌아가서 성문을 열고자 하겠지요. 그중 직접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포함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상인이 권하자 호격은 감탄만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비열하고 사악하군……. 간악하고 사특해! 나로선 상상도 못 한 발상이다!”
일견 수법의 교묘함을 힐난하는 듯해도 호격은 진심으로 놀라고 감탄해서 하는 소리였다.
“건방지긴 했지만, 정녕 금 열 관이 아깝지 않은 지혜였다! 그대의 수법으로 북경성이 함락된다면 금 백 관을 주지!”
“약조하셨습니다.”
“하! 나는 금나라의 대한이다! 빈말 따윈 하지 않아! 네놈은 백 관의 금을 어떻게 가져갈지나 궁리해라!”
“한께서는 제게 행복한 고민을 들게 해주시는군요. 그 관대함에 거듭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상인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호격은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가라! 나는 당장 네 수법을 따라야겠으니!”
“예.”
상인이 물러나고, 호격은 이미 북경성을 얻은 듯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라이무부! 그대도 들었겠지! 포로 중에 목청이 좋은 놈을 수배해라!”
“알겠습니다!”
* * *
성과는 이틀 만에 드러났다.
호격의 수하들이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첫 번째 곡식더미 옆에서 두 번째 곡식더미를 찢어 쌀가루를 흩뿌리자, 참다못한 성문의 병사들이 집단으로 난동을 일으킨 것이다.
성곽을 지켜야 할 병사들이 단체로 내려가고, 너머에서 한참 시끄럽게 떠들고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육중한 성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난동에 개입한 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열리기 시작한 성문의 좁은 틈새로부터 깡마른 사람들이 눈을 뒤집은 채로 몰려나왔고, 곧바로 곡식더미에 몸을 던져 서로를 밀치고 때리고 짓밟으며 흘러내린 쌀알을 줍고 자루를 파헤쳤다.
다른 무더기를 파헤치던 이들은 터진 자루에서 흘러내린 겨와 나뭇조각을 보며 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활짝 열린 성문에서는 여전히 굶주린 이들이 파도처럼 몰려나오는 중이었고 무더기 주변의 사람들은 인파에 갇혀 물러나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로 공격당할 뿐이었다.
매캐하게 번지는 흙먼지 사이로 사람의 머리만이 펼쳐놓은 검은깨처럼 바글거렸다.
호격에게는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쉽구나!”
호방하게 외친 호격이 뒤이어 외쳤다.
“저 머저리들은 내버려 두고, 북경성을 장악해라!”
지시가 전군에 하달되었다.
금나라의 군사들은 전투 한번 없이 거성을 함락한 데 감탄하며, 성문 앞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주민들을 무시하고 모두 활짝 열린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에서는 여전히 주민들이 나오는 중이었으나, 금나라 군사들이 몰아치자 모두 놀라서 발을 돌렸다.
물론 모두가 마음처럼 되지는 않아 앞뒤로 갇힌 자들이 부지기수였으나 금나라군은 그런 상황을 해소할 능력이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은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버리며 시체를 밟으며 나아간 것이다.
금나라군이 성문을 헤치고 나오자, 상황을 알게 된 북경의 주민들은 파도 맞은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대오를 정비해라! 약탈은 나중에 허락할 테니, 지금은 이자성을 사로잡는 게 먼저다!”
호격은 수하들을 통해 달아오른 군사를 통제하며 뻥 뚫린 대로를 통해 북경의 황성으로 나아갔다.
그 기세만은 이미 승전한 군대의 개선과 같아서, 순나라 군사의 복장을 하고도 감히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 * *
광대하고 웅장한 자금성의 위광은 승전에 이미 취한 호격조차 감명받기엔 충분했다.
분명, 자금성의 광경은 예상외의 장관이 맞았으나 막상 호격이 기대한 건 없었다.
“왜 궁궐에 아무도 없지?!”
자칭에 불과할지라도, 궁성이라면 마땅히 황제를 모시는 내시와 시비들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자금성의 내부는 너무나도 고요해, 호격으로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적막만이 흐를 따름이었다.
“분명 사정을 아는 놈이 있을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숨은 자는 없는지 확인해라!”
“예!”
군사들이 황성 내부로 흩어지자 호격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디, 황궁의 재물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방에 병사들을 흩뿌려서야, 놈들이 전리품을 도둑질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손에 닿으면 뭐든지 집어 호주머니에 숨길 놈들이니까.
“제기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고 자칭 황제를 붙잡아야만 전쟁을 더 쉽게 끝낼 수 있으니까.
일각이 여삼추 같은 불안한 기다림 끝에, 수하 몇이 돌아와 보고했다.
“이상합니다! 황궁에 재물도, 사람도 하나 없습니다!”
“뭐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본디 찾기로 한 사람보다 재물이 먼저 거론되었으나, 수하들도 호격도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본심이야 어디에 있건, 중요한 점은 그들이 원하는 건 이곳에 없다는 점이었다.
“…….”
호격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가, 곧 인상을 찌푸리며 단정했다.
“도망쳤군.”
북경성의 방위는 한 줌 병사와 저들에게 기대고자 온 무수한 주민들에게 떠넘기고, 재물과 가까운 수하들만 챙겨 순나라가 발원한 서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심증뿐이나, 사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추측에 호격의 부하들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재화와 포로, 그것을 모조리 놓친 채 높고 두꺼운 성과 바글거리는 한족 주민들만 떠안게 되었으니까.
“너희들…….”
“예, 폐하.”
“나가서 약탈해라. 살아있는 건 죽이고, 살아있지 않은 건 빼앗아라.”
굶주려 빌빌거리던 주민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겠느냐만, 비어버린 황궁을 위해 갖은 꼴값을 떨어온 호격이 당장 원하는 건 분풀이밖에 없었다.
게다가 호격은 조선 상인에게 한을 걸어가며 백 관의 금까지 약조했다.
어쩌면, 눈 좋고 귀 밝은 그들이 북경성 내부가 이미 비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이 결과는 더더욱 치욕적이었다.
“……불은 절대로 놓지 말도록! 그건 마지막 단계니까!”
호격은 검지까지 들어 보이며 수하들에게 단단히 주의해 일렀고, 수하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예!”
* * *
호격과 금나라 군대는 챙길 수 있는 전부를 챙겼지만, 전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대신 호격은 예정대로 북경에 불을 질렀다.
수백 년간 번화한 대명의 수도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땔감이 되어 타올랐다.
북경에 거주했고 피난했던 수십만 주민은 모두 이글거리는 북경을 뒤로해야 했다.
가짜 곡식더미에 속아 미리 북경을 빠져나갔던 자들은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었다.
늦게까지 북경에 남아 있던 자들은 금나라에 노예로 잡혀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으니까.
번져오는 매캐한 잿가루 사이로 호격의 한 부하가 물었다.
“산해관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만한 수의 포로를 모두 바다로 옮기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에 호격이 단호하게 답했다.
“바다로 건너지 않는다. 우리는 산해관을 넘는다.”
“현재의 전력으로 산해관을 함락하는 건 벅찰 것이옵니다, 폐하.”
군대는 줄어들었고 지쳤다. 북경을 장악하는 와중 힘은 잔뜩 뺐지만, 수확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충천한 사기는 급부상한 속도로 추락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
많은 이들이 더 이상의 교전을 마다하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간의 수확이 나쁘지는 않았으므로, 이제는 물러날 때라고 여긴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금성탕지의 철옹성인 산해관을 공략한다는 건 어불성설.
“우리가 공략하는 게 아니다.”
“……예? 그러면 조선이?”
호격은 팔을 뻗었다. 그곳에 자리한 건 조선군도, 금나라의 군대도 아니었다.
짐승처럼 엮인 채 줄줄이 끌려가는 북경의 주민들이었다.
“나는 저들로써 산해관을 공략할 것이다. 순나라 놈들이 동족의 시체로 산을 쌓을 생각이 없다면, 성문을 열어야겠지.”
호격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